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속 심리학] 영화 <어쩔 수가 없다>와 '도덕적 이탈'
제지 공장의 베테랑 기술자 만수는 아내와 두 아이들,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어느날 만수는 25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회사 측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는 평화롭던 그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듭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집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절박해집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은 이내 기괴한 방향으로 뻗어 나갑니다. 재취업을 위해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죠.
만수가 총을 들고 누군가를 겨눌 때, 그는 괴물이 되기로 작정한 악당의 표정을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가장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는 처연하고도 정당한 표정을 짓습니다.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취업하겠다‘는 그의 다짐은 얼핏 비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는 폭력을 살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재정의합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상충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심리적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심리적 기제를 '도덕적 이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상황이나 목적을 앞세워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심리적 기술입니다.
이 심리적 기제의 가장 무서운 점은 목적이 숭고할수록 수단의 잔인함에 눈을 감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만수에게 '가족의 생존'이라는 목적은 너무나 정당했기에, 그 과정에서 타인을 제거하는 행위는 악행이 아닌 희생이나 결단으로 미화됩니다. 하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을 나와 같은 인격체가 아닌 '내 목적을 방해하는 장애물'로만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부터 우리의 도덕적 감각은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마비가 무서운 이유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뎌진 발바닥은 가시밭길조차 평지로 착각하게 만들어 자기 발이 망가져 가는지도 모르게 만듭니다.
결국 만수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그토록 원하던 자리를 차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승리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존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했을 때가 아니라, 내가 믿는 가치와 내 행동이 일치할 때 단단해지기 때문입니다. 수단을 정당화하며 얻은 결과물은 내면의 가치 체계를 무너뜨린 대가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승리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자신이 혐오하던 괴물과 닮아버린 자아를 마주해야 하며, 그때 찾아오는 감정은 승리의 환희가 아니라, 깊고 고독한 자기 소외와 공허감입니다.
만수는 가족을 지키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내뱉은 변명들은 그를 가장 참혹한 심리적 지옥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가 내뱉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마주하기엔 불편한 다른 선택들을 가능성에서 지워버리려는 변명일까요?
감각이 사라진 곳에서는 추락조차 비행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며 자신의 영혼을 한 조각씩 떼어 지불한 대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자아의 상실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지옥은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변명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벽 안에 갇혀버린 바로 지금의 내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의미는?
- 알버트 반두라가 제시한 개념으로 도덕적 기준을 가진 보편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정당화하는지를 설명하는 심리학적 기제로서, 스스로가 설정한 도덕적 기준을 특정 상황에서 적용하지 않도록 인지적으로 재구성하여, 비도덕적 행동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로 인한 심리적 영향은?
- 자기 합리화: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의 행동을 '더 큰 선(예: 가족의 생계)'을 위한 것이라고 미화합니다.
- 책임 전가: 상황이나 타인에게 책임을 돌려 개인의 가책을 줄입니다.
- 비인간화: 대상을 숫자나 도구로 간주하여 가해의 고통을 무디게 만듭니다.
*일상에서 이런 모습을 나타나기도 해요.
- 직장 내 부당한 관행을 따르며 '위에서 시킨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 온라인에서 타인에게 비난을 쏟아내며 ' 정의를 구현하는 것뿐'이라고 정당화하는 경우
*건강한 방향성은?
- 내가 내린 결정 앞에 '어쩔 수 없다'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것이 정말 불가항력인지 아니면 편리한 회피인지 자문해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