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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오늘 더 다정한 사람이 되자

by 요니

글을 쓰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는데, 눈앞에 동그란 임산부 배지가 보인다. 핑크 테두리 안에 '임산부 먼저'라는 문구 옆에는 배에 하트가 그려진 여자가 눈을 감고 웃고 있다. 작년까지 늘 갈색 버킷백에 붙어 있었다. 보건소에서 받았을 때 이미 색이 노랗게 바래진 배지를 들고, 가방에 달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사실은 저 임산부예요' 하고 표를 내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스스로 '보호해 주세요' 하고 광고하는 듯했다.


장롱면허인 나는 운전을 못한다. 대개는 같은 회사인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근하는데, 일정이 맞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10km밖에 되지 않지만 길이 막혀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지하철에다 버스까지 타야 했기에 걷기도 많이 걸어야 하니 배지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방에 넣어둔 배지를 꺼내, 모퉁이에 달고 처음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지하철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임산부 좌석은 차 있었다. 괜히 민망해 임산부 좌석이 없는 칸으로 가서 서 있는데 한 중년 여성이 깜짝 놀란 듯 일어서더니, "여기 앉으세요"라고는 말하고 선뜻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빈자리에 앉으며 그 여성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되풀이되었다. 남편에게 '나 처음으로 자리를 양보받았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며 자랑을 했다.


이후에도 지하철에서 자주 자리를 양보받았다. 임신했을 때의 몸은 대단히 힘들기 때문에 앉아서 가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10킬로 넘게 불어나자 계단을 한 칸 오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느꼈다. 왜 배지가 필요한지도 차차 알아갔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었다.






가끔 세상에서 오롯이 혼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런 작은 손길들을 떠올린다. 물론 같이 아이를 양육하는 남편도 있고, 주변에 시댁, 멀지만 친정도 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열심히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맡는 남편의 존재는 누구보다 든든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느슨하지만, 넓게 퍼진 상냥함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한결 더 편해진다.


출산 예정일이 지나 유도 분만을 했을 때,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없었다면 낳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의 머리가 보여 힘을 줘야 하는 순간,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다. 처음 느껴보는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그때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이 돕지 않았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출산 후, 아이가 태어나고 병실로 돌아갈 때 간호사 분의 다정한 말과 손길이 기억난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해도 부족한, 다정함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너덜 해진 몸도 산후조리원에서 조금이나마 회복했고, 이후에 산후 도우미분 덕분에 부족한 잠을 채워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린이집 선생님 덕분에 글도 쓸 수 있고, 육아휴직이 끝나면 일터로 복귀할 수 있다. 이런 도움의 손길들이 없었다면, 진작에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잘 자랐다는 건방진 생각을 자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고, 그 이후로도 자취를 계속했으니 독립심도 강하다고 여겼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해 경제적인 독립마저 이루어냈을 때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이뤄냈다는 자만에 빠져 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아이를 돌보며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얼굴이 빨개진다. 스스로 잘 자라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 자체는 내 노력보다 주변의 손길이 더 컸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부모님이지만, 순간순간 알게 모르게 닿는 도움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음을 이제는 안다.


손에 든 배지를 서랍에 고이 넣어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세상에 다정해지길 바란다. 올해 목표가 글 몇 편 쓰기, 얼마 모으기가 아닌, '어제보다 오늘 더 다정한 사람이 되자'로 정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받은 것보다 더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산부 배지에 그려진 하트만큼이라도 온기를 보탠다면, 세상은 그런대로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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