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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11. 2019

톡 쏘는 능숙함의 향연

릴리 레이브(Lily Rabe) in AHS


릴리 레이브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Lily Rabe in <American Horror Story>)
 
-캐릭터:
노라 몽고메리 in 시즌1 ‘저주받은 집’
(Nora Montgomery in ‘Murder House’)  
유니스 수녀 in 시즌2 ‘정신병자 수용소’
(Sister Eunice in ‘Asylum’)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집, 60년대 정신병원, 마녀 학교, 프릭 쇼, 수상한 호텔이나 농가, 컬트 집단.... 현재 시즌9까지 나온 시리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 이하 AHS)의 으스스한 배경들이다. 심지어 시즌8은 제목부터 아포칼립스. 시즌마다 소재를 달리해 다양한 호러 이야기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장르 호러 TV쇼’ 라는 신선한 포맷 덕에 주목 받았으나, 장르 호러와 가깝지 않은 나 같은 시청자들은, 볼 생각도 않거나, 손대기까지 한참 고민하게 된다. (코디 펀의 마이클 랭던을 포기할 수가 없어) 마음을 다잡고 봤는데, 뭔가 속은 기분마저 들었다. ‘호러’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쇼였던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역시, 입체적인 캐릭터다. 매 시즌 배경도 캐릭터도 다르다. 하지만 일부 배우들은 새로운 역할을 맡으며 AHS세계 속에 그대로 머문다. 제작진만이 아니라 배우들도 한 ‘팀’으로서 쇼를 이끄는 것이다.

배우에겐 괜찮은 기회일 수 있다. 서로의 방식을 아는 사람들과 계속 일하면서도, 한 캐릭터를 오랫동안 맡아 이미지가 굳어질 걱정이 적다. 하지만 그만큼 배우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아무리 드라마틱한 분장을 해도, 연기가 애매하면 ‘쟤 걔랑 똑같애’라는 말이 나오며, 시청자가 쇼에 몰입하는 데에 방해된다. 또한 본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도 낮아질 수 있으니, ‘잘’ 해야 한다. 아예 다른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연기 방식은 배우마다 다르니까. 다만 각 인물의 포인트를 잘 잡아 서사와 매력을 설득 시켜야 한다.


AHS 시즌1. livejournal 이미지.


허나 이런 걱정은 쓸데없었다. AHS 팀 배우들은 분량에 상관 없이 능력이 넘쳐났다. 때로는 비슷한 성격과 이미지를 지닌 인물을 맡으면서도, 연기를 통해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해 낸다. 그 중 하나가 릴리 레이브다. 그가 맡은 것은 유령(노라), 악마(유니스), 마녀(미스티 데이) 등-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픽션 속에서는 흔하기 때문에, 자칫 클리셰가 돼버릴 수도 있는 종류의 캐릭터들이다. 허나 AHS 제작진은 전형적인 호러 소재를 가지고도 이제껏 없었던 이야기와 인물들을 창조해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릴리 레이브는 저마다의 매력을 잔뜩 표출했다. 특수한 상태와 보편적인 감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끌어냈다.


AHS 시즌1. eonline 이미지.


릴리 레이브의 첫 번째 얼굴은 노라 몽고메리, ‘저주받은 집’의 첫 거주자, 현재는 유령이다. 노라의 상황은, 살아 있을 때도 딱히 평화롭지는 않다. 알 수 없는 작업에 정신이 팔린 남편 때문에 항상 곤두서있다. 강하고 시니컬하게 남편을 비난하는 노라의 얼굴은 음절 단위로 구겨졌다 펴진다. 특히 입 주변을 일그러뜨리는 연기가 돋보인다. 와중, 눈빛은 아주 분명하다. 목소리는 낮은 편이나 날카롭고 톡 쏘는 듯해, 효과적으로 상대에게 가 꽂힌다. 드라마틱하고 복합적이다. 울먹이며 말끝을 흐리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하! 하고 비웃는다. 일부러 성대를 거칠게 긁어 내는 소위 ‘마녀’ 웃음소리는, 릴리 레이브만의 것이다. 절대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려는 의도의 장면은 아닌데, 매력을 드러내버린다. 한껏 우아하게 꾸미고 귀족 레이디의 태도를 갖춰도, 특유의 ‘털털함’이 묻어난다. 물론 장면의 성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다. 캐릭터의 중심을 흐리지 않으면서, 전형적이지 않게 만든다.

아이가 죽고, 남편이 아이의 시체를 붙여 괴물로 만들자, 노라는 남편을 죽이고 자살한다. 그리고 점점 스스로를 잃어간다. 어린 테이트를 달래 줄 당시엔 다정하고 안정된 강함을 드러내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테이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몽롱하게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기댄다. 끊임없이 아기를 찾는다. 작품의 현재, 오래된 유령인 노라는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꿈꾸는 것 같이 멍하다. 노라 주변만 공기가 약간 다르다. 깊은 우울이 내재 돼 있어, 건드리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허나 한구석은 분명하고, 공격적이기까지 해서, 어떤 포인트를 건드리면 금방 눈을 번뜩인다.


한때 살았던 집을 보러 온 노라는, 자신 없고 불안해 보인다.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손은 가슴에 모은 채다. 눈은 그렁그렁하게 확장돼 있다. 곧 쓰러질 것 같다. 집에 들어서자, 불안한 상태 그대로 표정이 펴진다. 감격스러운 미소를 띠며 집을 자세히 묘사한다. 모든 동작은 느리게 우아하다.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부엌에 들어온 순간, 노라는 굳는다. 화났다기보다는 혼란스럽고, 더욱 불안해 보인다. 부정적인 감정이 겉잡을 수 없이 휘몰아친다. 파스타용 수도꼭지를 보고 쇳소리를 내며 ‘저게 뭐냐’고 빠르게 쏘지만, 이내 절제한다. 사적인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또 묘하게 드러내서, 비비안이 이상한 기류를 느끼면서도 깊게 의심하지는 않게 한다.


AHS 시즌1. livejournal 이미지.


노라는 집에서 온갖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홀로 우울하게 아기를 찾으며 돌아다닌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비비안은 유령이 된 아기와 있는 노라를 발견한다. 고개는 힘없이 흔들리고, 눈은 반쯤 감겨 있어, 잠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완전히 지친 듯 투덜거린다. 비비안에게 하는 말이지만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잠긴 상태로 힘을 빼고 물 흐르듯 중얼거리는데, 비음이 섞여 여전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little noisy monster’) 상대를 꿰뚫어보듯 뜨는 실눈과, 드라마틱하게 찡긋거리는 눈썹까지 더해져, 지친 와중에도 시니컬하고 만만치 않은 성격이 묻어난다. 그러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피곤함과 함께, 너무 역사가 깊어 인물과 하나가 돼버린 슬픔,이 섞인 눈물이다.

‘아기는 내 꺼’ 라면서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힘없이 짜증만 내다가, 비비안이 달래 아이가 울음을 그치자, 안도의 중얼거림을 뱉는다.(‘Thank god’) 속삭이듯, 거의 성대를 사용하지 않고 낮게 말한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손을 흐느적거린다. 카메라는 노라 주변만 일부러 초점을 흐린다. 연출과 연기가 어우러져, 굳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노라는 이제 정말 편히 쉬겠구나,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든다. 모이라 말을 빌리면, ‘아이를 정말 원하기보다는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상태였기에, 그 집착이 사라지자마자, 힘이 끝까지 빠져버린 것이다.


AHS 시즌1. livejournal 이미지.



AHS 시즌1과 2에서, 같은 배우가 다른 캐릭터를 맡아도, 공통적인 분위기, 통하는 포인트가 있다. 사라 폴슨의 우아한 강인함, 제시카 랭의 독선적인 꼿꼿함, 프랜시스 콘로이의 통달한 차분함.(+다른 글에 쓴 에반 피터스의 로맨틱) 그리고 릴리 레이브에겐 시니컬한 능숙함이 있다. 시즌2에서는 그 분위기가 처음부터 나타나지는 않지만, 잠깐만 기다리면 원 없이 진하게 맛볼 수 있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유니스 수녀는 래나를 안내하며 처음 등장한다. ‘노크하고 다니라’는 주드 수녀의 핀잔을 듣고 우왕좌왕하면서 나간 후, 바로 다음에 또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우왕좌왕한다. 신경을 쓰지 않아서 덜렁대는 게 아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도 실수를 반복한다. 유니스의 탓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장소, 온갖 폭력이 가득한 이 병원에 있기에 그녀는 너무 순진하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괴상한 실험을 일삼는 아든 박사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물리적 정신적으로 환자들을 억누르는 주드 수녀 사이에서, 휘둘리고 갈팡질팡하며 간신히 버틴다. 유니스는 거의 항상 당황한 상태로 돌아다닌다.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고, 얼굴은 창백하며, 눈은 불안하게 확장돼 있다. 릴리 레이브는 원래의 분명한 목소리를 늦춰 작고 여리고 가늘게 낸다. 래나와 함께 어두운 병동을 지나다 환자가 겁을 주자,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인 얼굴과 목소리로 간신히 제지하다가, 끝내는 울며 도망간다.


유니스는 멍청하고 순수하고 착하다.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실수를 하면 패닉에 빠져 자책한다. 완전히 무너진 채 울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혼내달라고 소리친다. 노라의 눈물과는 다르다. 눈물의 성격도, 그것을 흘리는 캐릭터의 성격도 다르다. 노라의 눈물은 비극으로 인한 깊은 우울과 슬픔으로부터 나온다. 그녀에겐 귀족의 기본적인 태도가 있다. 엉엉 울지 않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표정은 절제한다. 유니스에겐 아예 ‘태도’라는 것이 없다. 속을 전혀 숨기지 못한다. 그녀의 눈물은 대개 여러 종류의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나온다. 얼굴을 온통 구기며 입을 벌리고 아이처럼 펑펑 운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그런데, 이럴 수가, 2화도 채 지나지 않아, 유니스는 달라진다. 엑소시즘 과정에서 환자가 죽고, 멍하니 구경하던 유니스에게 악마가 들어간다. 작품은 바뀐 모습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 ‘경계에 있는 장면’을 둔다. 흰 빛 한가운데, 흰 침대 위, 흰 잠옷을 입고, 유니스가 잠들어 있다. 아든이 다가오자, 유니스는 기척을 느끼고 잠이 묻은 얼굴로 배시시 일어난다. 사건 이전, 아든을 볼 때의 유니스에겐, 두려움 섞인 존경과 사심 없는 호감이 묻어났다. 헌데 이 장면은 느낌이 다르다. 두려움과 존경심이 사라지고, 허물 없는 순수만이 남았다. 남몰래 유니스의 ‘순수’를 욕망하는 아든의 시선 때문 만은 아니다. 약간 멍하고, 천연덕스럽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며 상대를 가지고 노는 자의 얼굴이다.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는 모습은 치명적으로 귀엽다. 아든이 자리를 뜨자, 그의 뒷모습을 보던 눈에 악의적인 힘이 들어간다. 얼굴의 나머지 부분도 단호해진다. 덮었던 이불을 휙 집어던진 후 팩 하고 눕는다. 릴리 레이브는, 악마가 들어간 유니스의 변화를 긴가민가 모호하게 맛 보여 주다가, 마지막의 찰나로 확신을 준다. 아든이 제멋대로 입힌 ‘순수한 소녀’ 이미지를 깨뜨린다.

악마가 들어간 유니스는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원하는 만큼 멍청함을 연기한다. 걸음걸이엔 여유가 묻어나고, 얼굴엔 더 이상 당황이나 불안이 없다. 목소리도 차분하게 낮아졌다. 주드 수녀 앞에서는, 적당히 숨긴다. 신문을 건네 준 후 슬며시 미소 짓는다. 립스틱을 바르고 들어와 확인한다는 구실로 포도주를 마신다. 장난스럽다. 천연덕스럽다. 주드 이외의 사람들을 대할 때는 딱히 숨기지 않는다. 릴리 레이브 특유의 시니컬한 입가와 날카로운 비음이 빛을 발한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유니스의 경험과 착함을 기억하고 이용하는 악마라서 더 예측하기 힘들다. ‘어쩔 줄 모르는’에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릴리 레이브는 유니스의 순수함을 악마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표현한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3화)유니스는 자기 정체를 알아본 환자를 밤에 찾아가 죽인다. 소리지르고, 찌르는 동작 모두 한 치의 오차 없이 깔끔하다. 살인을 마치고 고개를 슬며시 기울이며 허공을 보는 표정은 모호하다. 분노나 공격성보단 권태가 느껴진다. 정말 ‘pure evil 순수악’ 같다. 아든을 몰아세우듯 비꼬며 가지고 놀다가 뺨을 맞았을 때, 무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뺨을 슥 쓸어내리는 얼굴도 비슷한 느낌이다. 눈에 어린 광기는, 다음 순간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과 이어진다. 표정만 보면 그냥 즐거운 것 같기도 한데, 책상에 무방비하게 기대 있는 자세와, 묘하게 이질적인 웃음소리가 기괴하다. 짐짓 슬픈 표정을 했다가, 참을 수 없는 듯 또 웃는다. 보는 이를 정신없이 몰아간다. 언급했듯, 릴리 레이브 목소리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쇳소리다. 웃음에 섞이면, 미세한 변화에 따라 유쾌하거나 털털하게 다가갈 수도, 광기나 악의가 가득할 수도 있다. 소리의 주인은 그 사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분명한 발성, 허스키하거나 톡 쏘는 목소리는, 쓰는 법에 따라 얼마든지 날카로울 수도, 부드러울 수도 있다. 테이트를 달래거나 지쳐 중얼거리는 데에 쓰였던 속삭임은 환자들 속의 악마를 끌어내는 데에 쓰이고, 귀족 레이디의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데 쓰였던 시니컬함은 직원들을 부리는 데에 쓰인다. 그리고 여기선, 한 가지가 덧붙는다. 낮게 깔아 느끼하고 부드럽게 내는 목소리다. 주드 수녀를 따라하며 신부의 권력욕을 구슬리는 데에 쓰인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후반부로 갈수록, 유니스는 모두를 가지고 논다. 만사 귀찮은 듯한 말투로, 가학적인 말들을 웃음 섞어 뱉으며 입을 비틀고 고개를 장난스럽게 흔든다. (8화)그녀의 말처럼 ‘아든 또한 천사는 아니’기에, 의자에 기대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당연하게 아든을 하대하는 폼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담배를 물고 발음을 흐리며 대충 치는 대사는, 털털한 릴리 레이브의 매력을 악마적으로 발산한다. 칼을 만지작거리는 손놀림부터 능청스러운 말투까지, 약간의 어설픔도 없다. 애 달래듯 하며 신부를 범하고, 목격하고 슬퍼하는 아든을 졸래졸래 쫓아가서 놀린다. 발랄해서 귀여울 지경이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아든을 내려다보는, 냉정하고 통달한 표정은, ‘진짜’ 유니스의 것이 아니다.


릴리 레이브는 한 껍데기로 두 가지 캐릭터를 표현해낸다. 언급했듯, 단순히 ‘다른 두 사람’은 아니다. 표면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본질은 아주 다르다. 릴리 레이브가 얼마나 탁월하게 두 가지 유니스를 연기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7화)사하트를 만나자 원래의 유니스가 갑자기 튀어나온다. 울며 해방해 달라고 애원한다. 손을 앞으로 뻗고 벌게진 얼굴을 잔뜩 구긴다.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는 것 같다. 허나 다시 악마가 유니스를 덮는다.

(10화)악마를 몰아내려는 신부를 냉정하게 비웃던 유니스는, 마침내 극단적인 분노를 드러낸다. 날카롭게 소리치는 대신 낮고 굵게 내지르며 멱살을 잡는다. 상대를 똑바로 보며 위협한다. 그러다 손이 풀리며 떨리기 시작한다. 으르렁거리던 입은 그 모양 그대로 울상이 된다. 꼭 감았던 눈이 애절하게 신부를 향한다. 눈물을 글썽인다. 얼굴과 손 목소리 모두 가늘게 떨린다. 큰 동작을 하거나 간격을 두지 않아도,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인격을 오간다. 정말 악마라도 들린 것 같은 연기다. 릴리 레이브가 장악한 화면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유니스의 시간이 끝나버린다. 신부에게 밀려, 진짜 유니스의 상태인 채로 편안하게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 편안한 얼굴의 여운은, 상당하다.


AHS 시즌2. imdb 이미지.

 

<미스 스티븐스>(2016)는 내게 있어, ‘티모시 살라메 때문에 봤는데, 릴리 레이브에게 반한’ 작품이었다.(물론 티미에겐 이미 반해 있었다.) 살짝 취한 채 음악에 맞춰 괴상하게 몸을 흔들다가, 다가온 상대에게 엉망진창으로 대꾸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빌리처럼 흐뭇하게 기대 레이첼을 흠모하게 된다. 감정을 끌어내 공감하게 만들면서도, 오직 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연기. 한 작품만 봤는데도 배우의 가능성과 폭이 와 닿았다.

<데드 돈 다이>(2019)의 틸다 스윈튼처럼, AHS 속 릴리 레이브 주위엔, 독특한 기류가 흐른다. 작품과 통하면서도 완전히 섞이지 않고 혼자만의 서사를 유지한다. 릴리 레이브가 주로 그런 ‘특별한’ 캐릭터를 맡는 까닭은, 능숙하면서도 전형적이지 않고, 튀면서도 안정적인, 연기 때문일 것 같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다가도, 순간 숨을 죽이게 만든다. 폭죽처럼 펑펑 터지다가, 안개처럼 공기를 덮는다. 화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릴리 레이브만의 연기다.


AHS 시즌1. livejournal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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