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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16. 2019

낯선, 낯익은.

코디 펀(Cody Fern)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yonnu2015/81



-캐릭터:
마이클 랭던 in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8 ‘아포칼립스’
Michael Langdon in <American Horror Story> ‘Apocalypse’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 세바스찬 스탠은, 강철 수트를 입고 포스를 뿜어냈다. 무겁게 흔들리는 움직임은 윈터 솔져 특유의 리듬을 구성했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FX) ‘아포칼립스’, 마이클 랭던의 첫 등장에서 떠올라, 비교를 위해 언급했다.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윈터 솔져의 금속 수트와 마스크는 몸매를 드러내고 눈을 강조한다. 반면, 마이클이 첫 등장에 입은 방사능 수트는, 온몸을 가린다. 외모의 개성을 지우는 대신, 미스터리함을 더하고, 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세바스찬 스탠이 목소리 없이 눈과 움직임으로 버키 반즈의 깊은 슬픔을 드러냈다면, 코디 펀은 표정 없이 목소리와 움직임으로 마이클 랭던의 쌔한 우아함을 드러낸다. 고급스러운 걸음걸이, 살짝 허스키한, 다급함이라곤 없는 목소리, 말끝을 슬며시 올리는(‘animals’) 묘한 톤. 원래의 차분한 말투를 더욱 느리고 분명하게, 높은 편인 목소리는 한 톤 낮춰 뱉는다. 거대한 비닐 덩어리를 입고도 마이클의 카리스마를 살려낸다.

낮았던 목소리는 베너블와 만난 후 톤이 풀려 풍부하고 가늘게 간드러진다. 푸른 눈은 익살맞을 정도로 동그랗게 뜨고, 눈썹은 살짝 치켜올려준다. 입꼬리는 씩 올려놓는다. 장난기와 광기가 어린다. 잔인한 대화 내용과 상쾌한 배경 음악이 아이러니하게 어울린다. 붉은 셰도우와 길게 늘어뜨린 금발, 볼드한 반지들과 검은 가운은 거들 뿐이다. 온 기지를 휘감은 촛불의 어두운 주황빛은, 그의 특별한 외양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설정된 색이 분명하다. 오 이런, 코디 펀의 마이클 랭던은 1화 마지막 3분 만에, 화면을 잡아먹어버렸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마이클은 화면에서 한 발 물러나, 화자와 대상의 경계에 있는 특별한 성격의 캐릭터다. 모두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한다. “There’s something wrong with Michael. 마이클은 뭔가 이상해.” ‘something’이 뭔지 알 수 없어, 궁금해하고, 두려워한다. 알게 된 후에는 대상화해, 경계하고 적대하거나, 숭배한다. ‘born evil 타고난 악’ 마이클. 그 악이 자극을 받아 갖춰 가는 형태를 점차 뚜렷하게 드러낸 것도, 그 과정에서 마이클의 심리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만든 것도, 일부는 코디 펀의 공이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배너블과 얼굴을 마주한다. 키는 비슷하지만, 턱을 치켜들어 일부러 내려다본다, 상대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연설이 시작돼도, 턱은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깔아보고,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삐딱하게 고정 시킨 채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린다. 입꼬리 역시 한쪽만 올려, 전체적으로 기울어진 표정을 한다. 불만스러운 듯 눈을 좁히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적절한 순간에 손을 올리거나 휙 내린다. 특별히 목소리를 깔거나 무게를 잡지는 않는다. 부드럽게 이어가다, 강조할 단어-주로 폭력적이고 직설적인 단어-가 있으면, 소리에 공기를 넣어 풍부하고 허스키하게 다운시킨다. 발음을 굴리며 문장에 리듬을 넣어 빠르게 흘리기도 한다. 상대의 말에 반대되는 서술을 할 때, 혹은 심기가 불편하거나 감정이 고조될 때면, 이마와 눈, 코가 한꺼번에 좁아지며 목소리에 비음이 잔뜩 섞인다. 본인의 악한 신조를 설명할 때는 얼굴이 신들린 듯 확장되고 목소리에 공기가 잔뜩 섞인다.

마이클 랭던은 능숙한 연기자다. 목소리의 공기 양과 높낮이, 손짓, 눈과 턱의 위치, 자세, 걸음걸이 등, 모든 것을 계산하는데, 몸에 배어 티나지 않고 완벽히 폼난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생김새가 다는 아니다. 아무리 조각미남이어도, ‘멋진 척’이 어설프면 오그라들고 못 봐주겠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코디 펀은 본인이 치명적으로 보이는 각도와 톤을 잘 아는 배우다. 연기에 연기를 입혀, 분위기를 각인시킨다. 우아하면서 소름 끼치는 특유의 움직임 스타일을 창조해낸다. 미스터리하고, 중성적이며, 나른하고, 차갑다. 세련됐다기보단 고전적이다. 애플 랩탑은 왠지 마이클과 어울리지 않는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갈란트를 면담하는 마이클은, 가만히 기대 앉아 입과 눈썹만 움직이며, 정제된 톤으로 기계처럼 말을 읊는다. 딱딱하고, 무겁다. 허나 관심이 생기면, 뭔가 꽉 차올라 흘러 넘치는 얼굴이 된다.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는 “Tell me about your anger.”에서는 공기가 맥시멈이 되고, 눈이 멍하게 번쩍거린다. 최면을 거는 것 같다. 긴 손가락으로 뺨을 쓸어내린다. 천천히 걸어가 책상에 걸터앉는다. 연기가 몸에 뱄으므로, 상대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본인에게 집중한다. 마이클이 간드러지는 톤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다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뚫어져라 보면, 뭐든 술술 불게 될 것 같다. 갈란트가 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코디 펀의 얼굴은 미세한 변화로 꽉 참과 텅 빔을 오가며, 혼란스러운 크러쉬를 선사한다.

배너블이 뒤돌자, 마이클이 화보 찍는 모델처럼 계단 난간에 한쪽 팔을 걸치고 삐딱하게 기대 있다. 강한 어조로 누르다가, 풀린 톤으로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odd’, 라고 강조해 뱉고, 눈알을 위로 굴린다. “You are a fighter.”에서는 터지기 일보 직전인 웃음마저 머금고 있다. 갑자기, 오는 길에 본 엄마와 아이 이야기를 한다. 손짓은 풍부하고 표정은 짐짓 슬픈 듯 일그러진다.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떨어진다. 헷갈린다. 진심인가? 배너블의 표정이 흔들리며, ‘자비’를 베풀었냐고 묻자, 단호하고 당연하게, “No.”라고 답한다. 여전히 흘러 있는 눈물에 위화감이 든다. 또 갑자기, 씩씩하게 일어나 걸어가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목소리엔 생기마저 돈다. 코디 펀은, 마이클의 알 수 없는 감정 기복, 혹은 늑대의 눈물, 혹은 뭔가를 감추기 위한 연기를, 천천히 그만의 리듬으로 선보인다. 정신없이 혼을 빼놓지는 않지만 숨을 죽이게 한다.

기습하듯 뱉는 “Take off your dress. 옷을 벗으세요.”에는, 성적인 뉘앙스가 없다. 사무적이고 강력하다. 배너블의 흉터를 손으로 쓸며 아프냐고 묻는 얼굴은, 갈란트에게 물을 때와 비슷하다. 말했듯, 뭐든 내맡기고 술술 불게 된다. 헌데 없었던 섹슈얼한 뉘앙스가 순간 생겨난다. 키스할 것처럼 아주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한다. 입술이 닿을 정도가 됐을 때, 얄밉도록 단호하게 뱉는 “No.”, 얼굴을 거두지 않고 시니컬한 미소를 띄운 채 그대로 두는 게 포인트다. 성적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분위기가 차가워진다. 모두가 나가자, 마이클은 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며 숨을 들이마신다. 음미한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마이클 랭던 자체는, 섹슈얼함을 온통 내뿜는 존재다. 하지만 코디 펀은 그 에너지를 무분별하게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 밀고 당김을 철저하게 조절해, 사람들의 심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수치심을 주는 마이클의 기술을 완성한다. 갈란트의 등을 사근사근하게 쓸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hot’ 하지만, “I wouldn’t fuck you if you were the last man on Earth, and you almost are.”라고 못박는 눈빛은 본인 말대로 ‘clear’ 하다. 오 이런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대사와 너무도 어울리는 얼굴. 인터넷에 마이클 랭던 gif가 수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는 온 몸을 간지럽히는 동시에 소름돋게 한다. 예를 더 들면, 코코의 인격 깊이에 대해 논하며 손을 들고 고개는 들지 않은 채 말할 때는, 너무 귀찮아 보여 사무적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헌데 멜러리를 내려다보며 ‘thou shall not kill et ce tra’ 등등의 문구를 빠르게 읊을 때는, 뜬금 없는 포인트에 갑자기 핫해진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처음으로 마이클이 연기 없는 표정을 할 때는, 맬러리에게서 다른 존재가 나왔을 때다. 몸을 움츠리고 팔을 든 채 눈을 크게 뜨고 정지해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맬러리가 나가자, 그 자세 그대로 ‘흐’와 ‘허’의 중간쯤 되는 소리로 숨을 내쉰다. 놀라는 모습도 평범하지 않다. 벌벌 떠느니 차라리 굳는다. 연기를 할 겨를은 없어도, 절제된 폼을 보인다.

이후 마이클은 자해를 하며 사탄을 찾는다. 칼을 긋는 느린 동작에도 리듬이 있다. 깊고 낮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젖힌 채 벌어진 입과 몸을 떨며 무릎을 굽힌다. 물이 고인 눈은 끝까지 확장돼 있다. 정말 뭔가 몸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고해하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낮게 갈라진다.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공포와 감격 같은 것으로 얼굴 전체가 흔들리고, 눈물이 떨어진다. 고개를 젖히고 내뱉는, “Open my eyes!”는, 높게 터진다. 미간에 주름이 패이고, 근육이 긴장된 채 일그러지며, 콧구멍마저 떨린다. 이제까지 절제된 제스처를 조금씩 내보였던 코디 펀은, 다른 종류의 연기를 기습적으로 터트린다. 온통 진동하며 폭발한다. 허나 여전히 폼난다. 몸을 꼬고 쓰다듬는 동작 모두, 이상하게 야하면서 공포스럽다. 마이클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한껏 속을 드러내고 있지만, 코디 펀은 그의 폼을 섬세하게 신경 쓰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온도로 치명적이다. “Ave Satanas.” 부분의 목소리는, 확 굵게 내려간다. 효과를 입힌 건 아니다. 코디 펀의 가장 풍부하고 깊게 허스키한 목소리다. 넷플릭스 영어 자막에 적힌 (demonic voice)는 적절한 묘사다. 악마적이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마이클은 서로에 대한 증오를 상기시켜 악행을 격려하고 진심으로 칭찬한다. 속에 있는 악마를 끌어낸다. 배너블의 말에 상쾌하게 웃어주고, 교양 있게 사과까지 한다. 미드가 총을 꺼내자, 애를 달래듯 경고하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쏘라는 눈짓을 한다. 어디 한 번 해 보라는 도발이 아니라, 못내 참아 준다는 뉘앙스다. 곧은 자세로 총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미드가 총을 돌려 배너블을 쏘자, 인자하게 주름을 만들며 씨익 웃는다. 미드에게 성악설을 풀어놓는다. ‘evil motherfucker’ -그 시니컬한 발음. 그러나 미드와 둘만 남자, 또 다른 모습이 나온다. 눈물이 흐른다. 목소리 톤은 비슷하지만, 연극적 어조 대신 담백하고 차분한 진심이 어린다. 깊은 믿음과 존중으로, 보호자에게 의지하듯 마음을 기댄다. 엄마에게 새 옷을 입고 뽐내는 아이처럼 재킷을 입고 폼을 잡는다. 아련한 눈에 묻은 것은 슬픈 과거다. 이제 궁금해진다, 마이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코디 펀은, 외적인 모습으로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가지고 놀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적인 면을 드러내 캐릭터 속으로 끌어들인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이후의 전개는 ‘마이클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는가’의 과정을 포함한다. 과거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보여 준다. 지금부터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마이클의 상태를 단계별로 나누어 코디 펀의 연기에 찬사를 보낼 차례다. 능력을 컨트롤할 줄 아는 정도와 더불어 큰 사건으로 인한 심리 변화에 따라 레벨이 업된다(다운된다고 해야 맞을지도). 이제껏 묘사한, 초반 화에 등장하는 마이클은, 마지막 단계, ‘수프림 마이클’이다. 헤어와 옷 스타일, 메이크업의 변화 만으로는 부족한 차이를 완성하는 것은, 배우다.

 “엄마는 잃고, 아빠에게 버려진 아이에 집중했어. 그게 마이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 그는 어린 소년이야. 주변 상황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변해…..마침내 마이클에게 들어가자, 주눅들고, 두려워하는, 감정적으로 결핍돼 있고 의존적인 소년이 느껴졌어. 어른아이manchild 말이야. 그때 마이클을 사랑할 수 있게 됐어.”
[코디 펀, 유튜브 GoldDerby 인터뷰]


첫 단계, ‘베이비baby 마이클’은, 정신은 어린 채 하룻밤 사이에 몸만 성인이 된 상태다. 내면에 어린애와 악마가 공존하며, 부조화를 이룬다. 아무렇지 않게 범죄를 저지른 다음, 순수한 눈으로 응시한다. 충동과 능력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절박하게 선해지려고 시도도 해보지만, 속에 있는 악이 가만 두지 않는다. 사실 이 단계는, 이야기가 한참 전개된 후 ‘저주 받은 집’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기억을 통해 묘사된다. 그래서 마이클의 서사 순이 아니라 화 순서대로 보는 시청자들은, 그의 급성장을 알게 된 후, 이전 화의, 악마와 어린애를 오가는 ‘보이 마이클’, ‘월록 마이클’(뒤에서 설명할 것이다.)의 모습들을 떠올리고 납득하게 된다. 코디 펀의 연기는 복선처럼 작용해, 퍼즐을 맞추는 짜릿한 기분이 들게 한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온 몸에 힘을 주고 콘스탄스의 목을 조른다. 피가 몰린 이마를 구기고, 이를 악물고 노려보며 협박한다. 뺨이 진동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확장되고 입이 벌어진다. 분노의 진동은 놀람의 진동으로 변한다. 정신이 팟 하고 돌아온 듯, 눈이 흠칫 손을 향해 내려가고, 힘을 풀고 몸을 벌벌 떨기 시작한다. 눈이 더 벌어지며 멍해진다. 눈동자가 무슨 세공 된 보석 같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Grandma?” 라고 뱉는다. 여전히 경직돼 떨리는 얼굴로 사과한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미안하고 놀랍고 스스로가 감당이 되지 않는다. 그런 혼란 속에서 쭉 지냈을 마이클이 안쓰러워진다. 그런데 다음 장면, 콘스탄스가 방문을 열자, 신부의 시체 옆에서 그가 침대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태연히 게임을 하고 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아니 아무 생각 없는 표정이다. 그냥 ‘할머니 왔어~’ 하는 듯, 슥 본다. 이번엔 섬찟하다.

소파에 늘어져 있는 콘스탄스를 발견한 마이클은 두 손을 머리로 가져가며 한 바퀴 돈다. 꿇어앉으며 내는 소리가 독특하다. 울음과, 아파서 ‘아’ 하고 내는 신음을 비음과 섞어, 끝을 올려 뱉는다. 충격과 슬픔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것이다. 콘스탄스는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마이클 입장에선 열 살 남짓인 자기만 두고 할머니가 자살한 상황이다. 잘못했다며 엉엉 울다, 벤의 말에 “I’m a monster.”라고 씹어 뱉는 옆모습이 너무나 안타깝다. 벤과 게임을 할 때의 미소는 순수하게 장난스럽다. 테이트에게 아빠처럼 되고 싶다며, 긴장해 몸을 좁히고 눈치 보듯 올려다본다. 테이트가 화내자 입이 쭉 나오며 눈물이 흐른다. 홱 침대에 돌아눕는다. 완전 상처 받고 삐진 아이의 행동이다. 이사 온 커플을 불태울 때도 눈은 그렁그렁하다. 단호한 손동작과 들어맞지 않는다. 주저앉아 올려다보는 눈은 강아지 같다. 대체 얘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마이클은 내면이 덜 자란 채 몸만 성인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쉽게 감정에 치우친다. 쉽게 상처 받고, 마음도 쉽게 준다. 사탄 숭배자들의 말에 넘어간 것도, 정말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해주고 챙겨 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과 함께하며 다음 단계, ‘보이boy 마이클’로 넘어간다. 선해지려는 시도를 포기한 ‘베이비 마이클’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사람을 찌르고, 가르고, 심장을 꺼내는 과정을, ‘저게 뭐야’ 라는 듯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지켜본다. 그 의아한 눈과, 심장을 받아 우아하게 오물오물 베어먹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사악한 눈은 다르다. 허나 여전히, 내면은 어리다. (이 사이 미드와의 관계를 설득하는 서사가 좀 부족했다.) 미드의 집에 있는 마이클은, 덜 자란 소년 같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민소매와 찢어진 진이 어울린다. 고개를 박고 음식을 먹으려다 미드의 꾸중에 고개를 꾹 숙이고 급하게 기도를 올린다. 농담에도 시니컬한 구석이 없고, 미소에도 숨김이 없다. ‘수프림 마이클’이 미드(로봇)을 대할 때의 분위기와 연결되면서도, 아련함이 없다.

미드를 무례하게 대한 정육점 주인을 해한 후 경찰에 끌려간 마이클. CCTV 영상 화면은 흐린 흑백이지만, 코디 펀은 장면의 색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힘을 잔뜩 준 채 벌벌 떠는 웅크린 몸과, 비음이 섞여 가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겁먹고 불안정한 상태를 드러낸다. 형사를 죽인 힘이 마이클에게서 나왔음이 거의 확실해도, 믿기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 데이비드 매드슨을 연기하던 그가 떠오른다. 유치장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아리엘의 입에서 나온 단어 ‘마법사warlock’에, 눈을 번뜩이며 벌떡 일어난다. 눈은 확장돼 있고, 뺨엔 눈물이 번져 있다. 겁을 먹었는데, 끊이지 않는 상황들에 지쳐 무서워할 여력도 없어 보인다. ‘누굴 해칠 마음은 없었다’고 말하는 얼굴은 엉망이고 혼란스럽지만,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데 잠깐. 풀려나 아리엘의 뒤를 따라가며 함박웃음을 짓더니, 아리엘이 경찰을 벽에 붙인 걸 보고 입을 쭉 올리며 매우 즐거워한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지 않게, 악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우그려 경찰을 죽인다. 뭘까 얜.


AHS 시즌8. imdb 이미지.


‘perfume of death 죽음의 향수’를 뿌린 것 같다는 미스티 데이의 표현은 적절하다. 마이클은 유령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죽음과 가깝다. 허나 비비안의 말대로 그 이상이다. (“어둠의 근원이 그의 아버지고, 그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러 왔어.”) 통제할 수 없는 힘과 욕구가 자기도 모르게 솟아난다. 미드나 아리엘 같은 이들은, 그것을 이용한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마법 학교에 적응한 ‘월록warlock 마이클’은 단정한 단발과 교복 차림이다. 긴장한 채 마법사들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시험과 함께 긴장은 풀린다. 힘을 쓸 줄 아는 자의 태도다. 거울을 노려보며 이마를 일그러뜨려 눈썹을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이미 파워가 느껴진다. 칭찬하는 이는 뿌듯하게, 비난하는 이는 날카롭게 노려본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곧게 서서, 팔을 무용하듯 천천히 펼친다. 눈은 치켜떠 흰자위가 보인다. 눈이 내리고, 마법사들이 감탄하는 찰나, 통제 불가한 힘이 발휘된다. 정육점에서처럼- 인상을 쓰더니 빙의라도 된 듯 눈을, 단순히 치켜뜨는 게 아니라 까뒤집는다. 몸을 훅 흔든다. 팔에 핏줄이 선다. 방이 얼어붙는다. 장난없다. 신들린 듯 코테즈 호텔을 그릴 때도 비슷한 느낌이다. 마법사들은 마이클의 마법에 걸렸고, 마이클은 스스로의 마법에 걸렸다. 그리고 나는, 코디 펀의 마법에 걸렸다.

마이클은 지옥에 갇힌 세일럼 마녀들을 찾아간다. 나긋나긋한 말투로 눈썹과 입꼬리를 올리며,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퀴니와 매디슨을 양쪽에 거느리고, 기절한 코딜리아를 내려다본다. 눈은 가늘게 뜨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채. 힘에 대한 욕구가 정말 마이클의 것인지, 아니면 사탄에 끌려가는 건지, 모호하나, ‘수프림 마이클’의 자태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좀 더 얕고 재수 없다. 어둠과 슬픔이 부족하다. 자신을 미심쩍어하는 존 헨리를 응시할 때는 굳이 하얀 악마 얼굴을 하지 않아도 악마적이지만, 미드를 대할 때를 보면, 여전히 덜 자랐다. 두 팔 벌려 깡충깡충 뛰어가 끌어안는다. 수장 후보의 멋진 망토가 신난 아이의 할로윈 코스튬으로 보일 지경이다. 마법사 마녀들을 쓸어버리네 어쩌네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해도, 그냥 칭찬 받고 싶어 하는 애 같다. 코디 펀은 소년의 얼굴에 강력한 어둠을 입혔다가, 다시 그 속에 숨어 있는 여린 소년을 끄집어낸다. 시즌1에서 테이트를 연기하는 에반 피터스가 그랬듯, 마이클에 대한 감정을 헷갈리게 만든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동화적인 배경 음악과 흑백 화면 효과 속, 일곱 가지 기적 시험을 치르는 모습은, 마이클의 능력과 매력을 드러낸다. 숨어 입을 가리며 키득거리거나, 순간 이동해 조이를 콕 건드리는 모습은, 장난스럽고 귀엽다. 허나 누워 주문을 외는 얼굴은 텅 비어 있다. 코디 펀이 나직하고 허스키한 소리로 낯선 언어를 중얼거리면, 주문에 걸릴 것 같다. 미스티의 지옥에서 악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두리번거리는, 돌아와 숨 가빠하면서도 손을 들어 괜찮음을 표시하는, 스티비의 노래를 감상하는 마녀들을 내려다보는 폼 모두, 완벽하다. 차기 수장 자리를 요구하는 얼굴은, 필사적으로 의기양양하다. 마법사들만 있을 때나 퀴니를 데려올 때의 오만한 자신만만과 달리, 경계가 덧붙었다. 마이클이 레벨 업 중이다. 미드의 방향을 따르지만, 전환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여지를 없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불탄 세 형상을 본 마이클은, 마지막으로 미드의 잔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눈부신 햇빛과 터져 나오는 눈물로 인해 얼굴이 찌그러진 채다. 입을 벌려 숨을 쉬다가, 마음을 다잡은 듯 다물고 손을 뻗는다. 떨리는 손이 탄 머리에 닿자마자, 불에 덴 듯 화들짝 뗀다. 입이 다시 벌어져 가쁘게 움직인다. 이성을 잃고, 입부터 가슴, 팔까지, 온몸을 있는 대로 쫙 펼쳐 절규와 함께 절망을 내뿜는다. 심장에 통증이 오는 듯, 수그려 가슴을 잡고 거친 숨을 뱉는다. 코딜리아가 말을 걸자, 뒤돌아 화와 슬픔이 끓어올라 건조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응한다. 미드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말에, 버티지 못하고 푹 무릎을 깔고 주저앉는다. 설득에 넘어간 듯, 애처로운 ‘베이비 마이클’이 되어 코딜리아가 뻗은 손을 잡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부은 눈으로 이를 악물고 협박한다. 이성과 함께 분노가 솟아오른 것이다. 코디 펀은 강한 감정을 뚜렷하게 폭발시키며, 악하게 레벨 업 될 마이클을 예언한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콘스탄스의 시체를 보고 혼란스러워 하며 잉잉 울던 내면의 아이는, 미드와 함께 불탔다.  ‘월록 마이클’은, 길을 잃은 ‘로스트lost 마이클’이 됐다. 내면이 고르게 성장하지 못하고 단기간에 불타 재가 돼 버린 상태다. 술에 취한 듯 휘청휘청 걸으며, 넥타이를 풀어헤친다. 눈을 내리깔고 혀를 움직여 입을 비뚤게 만든다. 정신이 나간 듯, 풀어지는 팔다리를 움직여 계속 땅을 긋는다. 상기된 얼굴, 시니컬한 어조로 ‘father’를 부른다. 자꾸 주체할 수 없이 화가 터져 나와 숨이 가쁘고 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어디 한 번 해보자는 듯 원 한가운데에 털썩 앉는다. 4일 후, 자꾸 환영이 보인다. 흐트러진 것은 겉모습만이 아니다. 감기는 눈엔 포기와 광기가 동시에 어린다. 여리고 약하다. 염소를 칼로 찌르는 얼굴은 단호하고 강하지만, 금방 다시 흐트러진다. 전처럼 몸을 쫙 펼치고, 쉰 목소리로 소리친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완전히 흐트러진 채, 마이클은 사탄 숭배자들의 교회에 들어간다. 몸은 비척거리고, 얼굴은 텅 비었다. 죄다 더러워진 가운데 눈만 빛나는데, 눈물이 뺨에 흘러내린 모양이 퇴폐적으로 예쁘다. 리더의 말을 듣다가, 한심스러운 듯 등받이로 푹 꺼지며 눈을 내리깔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이미 세상을 잃었는데 다시 조금 더 잃은 것 같달까. 옆 사람이 말을 걸자, 처음엔 퉁명스럽게 답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고, 애써 웃음 짓는다. 너무 진심으로 감동 받은 그 얼굴이, 보는 이를 감동시킨다. 신도의 집, 그녀의 속 빈 말에 다시 시니컬 해진다. 사탄을 외치는 이들의 교회 맨 뒤에 안티크라이스트의 현신이 앉았었고, 지금은 그 중 하나의 개소리를 참아 주고 있다.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 차분한 말투로 정체를 밝히고, 힘 빠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 마지막 순간 뭔가 결심한 듯 눈을 굴린다. 신도들 앞에서 우아하게 눈을 내리깔고 머리카락을 넘겨 표식을 보인다. 어긋남 없는 동작으로 두 사람의 목을 한번에 잡고 슥 벤다. 내가 사탄을 숭배하지는 않지만, 이 순간은 짜릿하다(물론 살인은 말고). 너희가 떠받들 존재가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일 줄은 몰랐지.


마이클은 쏠리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한다. 안티크라이스트, 사탄의 아들, 멸망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거부감으로 씁쓸해진다. ‘머리카락 만져도 되냐’는 말에, 인상을 써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반쯤 돌려 째려본다. 숟가락을 쥔 손에 움찔 하고 힘이 들어간다. 동물적으로 예민하다. 고양이 같다.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웃음기 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거리를 둔다. 자꾸 물어대자, 조용히 폭발한다. 공격적으로 내뱉다, 미드가 떠올라 북받쳐 울음이 삐져나온다. 코디 펀은, 악하게 안정된 듯 보이지만 한구석에는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안티크라이스트이기 이전 보호자를 잃은 소년에 불과한 마이클을 드러낸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미리엄 미드 2.0’의 완성과 함께, ‘로스트 마이클’은 ‘수프림 마이클’이 되기 시작한다. 먼저, 마녀 학교에 복수한다. 뒷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와, 나긋나긋하게 비꼰다. 역시 눈썹을 이용해 같잖음을 내비치고, 눈을 내리깔고 혀를 윗입술 아래에 넣어 독특하게 비열하고 또라이 같은 얼굴을 만든다. 코디 펀 특유의 악마적 표정들이다. 그러나, ‘미드 2.0’과 둘만 있을 때, 조바심 내며 의존하거나, 대선에 출마한다느니 하는 귀엽도록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면, 아직 ‘수프림 마이클’은 아니다. 내면의 아이가 완전히 불타지는 않았다. ‘세미 수프림semi supreme 마이클’ 정도로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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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들은 ‘미드 2.0’을 조종해 마이클이 세계 멸망을 주도하도록 유도한다. 열심히 약을 하며 약을 팔아대고, 약은 팔린다. 그 수에 넘어가는 마이클이 안쓰럽다. 사탄의 아들로 태어나 선택권도 없이 운명에 평생을 저당 잡혔던 마이클은 결국, ‘coked-out nerds 코카인에 찌든 너드들’에게 이용당해 세상을 날리기로 한다. 의심할 여지도 얻지 못하고, “Will it be enough to kill the witches? 마녀들을 죽이기에 충분한 양일까요?”라고 묻는 얼굴은, 정말로, 순수하다. ‘연합’을 만나기 전 긴장해 비꼬는 얼굴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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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앞에 선 마이클은, 조금 전의 긴장은 잊은 듯, 절제된 자세와 안정된 발성으로 좌중을 압도한다. 힘 있게 가면 하나하나를 응시하고, 손과 상체를 과하지 않고 카리스마 있게 사용한다. “Now it’s time to the Apocalypse. 이제 멸망의 시간입니다.”라는 대사와 함께, ‘수프림supreme 마이클’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수프림 마이클’은 속에 있는 악마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이끈다. 최종 목표를 세계 멸망(사실은 복수)으로 구체화 시켜, 박차를 가한다. 허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연기하는 듯 완벽했던 그의 모습들이, 정말로 연기였다는 것을. 사탄의 아들 운운하는 인간들의 온갖 기대에 등이 떠밀려, 위대한 안티크라이스트를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청자가 초반에 화면을 잡아먹었던 ‘수프림 마이클’에게 단순히 마음을 뺏겼다면, 이 시점에서는 뒷이야기를 전부 알게 되며, 결론적으론 청산돼야 할 존재인 마이클에게 마음을 쓰게 된다.


“초반 등장하는 마이클 랭던은, 다 장악해버리고, 칼 같이 정확하잖아. 자기가 뭘 원하고 그걸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지적으로,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힘의 최고치를 찍었고, 자신의 목적을 이해해. 그 이후, 시간을 돌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 주지. 만약 다 본 후 처음부터 다시 본다면, 마이클이 그렇게 모든 걸 장악하고 있지 않았구나, 코딜리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을거야.”

[코디 펀, 유튜브 GoldDerby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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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현재의 ‘수프림 마이클’이 재등장한다. 꼿꼿한 자세와 막힘 없이 리듬을 타는 말투로, 마녀들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미드 2.0’의 폭발과 함께 정자세로 쓰러지고, 매디슨의 총을 맞고 정신을 놓는다. 벽에 기대 팔다리를 대칭으로 뻗고,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꺾은 채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린 모습은, 마네킹처럼 완벽하다. 위쪽을 향해 있는 눈동자가 위층으로 올라간 코딜리아의 시선과 마주치는데,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섬뜩하다. 마이클은 곧 살아난다. 베이비돌 처럼 눈을 기계적으로 예쁘게 깜박이더니, 스스슥 일어난다. 손짓 한번으로 매디슨을 터트리고, 별 일도 아니라는 듯, 실눈을 뜨고 고개를 좌우로 꺾는다. 모든 동작은 느리게 절제돼 있다. 악하고 아름다운 터미네이터같다. 그냥 악한 게 아니라 아름답게 악해야 하고,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악하게 아름다워야 한다. ‘수프림 마이클’의 악과 미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자신만만하게 입을 씩 올리고, 마리 라보를 내려다본다. 팔을 강하게 뻗어 심장을 쥔다. 코코가 등을 찌르자, 천천히 뒤돌아 ‘니가 감히?’ 얼굴로 응시하며 칼끝의 피를 살며시 쓸더니, 나른하게 속삭인다, “Normally that’d work. 보통은 먹히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눈썹을 올려 흰자를 드러낸다. 쥔 심장을 꺼내며, 눈을 우아하고 사악하게 내리깐다. 씹어 속삭인다, “But I’m nothing like normal. 하지만 난 전혀 보통이 아니야.” 그리고 심장을 베어 무는데, 우아하지만, 전과 같은 오물오물은 아니다. 맹수가 사냥감을 뜯어 먹는 뉘앙스다. 혀를 굴려 피를 맛보고, 눈동자를 빠르게 위로 굴린다. 심장을 한 손에 든 채, 다른 손을 정확하게 튕겨 코코를 죽이고, 뒤로 돌려 등에 꽂힌 칼을 뽑는다. 몸의 비틀림도, 표정의 비틀림도, 신음의 비틀림도 심상치 않다(gif 많이 돌아다니니 직접 보시라). 분노와 통증이 있지만, 귀찮은 정도로 보인다. ‘미드 2.0’이 파괴된 후, 그의 파괴욕은 통제할 수 없는 크기가 됐다. 허나 코디 펀은 빠르고 크고 정신없게 폭발시키는 대신, 마이클의 원래 리듬대로, 천천히, 절제해서, 시니컬하게, 그러나 정신은 살짝 놓은 채 움직이고 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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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은 칼을 들고, 코딜리아와 마주서 비꼰다. 차분하게 공격적이다. 허나 코디 펀은 힘을 조절한다. 절박하게 이를 악물고 울먹이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코딜리아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도록. 장면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이다. 중심은 코딜리아에게 있고, 마이클은 지게 돼 있다. 칼을 뺏기자 움찔 하고, 코딜리아가 스스로를 찌르자, 입과 눈이 확 벌어진 채 굳는다. 마이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사라져버렸다. 맛이 갔다. 필사적으로 달려가며 “No!”라고 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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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딜리아의 죽음과 함께 힘을 얻은 맬러리는 시간여행에 성공한다. 신부를 죽인 마이클이 ‘할머니 왔어~’ 얼굴을 하는 순간으로 돌아간다. 콘스탄스가 화내자, 금방 눈물이 고이며 뒤로 물러서고 몸을 꼰다. 울먹이며 코가 맹맹해져 사과하고 빈다. 콘스탄스가 큰 소리를 낼 때마다 움찔거린다. 나가라는 말에 무릎을 꿇고 할머니를 끌어안은 채 절박하게 빌다, 목을 조르는데, ‘조르다 말다’에 가깝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표정이 악해졌다가 약해졌다가 한다. 손을 풀고 운다. 재킷을 팩 집어 들고, 문을 나선다. 정처 없이 두리번거리는 얼굴엔 눈물이 얼룩져 있다. 눈은 공포로 갈피를 잃어 어리둥절하다. 완전 ‘길 잃은 어린양’이다.


맬러리가 그를 차로 친다. 밟는다. 반복한다. 마이클은, 상황을 파악할 틈을 주지 않고 굴러오는 바퀴에 이리저리 치인다. 코디 펀은, 굳어 숨도 제대로 헐떡거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심장 박동이 그에게 쏠리도록 만든다. 콘스탄스의 팔에 안겨 마이클은 죽어 간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둡고, 아프고, 무섭다. 잔뜩 주름진 이마, 다물지 못하는 입, 창백한 뺨, 할머니를 필사적으로 올려다보는-자꾸 초점을 잃고 몰리는 눈. 숨이 꺼져 가는 가운데 겨우 목을 쥐어짜 애원한다. 마지막으로 짜낸 ‘please’에, 가슴이 아리고 자동으로 눈물이 나온다. 냉정하고 슬픈 “Go to hell. 지옥에나 가.”을 뱉고 콘스탄스가 떠나자, 마이클의 숨은 절망할 여유도 없이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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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체>에서 코디 펀은 앤드루에게 붙잡힌 데이비드를, 미친 듯 공포를 표출하는 대신 굳어버린 모습으로 표현했다. 죽는 장면을 비롯해, 마이클에게서도 비슷한 포인트가 종종 짚혔다. 때론 마구 폭발시켜 충격을 주는 법보다, 정적으로 집중하는 방식의 연기가 더 마음을 흔들어놓곤 한다. 자세한 묘사가 너무 구구절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허나 코디 펀이 그려낸 마이클은 그럴 가치가 있을 정도로 특별했다.  

“사탄의 아들은 사랑 받지 못했어. 그냥 통로였을 뿐이야….난 그때 한 소년,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이해되지도 않고 자기한테서 나온 것도 아닌 성향을 지닌 소년으로 살고 있었으니까. 어떤 종류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을 거야. 물론 매우 폭력적인 분열증이지, 정당화하는 건 아니야. 그치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잖아. 모두가 그를 버리고,  떠나. 콘스탄스는 집에서 쫓아냈고, 그 다음엔 모두가 그를 이용해먹었지.”
[코디 펀, 유튜브 GoldDerby 인터뷰]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 신과 인간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인간 그리스도’를 그린 작품이다. 깊이도 성격도 다르지만, ‘아포칼립스’는 사탄과 자아 혼란 사이에서 갈피를 잃은 ‘어린애 적그리스도’ 마이클 랭던을 그린다. 버림받거나, 대상화 당한다(미드조차 그가 안티크라이스트였기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사탄 추종자들을 만나기 전에 코딜리아를 만났다면 좀 달랐을까.). 상실을 통해 사탄의 욕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마이클 스스로의 입장에서 설득 시키며, 서사에 난 구멍까지 메우는 것은, 코디 펀이다. 때로는 완벽한 외면에, 때로는 소용돌이치는 내면에 집중한다. 낯선 악마의 얼굴이었다가, 다시 낯익은 소년의 얼굴이 된다. 그 둘을 적절히 섞어 시청자의 마음을 풀었다가, 조였다가, 터트린다. 섬찟하게 했다가, 설레게 했다가, 다음 순간 찢어놓는다.


AHS 시즌8. imdb 이미지.


* 참고 인터뷰 

https://youtu.be/Oa9it51IUcc


* 해석

https://m.blog.naver.com/yonnu/221707697648


왜 또 저번 ‘낯익은, 낯선.’을 쓸 때처럼 글을 다 쓰고 인터뷰를 틀었을까? 코디 펀 인터뷰 영상은 보물 상자라는 것을 또 잠시 잊고 있었다. 중간에는 맥락에 어울리는 문단 몇 개만 끼워넣고, 나머지는 덧붙인다. 중간중간 생략한 부분도 있다. 내가 쓴 바와 비슷한 설명들을 듣고 공감하며 뿌듯해하기도 했으나, 어쨌든 내 해석보다는 이 인터뷰가 코디 펀의 마이클 랭던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베르사체 인터뷰 때도 느꼈는데, 코디 펀의 답변은 항상 매우 알차다. 때론 정치적이나 철학적으로, 상황을 넓게 이해하고 캐릭터에 깊게 파고드는 것 같다.


글 구성에 참고가 된ㅋㅋㅋ 이미지. 인스타그램 @the_antichrist_langdon


+ witch: 마녀/ wizard: 마법사/ 처럼 warlock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어 할 수 없이 마법사라고 썼다. 영어 해석은 ‘a male witch or demon 남성 마녀 혹은 악마’던데. ‘마남’은 너무 인위적이고…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yonnu201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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