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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23. 2019

아카호시의 카메라

아야노 고 (1)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2016)
<백설공주 살인사건>(2014)
<타락경찰 모로보시>(2016)

* 위 작품들과 <버니드롭>의 구체적인 내용과 전개 혹은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Feat. <버니드롭>(2011), <최고의 이혼>(2013, Fuji TV)
언급. <마더>(2010, NTV), <새 구두를 사야해>(2012), <피스 오브 케이크>(2015)



<버니드롭>(2011)의 한 장면, 유치원을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간 두 아이 앞에 자전거를 탄 낯선 남자가 나타난다. 날카로운 무표정은, 혹시 납치범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후에 다이키치 동생의 애인으로 밝혀진다. 순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애인 옆에 딱 달라붙어 사랑스럽게 장난을 건다. 극의 분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슥 사라지는, 이 배우는 전작인 드라마 <마더>(2010, NTV)에서는 반대로, 아이를 학대하는 인간으로 등장했다. 아이를 연기한 배우도 똑같이 아사다 마나라는 점도 재미있다. 스타일을 확 바꾸지 않고도 두 가지 얼굴이 모두 가능한, 그의 이름은 아야노 고다.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이중적인 분위기를 지닌, 마음먹기에 따라 튈 수도, 녹아들 수도 있는 배우.


<최고의 이혼>(2013, Fuji TV)


다른 배우들에 비해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지만, 한 번 띄면 자꾸 눈이 간다. 옆으로 긴 눈, 올라간 눈썹, 얇은 입술과 뾰족한 턱, 마른 체형, 무표정을 하면 왠지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날카롭고 비밀스럽다. 하지만 여기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모으거나, 아주 살짝만 웃으면, 굉장히 순하고 부드럽게 변한다. 아야노 고의 두 종류의, 혹은 섞인 표정은, 미스터리 하거나 선악 구분이 모호한 캐릭터를 표현하기에도 적합하다.


또다시 주인공의 동생 애인으로 등장한 <새 구두를 사야 해>(2012)나, 수염을 기르고 호일펌을 한 모습으로 나온 <피스 오브 케이크>(2015)에서는, 세련되고 로맨틱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카사노바 같기도 한 이미지를 뿜어내기도 했다. 그 다정함과 바람기가 극대화되고 더 자연스럽게 표현된 작품이 드라마 <최고의 이혼>(2013, Fuji TV) 이다. ‘예술가’적인 매력을 뿜어내다가, 갑자기 바람 피는 모습을 보여 주니 관객은 헷갈린다. (나는 처음 볼 때 저 인간 기억상실증 인가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하며 혼란스러웠었다.) 우에하라 료는, 네 주인공 중 가장 거리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다가, 또 금방 아무렇지 않게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사차원적인 면모도 상당하고, 때로는 셋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야노 고의 로맨틱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분위기, 다정했다가 금방 굳어버리는 얼굴은 료의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그를 단순히 나쁜 놈, 어떤 유형의 인물로 단정 지을 수 없었던 것은, 아야노 고의 깊은데 깊지 않은 척 하는 표정들 때문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아야노 고의 캐릭터를 스크린으로 한정해 묘사했다. 우에하라 료가 자꾸 눈에 밟히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드라마 출연작에 대한 글은 다음으로 미뤘다. 그래도 여전히 길어서, 두 파트로 나누어 올린다. 주제를 드러내는 연기가 돋보이는 경우[아무로, 아카호시,  모로보시]와, 캐릭터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경우[타츠오, 카토, 나오토]다. 단순히 내용을 자르기 위한 개인적인 분류이며, 정확한 구분은 아니다.


<최고의 이혼>(2013, Fuji TV)



아야노 고를 처음 본 건 <버니드롭>에서 였지만, 그가 내 뇌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와이 슌지의 <립반윙클의 신부>(2016)에서였다. 아무로는 일종의 해결사다. 돈을 받고 의뢰인의 과거를 꾸며주기도, 반대로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거나 서로를 연결 시키기도 한다. 여러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모든 비밀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가 누군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의뢰인들이, 진심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면서도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아무로는 적당한 호의를 제공하며 그 대가로 삶을 가져간다.


아무로는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살가운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직업상 다양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대해야 하는 그의 몸에는, 일정한 태도가 배어 있다. 눈을 맞추고, 믿음이 가도록 깔끔하게 웃고, 몸을 자주 굽실거려도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 영업에 익숙한 사람의 것이다. 오래된 친구처럼 고민을 듣고 위로하다가도, 비즈니스와 연결되면 친절한 그대로 확실하고 날카로워진다. 사실 애초에 그의 친절은 비즈니스를 위한 것이니,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가면을 살짝 벗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립반윙클의 신부>(2016)


사건에 말려들어 오갈 데 없어진 나나미가 의지하는 유일한 인간은 아무로다. 아무로는 함께 식사 하며, 이별청부업자라느니, 시어머니까지 연관됐다니 하는 얘기를 조심스러우면서도 직설적으로 들려준다. 나나미는 울며 젠장…. 이라고 어설프게 중얼거린다. 잠깐 눈을 굴리며 난처한 건지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뭔가 있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닌 애매한 표정을 하던 아무로는, 담백하게 ‘젠장’ 이라고 함께 말해 준다. ‘빌어먹을’ ‘바보’ 같은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무표정으로 덧붙인다. 나나미는 그 욕을 따라 말하며 운다. 아무로는 본인이 귀찮아지거나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 별거 없어 보이지만 사실 예민한 조절이 필요한 선에서 위로를 건넨다. 비즈니스의 일종이다. 진심도 물론 있었을지 모르나, 그 정도는 중요하지 않다. 나나미는 위로를 받고, 아무로의 시나리오에 따라 한 걸음 내딛는다. 호텔 일을 그만두는 순간, 아무로는 망설이는 나나미 대신 갑자기 연인인 척 하며 과장된 연기로 사람들의 혼을 빼 놓는다. 또다시 나나미가 물러설 곳이 없어지도록, 그러면서도 자신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이 모든 태도는 적절히 건조해, 상대는 거리감을 인지하고 감정의 여지를 두지 못한다.


대놓고 연기하는 장면 외에도, 아무로의 모든 말투, 몸짓, 시선은 계산된 것이다. 나나미에게 초콜릿을 주며 다가가는 대신 서서 손만 내민다. 그것을 받으러 가까이 와야만 하도록.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의지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작전이다. 아야노 고는 본래의 기본적인 친절함에서, 진심을 빼고 건조한 의뭉스러움을 넣어 아무로를 표현한다. 겉은 똑같이 친절해도, 속은 다르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도록, 이면의 차가움이나 어두움이 드러날 때 관객이 납득할 수 있도록. 의뢰인이 없는 장소에서 그는 차갑고 굳은 표정을 자주 보인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상대를 긴장하게 만들 때는, 한 인간이라는 느낌은 희미해지고, 작품을 관통해 인물들을 내려다보며 통제하는 규정하기 힘든 존재로 느껴진다. 자신의 서사를 가진 ‘인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상징이나 통로 같다.


아무로는 쉽게, 호의를 사서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면서도, 그들 사이에 섞여 투명인간이 된다. 뭐든 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존재. 아야노 고도 그렇다는 말이다. 최대한 힘을 빼고 깔끔하게 연기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인격이 없는 것 같다가도, 사람들을 대하는 순간순간에는 인간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답답하고 순수하고 속이 다 보이는 나나미를 꾸밈없이 연기하는 쿠로키 하루와 대비되는 동시에 조화를 이루며, 보이지 않는 기둥 역할을 한다.


<립반윙클의 신부>(2016)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한껏 기대어 앉아 핸드폰을 본다. 풀어헤친 반팔 셔츠 속으로 드러난 헐렁한 민소매는 행동에 따라 바빠서 옷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성실한 방송인의 것이 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소위 ‘한량스러운’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에 쓰인다. <백설공주 살인사건>(2014)의 아카호시는, 근무시간에 트위터를 쉬지 않고 하는 SNS 중독자 PD다. 능력은 없고, 노력은 하지 않고, 크게 한 건 물어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 사건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트윗을 날리는 그에게, 방송 윤리나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구부정한 자세로 민첩하게 움직이며 긴 눈을 날카롭게 굴리는 것은, 진실이 아닌 특종을 찾기 위해서다.


<백설공주 살인사건>(2014)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가 아니다. 실제로 시로노가 노리코를 죽였다고 해도, 그것을 추측한 과정이 폭력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백설공주 살인사건>은 인터넷 뒤에 숨은 익명의 인간들이 모여 만드는 거대한 폭력 구조를 드러낸다. 관객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작품 속 사람들처럼 끌려들었다가, 서서히, 혹은 진실이 드러난 후에야 비로소,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하게 된다. 아카호시는 카메라다. 먼저, 작품의 카메라 역할을 한다. 이것저것 담고 모으고 구성하며 관객과 이야기를 연결한다. 그리고 작품 속 세계에서도 카메라다. 구조를 구성하는 개개인을 담는 관찰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 하는 사회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카메라-아카호시가 담은 근거 없는 추측, 정황증거도 못 되는 상상들은 거대한 가시가 되어 무고한 사람을 매장했다. 결국 카메라일 뿐,이었던 아카호시는 인간으로 드러나 세상에 던져지고, 자신이 가담했던 폭력을 되겪는다. 카메라는, 무엇을 찍고 어떻게 편집해 내보내는가에 따라, 사물을 더 잘 보이게 하는 안경이 되기도, 빛을 가리는 색안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다.


아카호시는 영화가 거의 끝나 갈 때에야 화면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진실이 드러남과 함께 그의 삶에서 무언가가 끝나는 시점이다. 시로노의 부모에게 사과하러 갔다 밭에 내동댕이쳐지고,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멍하니 걸어가다 차에 치일 뻔 하는 일련의 몸동작은, 약간 슬랩스틱 코미디 같기도 하며, 상황과 맞물려 그를 바닥까지 끌어내린다. 용서를 비는 목소리는 죄책감보다는 스스로가 처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린다. 놀라 도로에 주저앉은 아카호시는, 차에서 내린 시로노에게 자기도 모르게 하소연한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몸은 구겨져 있고 목소리는 겨우 쥐어짜내는 듯하다. 걷거나 말하는 법을 갑자기 잊은 사람 같다. 문득 정신이 든 듯 사과하며 일어나 걸어가지만, 잔뜩 움츠러들고 비뚤어진 상체는 인물의 상태와 심리를 표현한다. 본인이 나서 사냥한 ‘마녀’도 알아보지 못하는, 땀으로 얼룩진 그늘지고 멍한 아카호시의 얼굴은, 밝고 선하게 웃는 시로노의 얼굴과 대비되어 최고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백설공주 살인사건>(2014)


캐릭터보다는 주제가 돋보이도록 짠 이야기다. 매력적인 주인공에게 시선이 집중되면 전하는 메시지가 흐려진다. 아카호시는 캐릭터로서 매력적인 빌런이 아닌, 평범하고 멍청한 인간에 불과하다. 아야노 고는 감정과 심리를 다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과장하거나 질질 끌지 않는 현실적이고 담백한 연기로, 작품의 관찰자적 주인공 역할을 적절히 해낸다. 기꺼이 추하고 보잘것 없어지고, 연기로 보상 받을 욕심도 내지 않는, 배우 대신 작품을 주목하게 하는 연기, 감독의 의도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역할을 확실히 아는 배우의 연기다.



<타락경찰 모로보시>(2016)


아카호시에 이어, 여기 아야노 고의 또 다른 구조적 악인이 있다. 이번에는 화면의 정 가운데에서 존재를 요란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타락경찰 모로보시>(2016)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모로보시라는 한 인간이 어떻게 변하고 결국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모로보시는 주인공이자 메인 사건, 주제다. 인물 본래의 특징과 함께 시간과 상황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드러내야 한다. 애초에 ‘나쁜 놈’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공감을 불러 일으킬 필요는 없지만, 그 말은 배우가 공감할 부분이 적어 연기의 중심을 잡기 어려울 수 있는 배역이라는 말도 된다. 그냥 대강 과하게 꾸며내 연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야노 고는 작품을 뛰어넘는 연기를 정말 눈물나게 잘 해줬다.  


부드러운 편인 본인의 원래 목소리를 한 단계 내리깔고 걸걸하게 낸다. 말투는 투박하고 강하다. 약간이지만 살도 붙인 것 같다.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연기와 스타일, 얼굴을 쓰는 방식을 바꾸어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경우다. 매력은 조금 덜하지만, 아카호시 때와 마찬가지로, 기꺼이 망가지고 추해 짐으로써 줄거리와 주제가 관객에게 확실히 전달되는 데에 기여한다.


유도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모로보시는, 경찰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얼떨결에 유도 우승을 노리는 도쿄 경찰에 취직하게 된다. 힘만 세고 어리버리한 초반의 그는 대개 입을 벌리고 상관들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린다. 얼굴 근육을 잔뜩 긴장시킨 채 인상을 쓴다. 온몸에는 부자연스러운 힘이 들어가 있다. 계속 대답은 하지만 알아듣는 것 같진 않고, 열심히 따라다니는 데에 급급하다.


<타락경찰 모로보시>(2016)


무라이 형사의 ‘나쁜 조언’을 들은 이후의 모로보시는, 곧바로 달라져 행동에 나선다. 목적 없이 적응하기 바쁘던 이전과 달리 생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모든 게 서투르고 급하다. 야쿠자의 제보를 받고 무작정 쳐들어가 난리 치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마약과 총을 찾아내지만, 과정도 목적도 영 아니다. 모로보시는 불필요하게 강하고 어수선한 동작들로 용의자를 묶고 패고 서랍이며 찬장을 뒤지고 소리를 질러댄다. 마침내 물건을 찾아낸 그의 미소는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 유키와 섹스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어설프고 급하기만 하다. 로맨틱, 심지어는 에로틱한 느낌마저 없다. 이 시점의 모로보시는 지나친 행동파다. 머리보다 몸이 앞선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획을 짜거나 한 발 물러설 줄을 모른다. 관객은 불편한 긴장 속에서 숨죽이고 이 급한 장면들을 견디게 된다. 정신을 빼놓는 연출과 아야노 고의 무지막지한 연기 때문이다.  


경험이 생기고 조직과도 연결된 직후, 폼 잡고 뒷골목을 걸어가는 모로보시에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어색하다. 인상 쓴 이마와 구겨진 입가의 웃음에 허세가 묻어난다. 멈춰 서서 담배를 한 번 깊게 빨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팔자 눈썹을 만들어 마치 울상을 짓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주위를 둘러본다. 이게 다 내 꺼다, 라는 듯.


시간이 지나자 모로보시에겐 정말로 여유가 생겼다. 외모부터 다르다.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고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다니던 어린 형사는, 선글라스에 화려한 셔츠를 입고 한쪽 어깨에 점퍼를 대충 휙 걸친 야쿠자 아저씨가 됐다. 걸음걸이에는 힘이 빠지고 귀찮은 듯한 리듬이 생겼고, 말투에는 허세가 빠지고 능숙한 무게가 생겼다. 정황 설정과 증거물 조작을 여러 번 해본 솜씨로, 우두머리의 카리스마로 야쿠자 무리를 다룬다. 결코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안정적인 모습이다. 인상을 잔뜩 쓰고 얼굴 한쪽을 일그러뜨리는 웃음은 더 얼굴에 붙어, 모로보시의 특기가 됐다.


모로보시는 이전에 무라이가 자신을 데려갔던 술집에 타로를 데려간다. 똑같다. 술은 먹지 않고, 조금 덜 징그럽게 굴지만, 아랫사람을 불러 호의를 베풀며 실없는 농담을 하고, 일 때문에 웃어 주는 여성들을 둘러보며 자신의 위치를 느낀다. 아예 사람이 달라진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분명함 없이 마냥 쫓아다니기만 했던 그때에도, 눈빛 어딘 가에 숨어있는 욕망이 있었다.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 사무소> 시리즈에서 켄의 변화가 떠오른다.)


<타락경찰 모로보시>(2016)



아야노 고가 이 작품에서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연기를 한다고 했는데, 한 단계 더 나아간 장면도 볼 수 있다. 총기 특별 부서가 설립되자, 상관은 실적 좋은 모로보시에게 총기를 구해달라고 압박한다. 그는 연줄로 총기를 구해 지하철 물품 보관함에 넣고 공중전화로 서에 연락한다.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낀 채 ‘조직을 그만두려는 야쿠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목소리는 가늘고 말투는 가볍게 공손하다. 얼핏 들으면 다른 사람의 평소 목소리 같지만, 위화감이 든다. 보다 부드러운 말씨를 쓰는, 아야노 고의 다른 캐릭터들이 떠오를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아야노 고가 모로보시인 채로 목소리를 가늘게 바꾸는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연기에 연기를 더해 본래 자신의 톤에 가깝지만 사실은 아주 다른 성격의 소리를 낸 것이다. 모로보시가 거짓말을 많이 하는 인간이기는 하나, 어쨌든 전문 배우는 아니기에 발생하는 어색함을, 전문 배우 아야노 고는 표현해낸 것이다. 그 섬세함에 감탄했다.


타로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며 모로보시는 눈물을 글썽이며 폼을 잡는다. 다시 한 번, 가관이다. ‘내가 치안유지에 역할을 하고 있다면 가장 큰 역할은 타로 네가 했다’는 말의 진상은, ‘모로보시의 실적 조작에 타로가 한몫 했다’는 것이다. 포인트는, 모로보시는 진심이라는 것. 자신이 대단히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진짜로 북받쳐 한다. 마지막 부분 경찰에 붙잡힌 모로보시가 변호사와 대면하며 늘어놓는 말과도 연결된다.


<타락경찰 모로보시>(2016)


모로보시가 저지른 부정은, 점점 스스로에게 돌아 온다. 오랜만에 유키에게 찾아갔다가 자신이 유통한 마약에 유키가 중독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유키를 때리다가 키스하다가 울다가 때리다가 키스하다가 울다가 옷을 벗고 하다가 바보야,라며 울부짖는다. (물론 폭력이지만) 정신 차리라는 뉘앙스로 뺨을 때리고는 어깨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하는 손끝에서 좌절과 슬픔이 묻어난다. 모로보시가 정말 나쁜놈이라는 생각이 들며 보기 힘든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만 보여 주기로 택한 연출은, 자극을 덜어내고 상황과 감정을 부각시킨다. 두 배우는 몸짓과 목소리 만으로 복잡하게 미쳐버린 상태를 표현해낸다.


이 다음부터는 거의 무너져 내리는 모로보시를 표현하는 모습들이다. 글이 끝없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까지만 쓰려고 했으나, 역시 마약을 처음 한 순간의 연기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 집중으로 신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연기의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가능한 것 아닐까. 이 작품을 통해 ‘노력파 연기천재’ 아야노 고는, 또 한 단계 나아갔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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