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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n 30. 2019

매튜 구드, The Insane.

매튜 구드(Matthew Goode)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영화:
<스토커(Stoker)>(2012, 감독: 박찬욱)
<버닝 맨(Burnig Man)>(2011, 감독: 조나단 테플리츠키)
Feat. <왓치맨(Watchman)>(2009, 감독: 잭 스나이더)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스토커>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튜 구드의 눈빛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 번쩍거림이 ‘악마적으로’ 발현됐을 때였다. ‘악마적’이라 해서 ‘악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괴롭힘으로써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전형적 ‘악당’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하지만 알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알아채기 힘든 특수한 목적으로 빛나며, 주인공을 혼란에 빠트리곤 하는 눈빛이다. 인디아를 보는 찰리의 눈이 그렇다.  


<스토커>(2012)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본 작품이. 이상하게도 보면서 잘생겼다, 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외모가 관객을 소름 끼치게 하는 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름에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데가 있었고, ‘찰리 스토커’는 매튜 구드의 작품들을 내 플레이리스트에 넣는 계기가 되었다.


<스토커>(2012)


[소리와 시선]


<스토커>에서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사운드다. 찰리는 화면이 아니라 소리로 먼저 등장한다. 후에 인디아가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도 들리는-얼굴 없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원래 영국 영어를 쓰는 배우가 미국식 발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뭇 다른 느낌이기도 하다. 계속 자신을 피하던 인디아를 마침내 대면한 후, 발음 하나하나를 꼭꼭 씹듯 ‘I’m so sorry’를 뱉는다. 원래의 뜻처럼 조의를 표하는 것이 아닌 기계적인 소리, 혹은 다른 의미가 있는 말처럼 들린다. 찰리는 일상적인 말을 특이하게 강조해 말함으로써 인디아에게만 다르게 다가가도록 만든다. 이블린 앞에서 펼치는, 의도가 분명한 연기와, 인디아를 대하는 태도의 미묘한 차이는, 말투와 시선 처리의 조합에서 온다. 부드러운 땅에 대한, 와인의 숙성에 대한, 냉동고에 물건을 넣는 것에 대한, 자신이 집에 머무르는 것에 대한, 일상적인 단어들은, 차분하고 느리고 부드러운 말투, 의미심장한 시선 처리와 조화를 이루어 관객을 의아하게, 더 나아가 소름 돋게 만든다. 와인을 인디아에게 밀며, ‘1994, 네가 태어난 해지.’ 라고 말하는 찰리는, 마치 와인처럼 널 마셔버리겠다는 듯한 확장된 눈으로 응시한다.


<스토커>(2012)


[몸]


작품에는 유독 인디아가 멀리 있는 찰리를 보는 장면이 많다. 그럴 때면 대개 찰리도 인디아를 보거나 의식한다. 멀리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는, 삽을 들고 서 있는, 다리를 펴고 앉아 책을 읽는, 학교 앞에 차를 대고 기대 서 있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기대 있는 자세들은 완벽히 정제되어 있다. 화보를 촬영하는 모델 같다. 멋지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누가 자신을 보기를 기대하는 듯 폼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스토커>(2012)


[표정]
 
찰리의 얼굴에도 톰이나 휴 처럼 웃음기가 어려 있으나, 장난기가 아닌 광기에 가깝게 느껴진다. 매튜 구드는 일부러 경직 시킨 ‘인형의 얼굴’로 찰리를 표현한다. 자신이 요리한 것을 먹지 않고, 팔을 식탁에 올려놓은 채 다른 사람들을 뚫어져라 보기만 한다. 그 표정은 무표정과 미소 사이 미묘한 경계에 있다. 여유로우나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 확장된 눈에는 다른 작품에서처럼 번쩍거리는 빛이 없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아 무섭다. 사다리를 들고 전정가위를 찰칵 거리는 부분을 비롯해 선글라스를 낀 모습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아 입에 있는 미소가 두드러지는데, 광기가 묻어난다.
 

찰리의 웃는 얼굴이 인형 같은 까닭은, 정신병원에 있으며 ‘치료’ 당하는 대신, 연기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인형 같은 미소를 지으며 형을 맞고(“Welcome to my home, away from home”.), 담당자가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하려 하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가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 다시 인형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는다.


<스토커>(2012)


찰리의 ‘연기하지 않는’ 얼굴은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를 띤다. 언티 진을 죽이기 직전 그의 입은,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는 대신, 걱정하는 건지 화를 참는 건지 확실치 않은 경계에서 살짝 일그러진다. 그 표정은 형의 차에서 ‘왜 형네 집으로 안가?’ 라고 물을 때 더 깊이 나타난다. 울먹이듯 일그러진다. 완전한 어른의 얼굴이 아이처럼 울상이 되어 이상하게 느껴진다.


<스토커>(2012)


찰리의 얼굴이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죽일 때다. 윕을 죽일 때, 눈을 내리깔고 입을 일그러뜨린 채 희생양에 집중한다. 무섭도록 생기가 넘친다. 이블린의 목을 조를 때는 좀 더 입체적이다. 매튜 구드는 짧은 순간에 찡그림과 미소를 오가는 표정을 지으며 찰리의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를 표현한다.
 

<스토커>(2012)



그리고 이 요소들은 강박적으로 섬세한 연출을 만나 배의 효과를 낸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든다. 먼저 보안관이 인디아의 집에 찾아와 윕에 대해 묻는 부분이다. 찰리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며 부릅뜬 눈으로 듣고 있다가, 대답과 함께 다가간다. 카메라는 거울에 비친 인디아와 보안관, 찰리의 얼굴을 한 화면에 담고 있다가, 찰리의 걸음을 따라간다. 처음에는 초점을 두지 않아 뿌옇던 얼굴에, 움직임과 함께 초점이 들어오며 시원한 미소가 덧씌워진다. 관객은 그 미소가 자연스러움이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겉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느끼게 된다.
 

떠날 것을 요구하는 인디아에게 눈을 고정 시키고 계단을 오르며 형을 죽인 과정을 묘사하는 찰리도 살펴본다. 카메라는 인디아의 시선에서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잡는다. 살짝 위에서 얼굴에 근접하게 카메라를 배치하면, 형태가 좀 달리 보이는데, 하관 면적은 좁게, 눈은 크게 느껴진다. 그 상태로 눈을 노려보듯 똑바로 뜨고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씹어 뱉듯 말하며 천천히 올라오다가, 대화의 흐름이 바뀌자 아주 미세하게 점점 얼굴 근육을 확장시킨다. 눈은 빛나고 눈썹은 올라가며 눈가와 입가에 웃음기가 묻어난다. 마지막 순간 ‘널 위해서, 인디아’, 라고 할 때의 목소리는 광기적 흥분으로 약간 떨린다. 실제로 형을 살해하는 장면과, 어린 시절 조나단을 흙에 파묻은 ‘사건’이 절묘하게 교차 편집 되어 긴장감을 극대화 시킨다.


<스토커>(2012)


그유명한피아노장면은 또 어떤가. 성적 흥분과 긴장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인디아의 것과 대비되는 여유롭고 여유로운 엷은 미소는, 관객의 긴장을 더한다. 그러다 인디아의 몸과 자신의 몸을 교차 시키며 얼굴을 굳히고 눈을 크고 멍하게 유지시킨다. 말 그대로 ‘무’라고 묘사할 수 있을 그 표정이, 그의 본래 얼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커>(2012)



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조력자도 아니며, ‘악당’이라고 단정 짓기에도 뭐하다. 인디아에게 호의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 끝이 건조하다. 차를 끌고 스쿨버스를 따라와도 그저 미소를 띄운 채 운전하고, 비가 올 것이라며 우산을 들고 따라 나와도 건네지 않고 손 안에서 움직이기만 한다. 마치 이건 내 제안일 뿐이고 선택은 너의 몫이라는 듯, 그러나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듯. 건조하고 집요한 집착이다.


<스토커>(2012)


총을 든 인디아를 본 찰리의 마지막 표정이 이상하게 읽히지 않았다. 엄마를 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쏠 거라고 생각했는지 개인적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그냥 내가 일부러 ‘알 수 없음’으로 남겨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굳이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디아 속의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사라지면 된다. 찰리는 인디아의 손에 죽고, 그것으로 끝이다.


<스토커>(2012)



찰리 스토커는 알 수 없으면서도 분명하다. ‘알 수 없음’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키를 쥐고 있다가, 서서히 ‘분명하게’ 껍질을 벗다 마지막에 극적으로 무언가를 드러낸다. <왓치맨>(2009)의 애드리언 바이트, 오지맨디아스도 그렇다.

 
매튜 구드가 맡은 캐릭터 대부분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찰리와 더불어 ‘특이함’의 정점을 찍은 캐릭터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찰리는 악당, 애드리언은 어쨌든 수퍼히어로지만, 어쩐지 아주 다른 느낌은 아니다. 둘 다 ‘보통 사람들’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을 ‘우월하다’고 여기며, 어떤 목적을 위해 철저히 전략을 세워 사람들 앞에서 태도를 연기한다. 하지만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광기와 감정을 동기로 움직이는 찰리와는 달리, 애드리언의 동기는 논리, 이성에 근거한다.
 

<왓치맨>(2009)


왓치맨 활동을 하며 오지맨디아스 수트 차림으로 코미디언과 대립하는 애드리언은, 가면 때문에 얼굴 전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관과 눈만 보여 그 부분에 시선이 간다. 말투는 딱딱하고 진지하며, 말하는 방식은 분명하고 직접적이다. 흐트러진 자세로 웃고 담배를 피워대며 상대를 비웃는 코미디언과 비교된다. 입을 최소한으로 벌리며 이야기하는데, 매튜 구드가 평상시 입을 아주 크게 벌리며 연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일부러 입가를 경직 시켰다는 것이 느껴진다. 코미디언이 조롱하며 나가자 허공을 응시하는데, 가면에 눈 주위가 가려져 노려보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섬뜩하다. 그리고 그 눈은, 코미디언의 장례식에서 우산 아래 보이는 그늘진 얼굴과 연결된다.

애드리언은 대개, 곧은 자세로 얼굴도 몸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뻣뻣하다기보다는, 굳은 채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해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따뜻하고 밝은 톰이나 휴,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찰리의 것과는 사뭇 다른 온도다. 


<왓치맨>(2009)



애드리언 바이트는 캐릭터에 관한 개별적인 글에서 더 설명할 예정이니, 이제 찰리와는 아주 다른 까닭으로 불타는 남자, <버닝 맨>(2011)의 버닝 맨, 톰을 마지막으로 설명해본다.
 

<버닝 맨>(2011)


톰은 설명한 다른 캐릭터들과 사뭇 다르다. 언급한 캐릭터 중 유일하게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이다. 매튜 구드의 미모는 여전하지만, ‘잘생겼다’는 생각이 관객의 마음에 들어서기 전에 연기로 밀어낸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 얼굴, 몸에 감정을 드러낸다. 톰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중심은 ‘태도’나 ‘폼’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톰은 괴팍하고 다혈질인 셰프다. 매튜 구드는 캐릭터가 일상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성격을 드러낸다. 바쁜 것을 감안해도 사나운, 툭툭 뱉는 듯한 말투 속에 욕을 아무렇지 않게 섞는다. 손님이 요리를 더 익혀달라고 하자 닭을 여기저기에 던지고 바닥에 굴려 새로 만들어주는데, 얼굴에는 별 감정이 없지만 손끝은 신경질적이다.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 이상이다. 찰리 스토커처럼 위험할 정도는 아니나 평범한 선에서 만만치 않은 성질이 느껴진다.


<버닝 맨>(2011)


그의 성격이 본래 온화하지는 않지만, 이런 신경질적인 행동들이 일상적인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가라앉는 대신 제목처럼 ‘타오른다’. 그 불길은 붉기보다는 까맣고 하얗다. 정신 없이 뒤죽박죽인 연출은 캐릭터의 상태를 대변한다. 지나간 장면이 한참 뒤에 이어지기도 하고, 과거와 과거,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섞어 보여 주기도 한다. 속이 타는 듯한 상태를 실제로 불이 붙는 연출로 표현한다. 그 불을 보는 톰의 표정은 묘하다. 놀라기보다는 홀린 듯 본다. 그 마음 속 새카만 불길을 향해 톰은 꺼져 가는 것이다.


톰은 화낸다. 수산물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동시에 정신없이 통화하다 욕을 뱉는다. 아들의 생일날, 공원에서 넘어진 자신과 케이크를 보고 웃는 사람들의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른다. 몸을 가누지 못하며 팔을 휘젓고 발을 내지른다. 톰은 웃는다. 아들의 생일 파티를 망치고 경찰서에서 나와 캐런에게 혼나며, 전복된 차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의식을 잃어 가는 동안 웃는다. 사소한 것에도 습관적으로 화를 내지만, 오히려 긴급한 상황에서는 태연하다. 그의 화는 자기파괴다. 찰리가 차분하고 젠틀한 모습을 가면으로 활용해 광기를 숨기고 있다면, 톰은 광기를 가면으로 슬픔을 감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아내의 죽음을 전하자 친구는 울먹이지만 톰은 담담하다, 아니 여전히 멍하다. 슬쩍 보고 친구의 말에 농담으로 답한다. 괜찮은 것 이라기보단, 피하는 것 같다.



<버닝 맨>(2011)


매튜 구드는 아내를 잃은 후의 톰을 표현할 때 얼굴 한 구석을 멍하게 둔다. 농담을 하며 웃을 때도, 불같이 화를 낼 때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감정 속 어딘가 빈 공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얼굴들이, 홀로 있을 때의 창백하고 피곤한,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것 같은, 가끔은 정말 죽어 가는 것 같은 얼굴과 연결된다. 아내의 죽음 직후 통화하는 장면의 멍한 얼굴은, 무너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사람의 것이다.
 

<버닝 맨>(2011)


아내 사라와 장난스럽게 연애하듯 생활하는 과거 톰의 모습은 <매치 포인트>의 또 다른 톰을 떠오르게 하지만, 좀 더 신사적이지 않은, 괴팍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이 묻어난다. 톰의 매력이 드러날수록, 사라와의 케미가 폭발할수록 관객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울렁거린다. 사라에게 보여 주는 사랑 가득한 미소와, 현재의 허탈하고 멍한 미소의,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는, 매튜 구드의 섬세한 연기로 구별된다.


폼과 태도를 묘사하느라 매튜 구드가 매우 섬세한 표현법을 지닌 ‘배우’라는 것을 잊고 있었음을, <버닝 맨>을 다시 보며 깨달았다. 매튜 구드라는 배우에 대한 내 관심을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해 준, 분위기보다는 연기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마무리로 넣었다. 부러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하지는 않았다, 글을 읽고 그의 ‘연기’가 궁금해졌다면, 직접 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버닝 맨>(2011)


단순히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잘생김/못생김’을 떠나, ‘생김새’는 배우에게 있어 중요한 요소다. 허나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핵심임을, 매튜 구드는 연기로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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