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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디톡스

by 요니

나는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물 마시듯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고, 스크린캡처를 한다. 메모만큼 정리는 잘 못 한다. 디지털 기록 앱인 '업노트'에는 2,500개의 메모가 있다. 그뿐인가, 책상 옆에는 이미 지나버린 일력 뒷장에 써놓은 메모 묶음이 벽돌책 두께만큼 된다. 십 년 동안 쓴 몰스킨 노트는 사과 박스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휴대폰 사진첩은 처참한 수준이다. 휴대폰에는 14,000개의 사진과 동영상이, 800장의 스크린샷이 있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자 세포 분열하듯 늘어났다. 가장 오래된 사진은 2017년 3월 20일에 찍었다. 이후로도 사진첩은 한 번도 정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기록 관리에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컨드 브레인>, <제텔카스텐>, <쏟아지는 일 완벽하게 해내는 법 GTD>와 같은 메모 정리법에 대한 책은 보이는 대로 읽었다. 미니멀리즘 자체에도 관심이 있어 <모두 제자리>, <설레지 않으면 모두 버려라> 같은 제목만 발견해도 손에 집었다. 책을 읽고 메모를 보관하는 나름의 방법을 갖춰 놨지만 시간이 흐르면 별 효과가 없었다. 수납함은 무인양품이지만 그 안에 뒤죽박죽 섞인 옷이 담겨 있는 것 같달까. 한편으로는 기록 정리를 하더라도 티 안 나는 집안일같이 느껴져 미루기도 했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가장 컸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어제 기록 디톡스 세미나를 온라인으로 들었다. 평일 낮에, 그것도 기록 정리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제법 많았다. 사진첩은 항상 100장 이하로 남긴다는 강사의 말에 입이 벌어졌다. 자신의 메모장을 보여주며 이런 식으로 관리하면 편해요 하는 예시를 보여줄 때는 볼펜을 든 손이 바빴다. 생각해 보니 나는 글로 쓴 것들은 어떻게든 정리를 해 보려고 했지만, 사진첩은 아예 정리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강의가 끝날쯤 나는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우선은 컴퓨터를 켜 업노트를 열었다. 미분류된 메모들을 폴더에 넣고, 더 이상 필요 없는 메모들을 지웠다. 방에 뒹굴어 다니는 휴지나 쓰레기를 주의 깊게 손으로 줍는 기분으로 하나씩 살폈다. 가장 정리가 안 된 최신 폴더는 '임신/육아' 폴더였다. 작년에 모아 둔 육아 용품 리스트, 신청해야 할 일들, 또 캡처된 정보들이 수두룩했다. 도움이 된 것도, 별로 도움이 안 된 것도 있었지만 그때 참 필사적이었군 싶었다. 기념으로라도 남겨 놓을까 싶다가도, 언제 또 보겠냐 싶어 관뒀다. 단축키를 누르는 게 손에 붙을 때쯤 배에서 소리가 났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알림장 알람이 울렸다.


오늘 아이는 박스로 만든 통로를 기어 다녔고, 갈색과 초록색 긴 색종이를 손에 쥐며 놀고 있었다. 나는 16장의 사진을 모두 저장했다. 그리고 어린이집으로 걸어가 아이를 데려왔다. 날이 좋아서 다시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고, 셀카를 아이와 남겼다. 저녁을 같이 먹고, 아이를 씻겼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세미나에 오는 사람들의 휴대폰에는 사진 5만 장이 평균이라고 한 강사의 말이 떠올랐다. 14,000장 정도면 양호한가 싶다가도 끝없이 내려가는 스크롤에 눈이 아팠다. 일단 스크린샷 폴더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900장도 무시무시한 숫자지만 그래도 본 게임에 진입하기 전의 튜토리얼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맨 끝까지 스크롤을 내리고 하나씩 열어 봤다. 언제 이런 걸 저장했나 싶을 정도로 낯선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 번에 다 지워 버리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차근차근 삭제 버튼을 눌렀다. 어느 정도 지우다 보니 나의 저장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어 단어, 맛집, 책, 영화, 와인과 위스키, 음악 정보는 제법 돼 리스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매 영수증이나 예약 내역 같은 건 이미 기한이 다한 정보이니 모두 지웠다. 카테고리화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따로 메모로 만들어 목록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정보를 찾느라 고민 안 해도 될 만큼 풍족하다. 스크린샷은 53장 남았다.


휴대폰 스크린 타임은 6시간이 넘었고 자정이 다 되어 갔다. 졸리지만 이왕 하는 김에 계속 정리하고 싶어졌다. 나는 14,000장이 담긴 사진첩 폴더를 열었다. 전처럼 필요 없는 정보는 모조리 지우고, 사진도 비슷한 구도로 찍은 사진은 A컷 딱 하나만 남기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저장한 아이의 사진을 보고 멈춘다. 모든 표정이 A컷이다. 웃어도, 울어도, 찡그려도, 눈을 감아도 A컷이었다. 앞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의 사진을 한 장씩 넘기기만 한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담긴 동영상을 재생했다. 아이가 응애 하고 운다. 나는 휴대폰을 닫았다. 아무래도 아이 사진은 디톡스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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