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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19. 2019

낯익은, 낯선.

코디 펀(Cody Fern)

19. 10. 20. 수정.


-드라마:
<베르사체(The Assassination of Gianni Versace: American Crime Story)>(FX)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시즌6 (Netflix)

-영화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감독: Nicholas Verso)

* 위 세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적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2 <베르사체>. 원래 제목은, ‘The Assassination of Gianni Versace 지아니 베르사체 암살’이다. 건조한 제목과는 달리, 살인 사건 자체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피해자와 살인자를 나눠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에 연관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전형적 수사물의 긴장을 덜어낸 대신,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존중을 담는다. 그 중 하나가 데이비드 매드슨, 앤드루 쿠내넌이 두 번째로 죽인 남자다.


<베르사체>(FX) 인물 포스터.


데이비드 매드슨은 통화를 하며 등장한다. 단정한 금발과 푸른 눈, 깔끔한 눈썹과 얼굴선, 정갈한 말투와 부드러운 목소리. 전형적인 ‘금발 미남’이라 오히려 약한 인상이다. 그는 프로젝트를 허가 받고 기뻐한다. 약간 상기되어 인상을 쓰고 있는 이마와 쭉 올라간 입은 온통 신남 투성이지만, 앤드루를 보는 눈만은 복잡하다. 다정하게 한 말이 예상과 다르게 튕겨나가자, 눈에 그늘이 생기며 약간의 공포 비슷한 것이 어린다. 전형적이어서 관심이 가지 않던 얼굴은, 순식간에 오락가락하는 복잡한 감정을 노련하게 입는 순간 흥미롭게 변한다. 그 얼굴의 주인은 코디 펀, 능숙한 미국식 영어발음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으나, 알고 보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배우다.


<베르사체>(FX)


먼저 언급할 것은 목소리다. 코디 펀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을 때 귀를 사로잡지는 않지만, 들을수록 빠져드는 종류다. 평소엔 가라앉아 있는 편인데, 느끼하지 않다. 담백하고 차분하다. 높음과 낮음이 모두 존재하며 허스키함이 살짝 있다. 튀지는 않으나 듣고 있으면 편안하게 집중되고, 표현의 가능성이 많다. 뭐, 이미 빠져든 내 입장에선, 마법의 목소리랄까.


<베르사체>(FX)


살인을 목격한 데이비드가 발작적으로 소파에 기어오를 때 까지만 해도, 충격적인 상황 자체와 대런 크리스 표 앤드루 쿠내넌의 싸이코스러움에 압도되어 마음을 졸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 마음은 데이비드에게 동화되어 있었다. 이입할 만한 인물이 달리 없어서는 아니었다.  여기 그 특별한 연기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제프 살인 장면과, 데이비드가 목격하는 장면은 다른 날에 찍기로 돼 있었어. 근데 살인 장면 다 끝나고, 댄(감독)이 나한테 와서, ‘이제 카메라를 돌려서 널 찍을 거야’ 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뭐, 뭐라는 거야, 나 감정적으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데’ 라면서 엄청 불안해하니까, 댄이, ‘그게 바로 이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상황에 반응하면 돼’ 라고 하더라고. 그런 걸 처음 볼 땐, 아마 진짜라는 생각도 안 들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그래서 댄이 ‘한 번 찍어보자, 만약 잘 안되면 내일 다시 하면 되지’ 라고 해서 찍었는데, 원테이크에 됐어. 그 상황이 방에 있던 모든 사람한테 진짜처럼 느껴졌거든. 개마저도 엄청 겁에 질렸어. 모두 패닉한 상태여서, 그 감정들을 끌어 모아 내게로 가져와 표현했어.”
Los Angeles Times 인터뷰.

감독의 재치, 배우의 예민한 순발력, 그리고 그들의 서로에 대한 믿음이 낳은 명장면이다. 코디 펀은 이 감각을 놓지 않고 잘 끌고 나가, 데이비드의 상태를 탁월하게 표현한다. 데이비드는 소리를 지르거나 벌벌 떨지 않는다. 앤드루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움직인다. 뺨과 벌어진 입은 미세하게 떨린다. 눈은 약간 멍한데, 힘이 들어가 있다. 눈치를 보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어깨는 움츠리고 팔은 뻗은 채로 굳어 있다. 충격을 받아 뇌의 일부가 멈춘 것 같다. 샤워가 끝나자 갑자기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겨우 짜내는 목소리로 묻는다. “Are you gonna kill me?” 이제야, 본 것과 처한 상황을 깨달은 듯, 공포와 슬픔과 고통이 한번에 밀려오는 듯한 반응이다. 결국 그가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하는 말은, ‘살려줘’가 아니다. 상체를 떨고 구겨진 채 굳은 얼굴로 울먹거리면서도, 강하게 말한다. ‘경찰에 신고해. 지금 당장.’ 그리고 말하는 데 힘을 다 써버린 듯, 바닥으로 무너진다.


경찰에 전화하려다 앤드루에게 총으로 협박당하고, 나가기도 포기한 후부터 계속, 데이비드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하다. 앤드루가 눈앞에 있든 없든, 자고 있든 깨어 있든, 굳은 몸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그 전까지는 눈물이 흐르고 목이 가도록 강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면, 이제는 공포에 떨면서도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생각한다.


<베르사체>(FX)


애초에 사람 마음이나 감정이 항상 정확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지인이 지인을 때려죽인 것을 목격했다면, 무척 혼란스럽고 복잡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단순할 수도 있다.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당연히, 우선일 테니까. 허나 데이비드는 그 와중에도 선함과 용기를 잃지 않는다. 앤드루가 사람들을 더 해치지 않게 하고, 결국 옳은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묻어난다. 겨우 목소리를 짜내 이웃과 말하고 난 후에도, 강한 동작과 눈빛으로 앤드루를 똑바로 보며 말한다. “누구 또 해칠거야? 나랑 약속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무서워서 어깨도 못 펴고 있으면서도 이웃을 걱정하는 사람. 차분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뱉는 그 몇 마디는 데이비드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기에, 내가 그에게 마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극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는, 누굴 탓하는 대신 해결책을 찾고, 싸우기보다는 설득하려 하는, 데이비드를 완성한 것은, 코디 펀의 흔들리면서도 확실한 눈이었다.


당시 데이비드의 감정과 행동에 근거가 되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는데, 코디 펀의 인터뷰가 핵심을 드러내고 있어 그대로 옮겨왔다.

“데이비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는 데 도움을 줬던 질문은, ‘왜 데이비드가 도망치지 않았는가’ 였어. 왜 앤드루와 싸우거나 압도하려 하지 않았는지 말이야. 4화는 이 질문에 대해 진짜로 파고들고 고민해서 텐션을 불러오지, 난 그 텐션을 스스로에게 가져왔어. 왜 내가 도망가지 않을까, 탈출하지 않을까. 작가와 연출, 린다 카세비안의 테스티모니가 많은 도움을 줬어. 데이비드가 느끼고 있던 특정한 종류의 수치심 specific type of shame 이 뭔지, ‘게이 쉐임 Gay Shame’이 무슨 의민지, 그게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그게 개인의 선택에 있어 어떻게 역할을 하고 구현되는지 생각해야해. 왜냐면 수치심은 개인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게 아니라, 사회로부터 오는 거거든, 그치? 밖으로부터 와서 내면화되어 특정 행동을 유발시켜. 그것에 기반해서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데이비드에 대해 연구했어.”
Los Angeles Times 인터뷰.

왜 데이비드는, 도망가지 않을까. 나도 작품을 보며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렸던 질문이었다. 그가 차 창밖을 보며, 앤드루에게 라기 보단 독백처럼, ‘내 정체성이 밝혀지는 순간을 계속 떠올리며 살았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느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놓고, 문을 나서려다 마는 모든 순간, 코디 펀이 그 까닭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사체>(FX) imdb 이미지.


여정이 끝나갈 때쯤이 되면, 데이비드는 냉정해진다. 공포 대신 분노를 드러낸다. 추억 이야기로 웃으며 이야기를 이끌어내,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앤드루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긴장감과 집중도가 맥시멈인 장면이었다. 대사는 이미 쓰인 것이었겠으나, 대화의 흐름을 이끌어가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코디 펀의 연기가 핵심이었다. 앤드루가 총을 겨누자 무서워 벌벌 떨며 까지는 목소리로 울며 애원하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상대와 자신이 진정되자, 다시 설득한다. 역시 분명하고, 올곧다.


<베르사체>(FX) imdb 이미지.


결국 데이비드는 도망가고, 앤드루는 총을 쏜다. 빈집에 뛰어 들어가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 아버지가 있다. 당황한 데이비드는 상기된 얼굴로 입을 벌리고 몸을 겨우 가누며 다가간다. 간신히 진정됐던 숨은 다시 차오른다. 아버지가 건넨 차를 마시는 얼굴엔 비로소, 그늘진 미소가 어린다. 자신이 죽었음을 깨달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자의 것이다. 눈물은 그때부터 흐르기 시작해, 그의 아름다운 눈에 생긴 구멍이 화면에 잡히는 순간 쏟아졌다.


<베르사체>(FX)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다, 시간을 역행하는 방법의 흐름을 택했기 때문에, 데이비드가 결국 죽으리란 것을 시청자는 알고 있다. 죽음 전후 나오는 과거 데이비드의 에피소드들은, 앤드루의 심리 변화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사건 당시 보여준 데이비드의 캐릭터를 다시금 증명하며, 매력을 더하고, 시청자를 더 안타깝게 만든다. 그는 아마도, 등장인물 중 가장 순수하고 바른 사람이다. 본인이 너무 선한 사람이라서 인간의 선함을 믿는 사람 같다. 악마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천사, 진실로 누군가를 위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흔들리지 않고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하고 복잡한 감정이 그 선함에 대한 믿음을 주고, 능숙하지 않은 표정들 -이를 테면 아버지에게 커밍아웃 할 때 온통 떨리는 얼굴 같은 것- 이 데이비드를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 표현은 코디 펀의 것이다.


<베르사체>(FX)


앤드루의 성대한 생일 파티에 도착해 긴장한 데이비드는, 부유하고 우아한 집주인을 완벽하게 연기하는 앤드루와 대조된다. 허그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정도로만 주눅 든 얼굴과 가라앉은 목소리로, 축하를 건넨다. 집과 파티에 감탄하지만, 딱히 부러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어색해한다. 앤드루가 멀어지면 불안한 듯 손을 까딱거린다. 제프와 앤드루의 선물교환 연기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제프와 인사하는 순간, 달라진다. 긴장이 풀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앤드루의 짐작처럼 단순한 눈맞음은 아니다. 비싼 양복을 입은 젠틀맨들로 가득한 거대한 집에서, 함께 어색해하고 있는, 동류를 만난 느낌이다. 낯빛은 편안하게 풀리고, 입가의 미소는 예의상 띤 것일지라도 진심이 어리며, 상대에 완전히 집중한다. 제프와 데이비드가 첫 만남에 통한 까닭은, 둘 다 솔직하기 때문이다. 거저 얻은 솔직함이 아니다. 진실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알고 있기에, 거짓과 허영 투성이인 앤드루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솔직한 서로를 알아본다.


<베르사체>(FX)


호화 호텔 휴가에 끌려왔을 때도 역시, 어색해한다. 얼굴을 문지르며 피곤한 듯 웃는다. 앤드루가 신나하며 먼저 나가자, 발코니 아래를 잠깐 응시했다 돌아서는 얼굴이 잠깐 화면에 잡힌다. 미소는 사라지고 복잡한 지침만 남아있다. 일등석 표를 보내주고, 너무나 넓은 방과 비싼 양복과 소화되지도 않을 음식들을 들이미는 앤드루가 부담스럽고, 스스로의 감정이 미안한 것이다. 장단은 맞춰 주지만, 중간중간 불편함을 내비친다. 그리고 마침내 투 머치 하다고 털어놓는다. 데이비드는 예의 바르고, 착하지만, 선을 그을 줄 안다. 서로에게 최선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필요할 때는 직설을 날린다. “Andrew, I’m not the one.” 그 말을 뱉는 데이비드의 진지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는, 앤드루가 연기로 친 장막을 걷어낸다. 차근차근 까닭을 설명하며 정곡을 찌른다.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허나 역시 상대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며, 다시 한 번 잘 해 보려고 노력한다. 분명하고 약간 흥분해 떨리는 목소리로, 다 치워버리자고 말하고, 행동에 옮기고는, 바람직한 듣기의 표본 같은 표정을 하고 앤드루에게 몸을 기울인다. 턱은 상대를 향해 살짝 뻗어 있고, 입가엔 아주 엷고 진지한 미소가 있으며, 눈에 편하게 힘을 주고 집중한다. 또다시 진심이 통하지 않음을 느끼자, 그 균형은 흐트러진다. 입은 씁쓸해지고, 눈은 잠시 아련해졌다가 그늘이 생긴다. 마치 동정하는 것 같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고, 상대는 저버렸다. 이제 데이비드는 앤드루와 함께 하기를 포기했다. 피곤하다며 가는 그를 붙잡는 앤드루에게, 언젠가 네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며 덕담을 한다, 아니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그의 사람에 대한, 앤드루에 대한 믿음이 진심이란 것이 느껴진다. 그 믿음은 살인이 일어나던 밤, 제프와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앤드루한텐 아무도 없어’라고 제프에게 말하는 얼굴은 쓸쓸하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공감한다. 결혼하자는 앤드루에게 한껏 질려, 지친 말투로 털어놓으면서도, 제프를 보는 눈에 편안한 사랑이 담겨 있으면서도, 앤드루에 대한 믿음을 놓지는 못한다. 찰나의 미세한 표정 변화로 코디 펀은 그 심리와 진심을 표현해냈다.


<베르사체>(FX) imdb 이미지.


이 에피소드들은 단순히 피해자의 과거, 살인에 영향을 미친 일들을 보여주고 끝나지 않는다. 앤드루와 데이비드 각각, 또 그들 사이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연출의 방향과 더불어 두 배우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코디 펀의 연기는 자잘한 조각조각의 감정마저 보여주며 집중을 이끌어냈고, 데이비드를 그 장면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베르사체>(FX) imdb 이미지.



여기 데이비드 매드슨과 아주 다른 인물이 있다. 성격도 배경도, 외모도, 작품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다르다. 대개 시즌의 첫 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은,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거나 돌발행동을 하는 종류인 경우가 많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6덩컨 셰퍼드가 그렇다. 첫 등장은 데이비드와 마찬가지로 통화를 하면서다. 허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코디 펀은 원래의 차분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활용해 최대한 물 흐르듯 말을 잇는다. 부드러운 느낌은 아니다. 말끝이 애매하게 떠 날카롭고 의뭉스럽다. 어두운 조명, 진한 색 양복, 톤 다운된 머리카락과 비죽비죽한 수염이 한층 인상을 어둡게 만든다. 힘을 뺀 듯 가늘지만 사실은 사납게 힘을 주고 있는 눈과 웃음기 없이 올리는 입꼬리도 일관된 분위기를 풍긴다. 눈빛은 일부러 흐린다. 이후에도 코디 펀은 비슷한 톤으로 덩컨을 표현한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6 (Netflix) imdb 이미지.


빌이 직설적으로 클레어에 대한 적의를 표시하고, 에넷이 우호적인 척 다가서며 은근히 협박한다면, 덩컨은 뒤에서 냉정하게 관찰한다. 본인의 말처럼, 클레어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 대개 어두운 옷을 입고, 일부러 면도도 깔끔하게 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 쉽게 섞여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엄마의 승리를 위해 행동하지만, 패밀리 네임에만 충실한 느낌은 아니다. 자신만의 계획과 방식이 있고,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삼촌이 경계할 정도다. 젊고 똑똑한, 그러나 새롭거나 순수하지는 않은 에너지. 그것이 덩컨 셰퍼드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6 (Netflix) imdb 이미지.


분량이 많지는 않다. 허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클레어가 무능력한 연기를 하고, 빌이 그녀를 끌어내릴 계획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덩컨과 클레어가 만난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예의 그 마법의 목소리다. 직설적으로 제안하는 덩컨은, 이제까지 보여준 것 중 가장 확장된 눈으로 클레어를 똑바로 본다. 엷은 하늘색 한가운데에 진한 동공이 있다. 고개를 약간 내리고 이마에 주름을 잡아, 진지하면서도 파격적인 눈빛을 쏜다. 클레어의 대사, “You are very confident young man.” 이 이해되는 얼굴이다. 항상 계획에 따라 행동하던 덩컨은, 클레어가 엄마에 대해 묻자 갑작스럽고 민감한 화제 변경에 당황해 개인적 감정을 내비친다. 말을 술과 함께 입에 잠깐 머금고, 고개를 숙이고 보일 듯 말 듯 씁쓸한 미소를 띤다. 코디 펀은 일관되게 통제했던 톤을 순간적으로 풀어 덩컨이라는 기능적 인물에게 서사를 부여할 뿐 아니라, 엄마 에넷과의 관계도 드러낸다. 허나 미안하지만, 전개상 그의 개인사는 클레어가 셰퍼드의 분열을 유도하는데 필요한 것일 뿐이다. 때문에 코디 펀은 딱 필요한 정도로만 드러낸다. 삼촌의 화에 대응하거나 엄마에게 물을 때도 그렇다. 데이비드와 덩컨을 다루는 각 작품의 태도에 따라, 그들을 연기하는 코디 펀의 톤도 달라진다.



<베르사체>(FX)


다시 찬찬히 데이비드 분장을 하고 있는 코디 펀을 뜯어보니, 저렇게 바르고 순수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덩컨 셰퍼드에겐 없는 아우라다.

아직 앤드루에게 위화감 대신 관심과 동경을 가지던 때, 데이비드는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천사 같은 성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자체뿐만이 아니다. 그 진심어린 죄책감, 진실된 태도는 주위의 공기를 바꾼다. 의도 같은 것은 없다.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애써 웃는, 그러나 살짝 붉어지며 복잡해지는 표정이 말해 준다. 이후 앤드루가 노먼에게 자기 일인 양 각색해서 들려주는 모습과 대조된다. 앤드루의 목적은 스토리텔링으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완벽하게 감상적인 어조로 아련함을 꾸며낸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노먼은 앤드루의 거짓을 느끼고, 앤드루는 데이비드와 사랑에 빠진다.


<베르사체>(FX)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무언가를 그리는 코디 펀이다. 실제로 그가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리는 연기를 뭐랄까, 멋지게 한다. 집을 그리는데 집중하면서, 동시에 이야기와 앤드루에 집중하는 능숙한 손놀림에, 앤드루가 반하는 건 당연하다. 그 손을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코디 펀이 미국 TV시리즈로 스타가 되기 몇 해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찍은 단편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다. 코디 펀의 리처드는 꿈에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그린다. 밤에, 스탠드를 켜놓고, 헤드셋을 낀 채다. 이번에는 천천히 슥슥 스윗하게 그리는 대신, 뭔가에 홀린 듯 빠르고 강하게 스스스슥 하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인다. 손놀림을 통해서도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표현할 수 있음을, 코디 펀은 새삼 일깨워준다.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작품의 배경은 정신질환이 있는 십대들이 머무르는 병원이다. 주인공이자 화자가 토비 월레스의 조나라면, 리처드는 대상이다. 그렇다 쳐도, 도저히 속을 알 수가 없다. 미스터리하고, 음침하고, 처음 몇 장면 동안은 대사도 없다. 인상을 쓰고 경계하며 흘끗 보거나 관찰할 뿐이다. 발작적으로 흠칫 하거나 벌떡 일어서기도 한다. 그냥 분위기로 먹고 들어가면 되는 연기 아닌가 싶었다면, 오산이다. 정확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지만, 뭔가를 표현하고는 있어야 한다. 단순히 복잡한 게 아니라, 분석할 수 없는 복잡함이어야 한다.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리처드가 처음 입을 여는 것은, 화장실에서 자해하는 조나를 보고 나서다. ‘네가 여기 있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차분하고 평범한 어조다. 허나 당황한 조나를 보고 혼자 씨익 웃는 입은 다시 리처드를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몰아넣는다.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입만 보여줘서일 수도 있다. 허나 코디 펀의 입이라서 다르다. 아주 큰 편은 아닌데, 끝까지 찢어지게 올릴 줄 안다. 좋아서 반사적으로 삐져나오는 웃음 같기도 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의도 된 제스처 같기도 하다. 이후 그림을 본 조나의 목을 조르는 얼굴과 연결된다. 힘을 주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느낌이다.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이후 조나와 마주 앉아 게임을 하다, 그는 묻는다, “Why do you cut yourself?”. 단순한 호기심인가, 재미있어 하는 것인가, 걱정이나 공감인가. 역시 알 수가 없다. 코디 펀은 말에 최대한 힘을 빼고 공기를 집어넣는다. 표정도 마찬가지다. 텅 비운 채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그림에 대해 묻는 조나에게 “Baaad dreams.” 라고 늘여 속삭이는데, 장난 같으면서도, 방어적이다. 다음날 조나가 다시 말을 꺼내자, 반사적으로 날카롭게 응시한다. 농구도 공격적으로 한다. 허나 조나가 넘어지자, 가느다랗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사과한다. 꾹 다물린 입과 눈빛, 이마의 인상이 진지한 미안함을 드러낸다. 더 주목할 것은, 뒤돌아 가는 조나를 응시하는 표정이다. 아쉽다. 아련하다. 리처드의 방어적 행동이 완전한 자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조나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다.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그러나 쉽지 않다. 조나는 확실하게 감정을 드러내지만, 리처드는 아니다. 잠깐 웃었다가도 금방 인상을 쓰고, 가까워졌다 싶으면 금방 뒤돌아선다. 약간 고양이 같기도 하다. 잠에서 깨 옆에 누운 조나의 상처를 부드럽게 쓸며 눈을 맞추다가, 관리자가 문을 열어 둘을 보고 당황하자, 벌떡 일어나 창문을 향해 선다. 조나가 센터를 나가는 순간, 리처드를 부르자, 돌아본다. 이마는 인상을 쓴 채고, 눈은 확장돼 있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경고를 날리는 것 같기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복잡한데 분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아련하게 남아, 조나가 ‘리처드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제목 ‘The Last Time I Saw Richard’가 감정적으로 이해되는 장면이다.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홀로 어두운 공간에서 지직거리는 TV 앞에 앉아 있는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르다.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만, 얼굴은 아니다. 그가 그린 밤의 그림자들이 주위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가만히 앉아, 텅 비어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단순히 멍을 때리는 게 아니라, 정말 텅 비어 있다. 그림자들이 그를 잡아먹고 있는 것인가. 그가 그 그림자들을 스스로 불러낸 것인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건에 말려든 데이비드가 떠오르면서도, 각도를 틀면 심장을 들고 피칠갑을 한 채 입맛을 다시는 마이클 랭던이 보인다.


<The Last Time I Saw Richard>(2012)



사실 그를 좋아하기 전 본 작품은 <베르사체> 하나다. 처음 볼 당시, 데이비드에게 마음이 쓰였고, 배우가 연기를 끝내주게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더 파고들진 않았다. 내 마음을 뺏은 건, 우연히 본 사진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시스루 블라우스를 입고 눈화장을 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데이비드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낯설었다. 보라색 섀도우, 코르셋, 시스루, 퀴어페스티벌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아래 인터뷰.


이미지 출처: 인스타그램 @codyfern


“하비 웨인스타인과 그 이하 행동들이 처벌받지 않고 있는 현상 이후, 남자들에게:
굉장히 위험한 영역이야. 왜나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거든, “음, 난 하비 웨인스타인이 아니야.” 그래서 작은 행동들이 큰 행동들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도록 만들어. 네가 약간 불편하다고 해서, 누가 신경써? 걱정된다면, 문제는 분명 너한테 있는 거야. 난 쓰레기 청소에 대해 말하는 거야. 동정심 따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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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인스타그램 @codyfern


어떤 작품에서 처음 보고 연기를 잘 한다 싶었던 배우가, 화면 밖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 때 반하고 만다. 날 펑펑 울게 만들었던 순수청년 데이비드는 사실 스모키 눈화장과 젠더퀴어한 올블랙 패션을 자주 하며 변화에 대해 불편해하는 남자들을 향해 직설을 날리는, GQ매거진 표현을 빌리자면 ‘GENDERFUCK REBEL’ 이었던 것이다. 헌데 그 곧음이 낯익었다. 이미지는 다르지만, 데이비드가 겹쳐 보였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8 (FX) imdb 이미지.


코디 펀에게 팬덤을 안겨준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는 정작 보지도 못했다. 허나 마이클과 자비에 분장을 한 코디 펀의 이미지를, 그 입체적이고 치명적인 표정들을 본 순간, 분명 그들을 사랑하게 되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작품 속에서든 밖에서든, 코디 펀은 항상 정확한 자신의 위치에 있을 것이다, 낯설고도 낯익은 얼굴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9 (FX) imdb 이미지.



+ AHS를 볼 용기가 나면 코디 펀 2를 써오도록 하겠음.
(이미 보기도 전 사랑에 빠짐 아마 곧 덕심이 호러포비아 이길 듯)


참고 인터뷰:


https://youtu.be/OnsqCtPc1ro


https://www.gq-magazine.co.uk/article/cody-fern-interview-gq-style?amp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yonnu20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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