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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26. 2019

루카 틸다 다코타

Luca Tilda Dakota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 속 틸다 스윈튼과 다코타 존슨
-배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다코타 존슨(Dakota Johnson)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nino) 


-영화: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2015)
<서스페리아(Suspiria)>(2018)
 
* 위 두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는, 다코타 존슨의 얼굴을 대중에 알렸다. 동시에 혹평을 받은 작품과 함께 불명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레이 시리즈를 보지 않은 내게, 다코타 존슨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스크린에서 본 그의 얼굴은 고작 두 개,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였다. 연기가 아주 뛰어나거나 색다르지는 않았지만, 루카식 감각적인 연출에 어울리는 표정과 몸짓을 자연스럽게 입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에서, 그는 틸다 스윈튼과 호흡을 맞췄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두 배우를 담는 방식은 좀 다르다. 다코타 존슨은 한껏 치명적이고 분명한 모습으로 중심을 잡는다. 카메라는 배우와 거리를 멀리 두고 가끔 대상화 하듯 찍는다. 자기 속을 다 드러내지 않고 패를 숨겨 작품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 패가 드러나는 순간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기도 한다. 반면 <아이 엠 러브>(2009)부터 루카와 함께 작업했던 틸다 스윈튼은, 작품의 흐름을 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갈등과 흔들림을 겪으며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다.



<비거 스플래쉬>(2015)


<비거 스플래쉬>(2015)의 한 장면, 해리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마리안은 바지도 입지 않고 달려나간다. 시체를 보고, 우는 대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금방 이라도 물 속으로 뛰어들 듯 손을 내저으며 주저앉는다. 카메라에 잡힌 얼굴은 마른 상태로 일그러진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인지하기 전, 충격과 괴로움에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의 모습을, 틸다 스윈튼은 대사와 눈물 없이 표현해냈다. 감독은 잔인하게도, 그의 얼굴과 경쾌한 음악을 매치해 관객이 괴상한 기분을 느끼도록 만든다. 마리안의 얼굴은 마지막 순간 다시 한 번 일그러진다. 사인을 부탁하는 서장의 말에 안도하는 웃음으로, 아주 비참하게, 어이없게 구겨진다. 틸다 스윈튼은 때로는 일부러 더 본인의 외모를 망가뜨려, 캐릭터와 감정을 특별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마리안은 사람들의 관심이 피곤한 락스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척 하는 설정이라서, 거의 몸짓으로 대화하거나 겨우 속삭이기만 한다. 목소리가 제한되자, 배우의 몸이나 얼굴에 더 집중이 쏠린다. 다물고 있으니 얇은 입술이 두드러져 불안하고 긴장되어 보인다. 하지만 사이사이의 몸짓에서 강한 태도와 성격이 드러난다. 해리의 헤어를 다듬어주던 중 뱀이 나타나자 휘파람을 불고 팔을 빠르게 휘저어 폴에게 잡도록 지시하고, 해리가 머리를 움직이자 퍽 때린다.
 

마리안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 받기 쉬운 폴의 질투심과, 통제 자체가 힘든 해리의 소유욕을 상대해야 한다. 오히려 폴보다 해리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불편함과 성적 긴장감을 감추는 과장된 제스처의 친근함이다. 두 남자 사이의 경쟁적 긴장을 늦추려 애써 부드러운 표정으로 폴을 감싸고, 해리를 어른다. 목이 아파 ‘약해’ 보이는 것을 이용해, 스스로 보호해야 할 인물이 되어 두 남자가 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비거 스플래쉬>(2015)


마리안의 입장에서 본 페넬로피는, 해리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런데 전혀 모르기까지 하는, 어리고 아름다워 더 긴장되는 존재다. 페넬로피는 상대와 대화를 하기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떠보듯 말한다. 자신과 해리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마리안이 말하는 것을 들은 페넬로피는, 묘한 뉘앙스로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마리안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리안은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네게 뭘 잘못했냐’고 묻는다. 페넬로피는 못 들은 척, 아니 들었지만 무시한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하던 말을 계속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두 사람의 눈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세와 입술의 경직된 정도로 상태가 드러난다. 마리안이 느끼는 불편함과, 그것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페넬로피의 여유로움이. 경찰서에서 심문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페넬로피는 폴의 몸을 보았음을 당당하게 말하며 입가에 웃음기를 담는다. 이렇듯 일 대 일로 대응할 때, 항상 페넬로피는 긴장한 마리안의 머리 위에 있다.


<비거 스플래쉬>(2015)


루카 구아다니노는 자주 인물들의 몸을 부각시켜 찍는다. <비거 스플래쉬>에서도 그렇다. 신체 부위의 섬세하게 계산된 클로즈업은, 별다른 상황 설정 없이도 캐릭터 특성을 보여 주거나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 드러내며 말하는 해리의 입과 덥수룩한 수염, 마리안의 깡마른 발과 피곤한 듯 오그라든 입술, 페넬로피의 인상 쓴 이마와 장난스러운 손, 그리고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은 미소.


페넬로피는 젊고 아름답다. 스스로 그것을 알고 이용한다. ‘예쁘다’는 말에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에 감탄하는 어른들을 시시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허리에 힘을 빼 배를 내밀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느릿느릿 돌아다니거나, 선글라스를 껴 주위를 차단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간다.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어쩌면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것이라면 모두 사랑에 빠진다’는 본인의 말처럼, 한 발짝 물러나 세상을 떠보듯 관찰하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내 은근히 그러나 직설적으로 접근한다. 그녀에겐 도덕이나 사회적 시선, 예의 따위의 것들 보다, 순간의 감정이나 욕구에 따라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비거 스플래쉬>(2015)


페넬로피는 민감한 화제를 아무렇지 않게, 아니 오히려 일부러 던진다. 말투는 전혀 조심스럽지 않게, 어쩌면 위험할 정도로 대담하게, 나긋나긋하고 여유롭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한 웃음을 띄운다. 맑은 눈을 한 어리고 ‘순진한’ 자신에게 무례하다고 나무랄 수 없을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일에 대해 묻는 장면에서는, 진지하고 순수하고 착한 어른 남자 폴을, 스물 두 살 짜리(사실 열 일곱이었지만) ‘애’에 불과한 페넬로피가 잡아 먹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폴에게 순진하게 노골적인 유혹의 제스처를 보내다가, 유서에 쓰인 글자 이야기를 듣는 순간, 표정이 포기한 듯 어둡게 변한다. 아, 이 남자를 가지려면 마음을 구슬려선 안되겠구나. 몸이 거부할 수 없게 만들어야겠구나, 아니 그래도, 절대 완전히 ‘가질’ 수는 없겠구나, 하는 등의 깨달음이 읽혔다.


페넬로피는 폴과 잤음을 일부러 티낸다. 말을 묘하게 강조해 해리와 마리안이 눈치채도록 만든다. 저녁 테이블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하나 던진 후에, 본인은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자리를 뜨면서도 식탁을 손으로 우아하게 두드리는 것은 잊지 않는다. 페넬로피의 말을 들은 마리안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는다. 이마에는 가로로 주름이 가고, 눈은 부릅떠 유독 마르고 늙어 보인다. 반면 “다 놀았으니 집에 갈래요.”라고 말하는 페넬로피의 실루엣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비거 스플래쉬>(2015)


마리안은 말없이 모든 것을 눈치챈다. 폴과 페넬로피 사이의 공기를 알아챌 때나, 해리의 죽음이 폴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마리안의 얼굴은 경직된다. 아주 찰나이지만 관객이 그녀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틸다 스윈튼은 마리안이 무언가를 포착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얼굴에 담는다. 마리안이 정확하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애써 숨긴다면, 페넬로피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는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말하지 않는다. 애타는 폴을 내버려두고, 보기만 한다. 페넬로피는 비밀을 눈에 담음으로써 힘을 느끼며 즐긴다.


마리안 일행이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줄 아는 서장이 시체에 대해 함부로 말하자, 페넬로피는 이탈리아어로 ‘죽은 사람을 존중하라’고 강하게 말한다. 그리고 공항, ‘왜 사람들을 속이고 힘들어하는 것을 구경하느냐’는 마리안의 어긋난 비난에, 페넬로피는 ‘단지 혼자 있고 싶은 거’라고 답한다. 마리안은 발작적으로 페넬로피의 뺨을 때린다. 눈가에 곧바로 후회가 어린다. 페넬로피는 표정을 구기는 대신 놀랍고 재미있다는 듯 손을 입에 가져다 댄다, 역시 우아하게. 하지만 비행기를 향해 걸어가며 빗속에서 펑펑 운다. 모두 ‘연기’였던 것이다.


<비거 스플래쉬>(2015)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 속에서 다코타 존슨이 맡은 인물들은, ‘배우’다. 다코타 존슨이라는 배우는 이미 스크린 속에서 연기하고 있지만,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 자체가 ‘연기’를 하기 때문에, 이중의 연기가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연기’하며 살아가지만, 페넬로피의 연기는 성격과 정도가 다르고, 수지(아니 한숨의 마녀)의 연기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가면,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페넬로피가 필사적으로 떨어지려는 가면을 붙잡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 무너진다면, <서스페리아>(2018)의 수지는 서서히 스스로 벗겨낸다. 홀로 댄스 아카데미 건물로 걸어 들어와 허물을 벗듯 옷가지를 하나씩 스르륵 벗어 내려놓는 장면처럼.


아카데미를 찾아와 쭈뼛거리고 수줍은 웃음을 짓던 수지는, 춤을 시작하는 순간 돌변한다. 여유롭게 목을 돌리고, 신발을 휙 벗어 던진다. 보여주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무언가에 끌려가듯 강한 동작을 반복한다. 음악이 없어 숨소리와 손이나 발이 바닥과 공기를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데, 그래서 더 강렬하다. 낮게 웅크린 자세에서 고개를 휙 들어 허공을 노려보면, 흔한 비유지만 사냥감을 노리는 우아한 맹수 같다.
 

페넬로피처럼, 다코타 존슨의 수지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가 있다. 작품의 분위기에 걸맞게 좀 더 템포가 빠르고 미스터리한 종류의 것이다. 춤추는 장면은 물론이고, 동작에 대해 블랑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장면,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슥 드는 장면 같은 것들이 쌓이고, 이야기가 깊어 질수록 에너지가 소용돌이쳐, 마지막에 그녀가 ‘한숨의 마녀’였음이 밝혀졌을 때 위화감이 없도록 만든다. 소름 돋지만, 납득이 가도록.


<서스페리아>(2018)



<서스페리아>에서 틸다 스윈튼은 세 가지 중심 역할을 맡았는데, (마르코스는 제외하고) 클렘퍼러 박사는 아예 미스터리의 밖에서 자신의 패를 관객에게 모두 드러내는 관찰자로, 역시나 흐름을 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특수 분장 때문에 배우 본래의 분위기가 거의 없어지기도 했고, 수지와 함께 잡히는 씬이 많지 않은 데다가 일방적이어서 케미를 살피기 어려웠기 때문에, 과감히 버리고 블랑에 집중하기로 했다.
 

초반의 블랑은 미스터리하고 초월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클리셰적 ‘마녀’의 외모-길고 무늬 없는 검은색 치마와 매치되는 긴 생머리는 고고하고 어두운 우아함을 자아낸다. 큰 변화 없는 표정과 살짝 든 턱이 분위기를 더한다. 과장된 표정과 웃음, 제스처를 보이는 다른 교사들과 비교된다. 주술을 걸 때 두드러지는 눈은 공포스럽다. 그렇게 모두의 머리 위에 있는 신처럼 등장했던 블랑은, 후반부로 갈수록 입체적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낸다. 그녀는 무용단 학생들에게 주술을 걸면서도, 마르코스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최대한 학생들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유일한 강사다. 수지를 만나고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게 되면서 그 감정, 마음의 갈등은 더 커진다.


<서스페리아>(2018)


 
<비거 스플래쉬>에서 두 배우의 케미는 아주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유혹’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편협하게 요약해보면, 페넬로피는 마리안의 연인을 유혹하고, 마리안은 경계하는 역할이다. 반면 <서스페리아>에서 둘의 케미는 직접적이고, 섹슈얼하다. 언뜻 처음에는 전작에서와 역할이 바뀌어, 블랑이 유혹하고 수지가 그 유혹에 걸려드는 것 같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빠져들고 ‘유혹’당하는 건, 틸다 스윈튼의 블랑이다. 초반에 수지의 입장에서 그리는 듯한 연출은 일종의 눈속임이었달까. 후반부로 갈수록 수지의 속은 알 수 없어지고 오히려 블랑의 마음이 잡히듯 보인다. 그 미묘한 케미는 곳곳에서 피부에 닿지만, 두드러지는 몇 장면을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서스페리아>(2018)


블랑은 ‘higher(더 높게)’를 반복해 외치며 점프를 가르친다. 점프에 성공한 수지는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두 번만 말씀하셔도 충분해요.” 입가의 미소는 성공했다는 기쁨이나 배움의 즐거움으로 인해 활짝 피어난 것이라기보다는, 본래 지니고 있던 여유가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것 같다. 오히려 그녀를 보는 블랑에게서 약간이지만 긴장이 느껴진다.


공연을 마친 날 밤, 블랑은 방으로 찾아와 침대에 누운 수지 곁에 앉는다. 수지가 춤을 다르게 춘 탓에 사라에게 걸린 주술이 풀렸음을, 입을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나무란다. 꿈꾸는 듯한 분위기의 대화 끝에 수지는 말한다. “절 사랑하시잖아요.” 블랑은 웃음기 없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얼굴로 잠시 멈추었다가 수지의 눈을 쓸어내려주며 평범하게 입을 통해 말한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거야.” 마치 마음을 들킨 것처럼.


무용단 학생들과 강사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블랑과 수지는 테이블 끝과 끝에 앉아 마주 보고 있다. 블랑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있지만 눈은 가늘게 흔들린다. 반면 수지는, -서로 마주 보도록 자리를 옮긴 것도 수지다- 여유로운, 어쩐지 오히려 마녀의 것 같은 미소를 희미하게 띠고 자신 있는 눈으로 블랑을 응시한다. 침실 장면에 이어 두 사람 사이 사랑 얘기를 다룬 작품으로 아주 잠깐 착각할 정도로, 묘하고 섹슈얼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스페리아>(2018)



처음부터 끝까지 <서스페리아>의 그 불편한 기괴함을 다시 겪을 자신은 없지만, 피가 퍽퍽 터지는 시뻘건 엔딩 만큼은 꼭 다시 보고 싶다. 연출도 굉장했으나 그 난리법석에서 한숨의 마녀 답게 숨을 잔뜩 섞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우아하게 걸어 다니는 다코타 존슨의 분위기라니.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그가 손으로 관객의 눈을 감기듯 카메라를 슥 쓸어내림과 함께 화면이 검게 변한다. 뭔가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기분을 느끼며 극장을 나섰다. 앞에서 설명한 장면과 마찬가지로, 배우의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기분이다.
 

반면 블랑은 목이 잘려 죽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모든 광경을 강제로 지켜본다. 이렇듯 틸다 스윈튼은 주로 상대 배우에게 시선을 보냄으로써 다코타 존슨에게 집중이 쏠리게 만든다. 화면에서 돋보이기는커녕 초라해지기까지 하는 것을 감수한다. 작품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려면 본인의 캐릭터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감독과 세계를 공유하는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연기다.


<서스페리아>(2018)


그리고 그 연기가 빛을 더해 주는 다코타 존슨의 얼굴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한 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함이, 다른 편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두 모습이 섞여 있는 상태에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을 덮고 있다가, 숨어 있던 얼굴이 가면을 밀어내듯 드러난다.
 

<서스페리아>(2018)



살짝 치우쳐버리긴 했지만, 누가 더 아름답고, 누가 더 연기를 잘 한다,고 평가하는 글은 아니다. 두 배우의 분위기, 세대와 연기 경력이 달라 판단 자체가 어렵고, 경쟁을 붙이듯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 속에서 맡은 각각의 캐릭터와, 함께 있을 때 이어지는 연기의 끈에 일관됨이 보였기에, 연결지어 묘사해 본 것 뿐이다. 팬은 아니지만, 항상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들이다. 다음 혹은 다다음 루카월드에 틸다 스윈튼과 다코타 존슨의 이름이 나란히 있기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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