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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May 21. 2024

<메이 디셈버>, 아름다운 착취와 채집의 왕국에서

36세의 결혼한 여성이 파트타임 잡을 하다 만난 13세 소년의 아이를 임신한다. 들키자마자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은 스캔들의 당사자들은 서로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여성은 아동강간 혐의로 기소되고 결국 감옥 안에서 첫 아이를 낳는다. 출소 후 그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또 낳고 이웃들에게 “really beloved part of the community”라는 극찬을 들으며 모범적 부부처럼 행복하게 살아간다. 아동 강간 피해자로 불리기를 거부했던 소수 인종(영화 속에선 마을의 유일한 한국계) 소년 조는 이제 부인이 자기를 처음 만났던 나이가 되었고, 아직도 아리따움과 순수함을 간직한 문제의 여자 그레이시는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세기말 미국을 뒤흔들었던 교사 메리-케이 르투어노와 소년 푸알라우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는 12년을 살고 이혼한 실존 인물들과 달리 23년 간 해로하는 부부의 평온한 일상에 이야기의 시작점을 둔다. 그 시작은 그 누구도 예견치 못했던 결말 - ‘happily ever after’ - 이기에 더욱 기이하고 이질적이다. 유명한 스캔들을 ‘또 한 번’ 영화화하는 작업 중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된 아름다운 배우 엘리자베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더 가까이에서 알고 싶다며 조심스레 일상으로 찾아드는데, 이 노련한 배우 역시 자신이 기대했던 바와 사뭇 다른 그레이시의 행복을 보고 불편함을 숨기지 못한다.



모순과 비밀을 연기하길 즐기는 베스는 아동강간 전과자에게서 죄책감으로 주눅 든 모습이 아니라 밝고 단란하고 아리따운 - 사실은 나이에 비해 좀 지나치게 아리따운 - 소녀 혹은, 마치 젊은 마사 스튜어트와 같은 교외의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렇게 평한다 :

사람 내면엔 해소되지 않는 게 남아서 매일 쌓이기 마련인데,
저 여자는 어떻게 매일 새 출발을 하는 거지? 후회도 의심도 없이 말야…

우스운 것은 베스 역시 남자친구를 멀쩡히 두고도 아내가 있는 영화계의 늙은 남자와 불륜 중인 정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원하는 걸 확실히 알고’ ‘변명하지 않는’ 면이 매력적이고 “내면에 조금의 분노도 없는 것처럼” 아리땁고 밝다고 말해지는 그레이시를 베스는 ‘이상한 여자’라고 경멸하면서도 그레이시와 완전히 동일시를 이뤄 완벽한 연기를 해내려는 욕망을 키워간다. 젊은 나이에 노출 연기를 감행한 ‘바로 그 여배우’에서 벗어나 전설의 반열에 올라서고자 계산을 마친 베스는 그들 부부를 질료로 삼겠다는 폭력적 야심을 숨길 생각조차 않는다.


그런 베스와 그레이시는 서로의 거울처럼 닮은 존재다. 범죄자로 잡지에 오른 사진에서조차 완벽하게 아름다운 형태와 포즈를 ‘기획’한 듯 보이는 그레이시와, 그레이시에게 가닿기 위해 그다지 관심도 없는 조를 유혹하고 그의 매력을 납득하기 위해 기어이 정사를 치르는 베스. 딸들을 팻셰이밍하고 남편을 여전히 학생처럼 부리며 가족들을 완벽히 통제하려 드는 그레이시와, 언제나 조금 판단을 늦추는 척 머뭇거리며 신중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원하는 걸 모두 얻어내는 데에 매우 능숙한 베스. 매일 아침 새 출발을 하는 그레이시와, 연기 워크샵에서 남학생이 베드씬에 관한 질문을 빙자한 성희롱을 가하자 “나는 매번 그 리듬에 나를 맡기려고” 하며 연기한다고 ‘우아하게’ 대답한 베스. 이들은 부정할 수 없이 대칭적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레이시는 과거에 대한 완전한 외면을 터득해 끊김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치고는 드문) 사람이고, 베스는 타인의 것이든 자기의 뿌리든 ‘과거’의 힘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관념적인 집착을 아직 다 놓지 못한 상대적 젊은이란 점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성을 인질 삼는 가부장제의 도덕적 관습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베스에겐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베스는 드레스샵의 수많은 거울에 반사된 그레이시의 수많은 상을 모두 포획하는 데에 결론적으로 실패한다).


그레이시는 맹수나 폭군에 가까운 본성을 숨기고 폭력적 미디어가 안겨준 상흔과 통제적 원가족에 의한 트라우마, 편집증으로 외면을 감싸 가녀린 소녀로 치장한다. 그는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조지의 친구였던 남편을 자연스레 아들처럼 ‘훈육’하는데 여전히 그 통제에서 벗어날 방법을 잘 모르는 조는 허둥대고 쩔쩔매며 그레이시의 ‘계략’에 넘어가는 연약한 소년처럼 그려진다. 이 모든 것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베스는 아직 어리고, 엘리트인 부모가 공들여 키운 중산층 여성으로 그 자신도 엘리트로 자라났고,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현대적 가부장제의 명령에 더 순응적이기 쉬우며, 바로 그 지점에서 그레이시의 압도적으로 당당한 권위 - 필연적으로 타인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류의 야만적인 권위-를 아직 취득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베스는 현실 세계의 힘과 질서가 완전히 역전된 그레이시의 가정(조의 가정은 분명히 아닌)을 남몰래 동경하고, 무식하리만치 직접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그레이시의 (남자들과 같은) 뻔뻔함에 차차 동화되는 것만 같다. 기어이 그는 자신과 조가 바깥에서 아주 잠깐 이야기하는 것도 못 견뎌 집 안에서 감시하다 불을 환히 켜고 남편을 불러들인 그레이시를 모방하며, 자기가 머무는 집으로 조를 불러들여 불을 환히 켜두고 관계를 맺는다.


토드 헤인즈가 재구성한 이 서사에서 과거를 감당하고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며 ‘재건’을 꿈꾸는 이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이용당하는 조뿐이다. 그가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방사선사로 일하며 번데기가 무사히 부화하도록 돌보는 취미를 가졌고 낡은 집의 리모델링 재방송을 하염없이 돌려보는 남자라는 설정은 대단히 상투적이면서도 정교히 계산된 방향성을 띤다. 조는 같은 취미를 가진 SNS 친구나, 동갑이면서 섹슈얼한 텐션을 한껏 불러일으키는 베스 같은 또래 여자와의 대화 그리고 성적 교류에 남몰래 목말라있다. 23세 연상의 아내가 사춘기 소녀 뺨치는 히스테리 증상을 전시할 때는 조용히 욕을 하고 입술을 짓씹곤 한다. 아들의 대마를 빌려 피우다 “한 번도 피워본 적 없”다고 고백하며 아들 품에 안겨 울고 자기가 잃은 과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휘청거리기도 한다. 즉 토드 헤인즈의 관점에서 조-빌리 푸알라우는 (실제로 당사자가 그것을 원하냐 원치 않느냐와 무관하게) ’마땅히‘ 탈출을 갈망해야 하는 인물이다. 쫓고 쫓기는 베스와 그레이시의 관능적 사냥에 관해서는 시종일관 무거운 비소를 유지하는 토드 헤인즈가 유일하게 따스하다 할 만한 시선을 보내는 인물 역시 조(와 그의 죄 없는 아이들)이다.




아마도 (앙상한 만듦새에 비해 너무 비대해진 논란으로) 불후의 문제작이 될 뤽 베송의 <레옹>, 원작의 사갈시와 너무 멀어진 애드리안 라인의 <로리타>, 역시 특정 부분에서 원작의 연대 의식과 어긋났다고 질타받던 이상일의 <유랑의 달>, 그리고 보다 가까이에는 도덕적 논쟁을 영악하게 피해간 <도깨비>나 <나의 아저씨>까지. ‘사랑했지만 섹스하지는 않았으므로 아름다운 플라토닉의 영역에 머물렀다’, ‘둘 다 (간신히) 성인이었으므로 합의에 의한 관계다’, ‘섹슈얼한 충동을 느끼는 것과 실제로 섹스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부성애나 가족애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다채로운 변명 사이 <메이 디셈버>는 모티브가 된 사건처럼 본질을 둘러가지 않고 정면돌파한다. 13세 남성과 36세 여성 사이에 그 어떤 것도 아닌 온전히 애욕에 의한 섹스가 있었고, (그래서) 법적 단죄 이후 이들이 책임져야 할 아이를 핑계로라도 다시 결합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이는 토드 헤인즈의 관심사가 이 이야기의 진실, 즉 그레이시와 조가 어떻게 ‘사랑’을 시작했는지, 또는 그레이시가 조를 어떻게 그루밍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에 가있지 않(은 척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에게 진실은 진실을 찾아가는 줄타기의 긴장감을 주는 기능으로서만 중요하다. 진실은 어차피 아무도, 심지어 진실에 가장 근접했다고 믿어지는 당사자마저도 - 그것을 죽어라 외면하며 벌써 잊어버렸든, 그 당시에 현상을 제대로 해석할 만한 능력이 없었든 - 모르는 것이라는 게 <메이 디셈버>의 지론이다. 토드 헤인즈는 대신 ‘참됨’을 포착하려는 영화적 시도가 어째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탐구하면서, 베스가 진실을 감히 온전히 알 수 있다며 덤벼드는 과정 전반에 불편한 소음과 분명한 냉소의 시선을 깔아둔다.


결말의 촬영장에서 베스는 결국 그토록 염원하던 진정성, 정수, 참된 경지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조악하고 난잡한 가장무도회에 가까운 연기에 그치고 만다. 그가 거부한 ‘진짜 소년’인 배우들 대신 과하게 섹슈얼리티가 부각된, 소년보단 청년에 더 가까운 배우가 그의 발치에 누워있고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베스는 작은 암컷 뱀을 목에 두른 채 소년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보다도 3류 포르노에 가까운 이 필모그래피가 베스를 명배우로 만들어줄 역작이 될리는 만무하다. 그간 미디어가 지겹도록 그려낸 그레이시의 (왜곡된) 단면을 또 한 번 재현한 것에 불과한 탓에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다.


그런데 사실 조가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며 몰래 전해준 연애 시절 그레이시의 편지를 읽은 후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완벽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전적이 있다. 그때 그는 거울 속 ‘그레이시’를 보며 방금 전의 허접하기 짝이 없는 (조와의) 정사가 전해준 반쪽짜리 오르가즘에 비할 바 없는 쾌감을 느낀다. 이 낙차 때문에 더 참혹한 결말의 영화적 실패는, 진실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집착하는 일의 위험을 말하기 위해 전투적일 정도로 거칠게 부딪혀온다. 토드 헤인즈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심지어 그가 ‘될’ 수 있다는 창작자/배우의 오만한 믿음에 경종을 울리려는 것만 같다. ‘토드 헤인즈가 아니면 안 된다’며 그를 감독으로 낙점했다는 제작자이자 주연 나탈리 포트만 그 자신이 아동 성적 대상화를 넘어 성착취에 가깝다고 비판받은 영화로 유명세를 얻고 또 홍역을 치렀던 여성 아역 배우 출신임을 생각해본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 영화를 찍는 배우 엘리자베스와 현실의 나탈리 포트만 사이 경계는 여러 순간 의도적으로 흐려지고 있다. 그렇게 영화 바깥의 한 겹을 더 입으며 비로소 메타적 의미를 취득하는 영화가 완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연기하는 이가 아닌 보는 이로서 우리는 감독과 배우가 의도적으로 피해 간 것들에 대해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위에 거론된 작품들의 정확한 반전과도 같던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 역시 성인 여성과 남아의 섹스 없는 성애를 다루었지만, 아이가 ‘무사히’ 성인기로 진입하고 어른 여자는 다시 홀로 남아 외롭게 늙어가리란 결말을 확언하기에 관객은 영화가 되려 씁쓸하고도 건강한 역전성을 지향한다고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이 성별 반전된 기이한 로맨스는 우리 눈에 어른 남자 - 어린 소녀의 그것만큼 익숙지 않다. 대중문화에 일정 부분 침투/포용되어 꽤 정례화되고 일정한 규칙, 도식, 관례, 표본을 갖게 된 ‘로리타’와 ‘나의 아저씨’ 간 관계성과 달리, <아무도 모르게>와 <메이 디셈버>는 그 ‘로맨스’를 로맨스로 만들기 위해 감정의 당사자들이 ‘드묾’과 ‘낯섦’ 자체와 먼저 싸워야 한다.


나이 많은 남성 - 어린 여성의 관계는 쉬쉬하며 용인하나 반대의 관계는 화들짝 놀라고 이내 조롱하고 물어뜯는 사회에서, 이들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관계를 안정화하기 위한 룰을 처음부터 하나씩 일일이 쌓아올려야 한다. 당사자들이 끊임없이 진실된 사랑의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익숙한 윤리로 재판하려던 타인-대중은 얼떨떨해지고, 스스로 가해/피해 사실을 규명하는 인물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역시 아무도 그들을 구제할 수 없다. 밟을 전철이 없는 관계로 2인 간 유대, 결속력, 고립감, 불안과 보상 심리만 극대화되기 쉽다. 그레이시가 군인 오빠의 말을 인용하며 “질서가 곧 보상”이라 말한 것은 바로 이런 관계의 시작점에 대한 묘한 암시를 남긴다. 조가 “그레이시는 절 봤어요”라고 말한 후 황급히, 그러나 확신 있는 어조로 “제가 그걸 원했어요”라고 덧붙이는 것 역시 의미심장한, 그러나 비극적인 울림을 준다.



토드 헤인즈는 판단을 유보하는 체하면서도 조에 대해서만큼은 의심 없는 온정을 할애하는 것으로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의 결정이란 이 소년의 유예되고 빼앗긴 성년기에 대한 애도로써 조에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인데, 사실 현실의 푸알라우는 2017년 메리 케이 르투어노와 이혼하긴 했지만 2년 후 전 부인이 암으로 죽어갈 때 자식들과 함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영화 밖 푸알라우의 ‘진짜 이야기’로서 다시 모든 것이 미궁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레이시의 첫아들 조지가 베스에게 폭로한, 그레이시가 어린 시절 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당사자에 의해 전면 부정되며 베스를 혼란에 빠트린다. 그것이 어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고 그레이시가 자기 장기인 외면으로 현실에 충실하게 상처를 회피하며 살아왔을 수 있겠다는 ‘다른 가능성’이 또한 푸알라우의 ‘진짜 이야기’로 인해 점화된다. 안타까운 것은 영화가 동시에 그레이시가 무력한 조에게 “네가 날 유혹했잖아!”하고 악쓰는 황당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를 완전한 악녀, 그루머, 범죄자의 위치에 고정시킨다는 점이다. 그렇게 영화는 혼란을 위한 혼란을 창조하며, 끝까지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고 확신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그들)는 다만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전생애적 투쟁 중에 대중-관객에게 목격당했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불행 그 자체보다 불행을 목격당하고 내가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란 타인의 오만에 침범당한 것이 그들의 근원적 문제가 된다(조 역시 최초에 그레이시에게 그렇게 ‘목격’당했으므로). 그런 ‘잘못’은 누구나 누구에게든 행할 수 있다는 경고 정도가 영화의 가장 확고한 제언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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