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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Sep 14. 2024

<한국이 싫어서>, 왜 싫은지 말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4/09/10 여성신문 리뷰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이길 수 있는 세계를 찾아 헤맨 것 같다. 어리고 가진 것 없는 여자라는 조건만으로 이미 시작도 전에 두들겨맞고 완패한 싸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순간을 즐겨라’ 따위 여유로운 슬로건은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은 이후에야 자격이 주어지는 사치 같았다. 그런데 아등바등 버티기만 하다 보면 꼭 밤마다 근본적 의문이 든다. 이렇게 30년쯤 버텨서 목표하던 자리에 오르고 나면 그땐 내가 행복이 뭔지, 여유가 뭔지 기억하고 있을까?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영화는 순간의 행복에 충실하라는 제언을 향해 착실히 나아간다. 주인공 계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자에게 먹히는 가젤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의 운명을 거부하고 사시사철 따스한 호주로 이민을 시도한다. 첫번째 출국이 도피였다면, 산전수전 다 겪은 후의 두번째 출국은 보다 의지적인 ‘현금흐름성 행복’에의 추구와 맞닿아있다. 계나는 결국 목표로 하던 시민권을 따고, 한국에 남겨두고 온 이들에게 미련을 두지 않으며, 오롯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결말부의 크고 작은 불행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덧대지 않고 소설을 거의 원문 그대로 영상화한 장건재 감독은 영화화의 모범답안을 제시한 듯도 하다. 물론 바로 지금 여기에 필요한 내용, 예를 들면 계나가 수시로 벌컥 화내는 한국 남자애들의 취약한 자아를 비판하거나, 저출생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는 정부를 신랄하게 조소하는 독백 등이 유독 거침없이 생략되기는 했지만, 아마 영화 나름대로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일 테다.


하지만 바로 그 ‘안전한 선택’ 때문일까. 뾰족한 비판도 구조적 분석도 아예 없진 않으나 변죽만 울린다. 영화의 몹시 사적인 담화들은 허공에서 맴돌 뿐 그 어떤 관객에게도 제대로 소구하지 못한다. 여성 화자인 계나의 약자성에 일단 공감하지 않기로 결의한 세대/성별은 물론이고, 계나 또래의 노동자 여성인 관객조차 계나에게 온전히 이입하기 어려워 지루해 한다면 어딘가 단단히 어긋난 게 분명하다. 어쩌면 팬데믹 전후의 고립과 탈정치화를 이미 겪은 이들에게 2015년의 ‘탈조선’ 담론은 한참 뒤처진 진단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그뿐만은 아니다. 소설도 영화도 내실 없는 호소처럼 다가오는 근본적 원인은 아마도 2010년대 이후의 ‘여성’ 청년이 탈조선을 말하는 ‘진짜 동기’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 소설의 계나는 호주에서 주로 무엇을 하는가. 계나는 우선 열심히 연애한다. 늘지 않는 영어 회화나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거주 형태에 대한 고민도 종종 스쳐가지만, 계나라는 인물이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건 무엇보다도 이방인 남성들과 나누는 성애적 호기심이나 한국에 남은 전 남자친구 지명과의 계급 차이에 의한 갈등이 드러날 때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남성)이 싫어서’ 탈출한다는 정서를 공유하는 계나 또래의 여성 관객에게 시시한 연애담 일대기가 참신하게 와닿을 리는 만무하다. 계나의 친구들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하던 시어머니 욕이나 다를 바 없이 시시할 따름이다. 또 계나에겐 페미니즘 리부트를 함께 거쳐온 ‘우리’라면 으레 공유하는 동료 여성 시민에 대한 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에 기반한 ‘다음’ 세상 혹은 세대를 상상할 능력 역시 부족한데, 소설이 쓰인 시기나 작가의 성별을 고려하더라도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 영화는 어떤 수정을 통해 어떤 진보를 이뤘을까? 3년 이상 지연된 제작 기간만큼 극적인 업그레이드를 기대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2024년의 영화 또한 식상하고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른다. 잠시 귀국한 한국에서조차 계나는 가족, 특히 엄마나 여동생 미나와의 관계보다도 혼자 술 마시는 아빠의 쓸쓸한 뒷모습, 지명과의 애매한 재회, 고시 장수생 친구 경윤(소설에서는 여자친구 중 하나였고, 영화에서는 남자 동기)의 자살에 크게 동요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서 다시 깨닫는 것. 영화는 해맑은 게임광 미나의 숨겨진 고통을 파보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미나는 그저 '오빠'의 성공을 기대하고 보조하는 인물로만 남는다. 영화는 사실 계나가 한국에서 겪은 고통에도 별 관심이 없다. 계나의 고통은 이 정도 ‘소개’만 한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내심 진지하게 논의의 장에 올리고 싶어하는 것, 섬세한 터치를 더해 영화만의 유일한 오리지널로 만든 것은 바로 끝내 취업하지 못한 경윤의 고통이다.


그래서 <한국이 싫어서>는 청년의 좌절을 말할 때 여전히 남성 청년만을 디폴트로 상상하는 세상(”지금 청년 세대는 ‘여사친’과도 경쟁해야 하는 세대”라는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나, 그 대항마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복기해보자)과 똑 닮아 있는 영화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피해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회피하고, 처벌을 촉구하는 여성들의 절규도 못 들은 체하는 이 나라의 방관자적 태도와도 닮아 있는 영화다. 기가 눌린 남자들의 울음만 조망한다면, 동세대 남성에 비해 2.7배 높은 20대 여성의 자살 시도율을 일컫는 ‘조용한 학살’도, N번방과 딥페이크 성범죄에 연루된 가공할 만한 남성 범죄자 수도 뇌리에서 깔끔히 지워질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걸 담으면 너무 무겁고 정치적인 영화가 될까 걱정됐을까? 그러나 무게감을 꺼렸다기엔 결말 즈음 일제히 끼어드는 기이하고 연속적인 죽음에 관한 쇼트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뉴질랜드 해변부터 밀려온 거대 쓰나미를 보도하는 뉴스, 계나가 신세 졌던 한인 가정의 죽음(아이와 부인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는 이미 계나에게 '여긴 너무 심심해'라고 말하거나 조명을 멍하니 쳐다보며 재난을 예고하는 메기의 역할을 암시한 바 있다)을 보도하는 뉴스, 그리고 친구 경윤의 영정사진 앞에 선 계나. 길어지는 고시생 생활의 정신적 물질적 궁핍함에 질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윤의 죽음이 계나를 직접적으로 타격하긴 하나,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 죽음은 불가해하고 예방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성격으로 쓸려내려간다. 이렇게 '시적으로' 일부러 설명을 배제한 채 그려지는 죽음이 효과를 갖는 영화들도 많다. 하지만 <한국이 싫어서>가 과연 그런 작품의 반열에 속하는가?


현실에 착 달라붙은 소재를 택한 작품일수록 더 큰 책임감을 갖고 발화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기껏 여성 인물을 내세우곤 추운 날씨와 수도권 인구 과밀, 수직적인 조직문화처럼 성별 무관 이견을 갖기 힘든 보편적 단점 묘사에만 공들이는 영화, 그리하여 가장 날것이고 최신인 현장의 목소리는 무시되고 오로지 호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한 흐릿한 예찬만 남은 영화를 과연 고발적이라거나 동시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박 겉핥기 같은 작품들이 늘 그렇듯, 식당 앞에 붙은 ‘넌 고기 먹을 때 제일 예뻐’와 같은 분홍 네온사인 조명을 본 것처럼 헛헛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을 선사할 뿐이다.



20대 여성 당사자로서 영화가 내놓지 못한 선언을 대신해본다. 현시점 계나와 같은 여성들에겐 ‘한국이 싫어서’보단 ‘한국은 싫지만’이란 서술이 더 어울릴 것이다. 동지애로 뭉친 여자들은 곳곳에서 의미 있는 연대를 조직하고 대가 없는 도움을 제공한다. 한국에 남은 여성, ‘탈조’한 여성, 국적과 인종과 세대가 다른 여성까지도 서로를 위해 그리고 후세대를 위해 말하고 설치고 행동한다. ‘한국이 싫어도’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여자들의 연대에서, 나는 우리가 ‘이긴 후’의 세상을 상상할 때 답이 될 법한 순수한 이타성, 책임의식 그리고 급진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함께 겪었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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