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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문턱의 영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by 유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 (2003)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 (2009)

천국은 아직 멀어 (2016)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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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차세대 거장이란 호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 심지어 그 성숙의 과정을 동시대 관객으로서 지켜봐온 감독의 초기작을 '뒤늦게' 만나는 것만큼 기기묘묘한 체험도 잘 없을 것이다. 몇십 년 살아와서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 집에서 어느 날 우연히 집과 똑같은 구조의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해버렸다고 상상해보자. 익숙하지만 불길하고, 낯설지만 두렵지 않고, 안락하지만 냄새 나는 것이 내 집의 기반base 이라고 생각한 곳 밑에 또 하나의 공간basement으로 도사리고 있었다고.

<드라이브 마이카> 이전의 <천국은 너무 멀어>를, <해피아워> 이전의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의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를, <아사코> 이전의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를 접하는 일이란 그토록 불안한 즐거움이다. 횡행하는 수다, 접촉과 미완성, 진실과 불확실성, 죽음과 정지라는 테마를 명료하게 반복하면서도 착실하게 흔들거리고 기웃대고 건드려보며 미끄러지는 하마구치의 영화는 사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존재성에 천착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뭔가 일어났어." <드라이브 마이카>의 척수와도 같은 대사를 먼저 소환해보자. 관객에게 하마구치에게 영화란 언제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소서'의 주문이었다. 붙잡히기보단 내달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엔딩처럼 그는 극도로 작위적인 움직임을 통해 영화의 경계 부수기를 추구한다. 이때 ‘경계 부수기’가 곧 ‘현실이 되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이시바시 에이코의 아름다운 앰비언트 음악은 아주 갑작스럽게 끊기는데 이는 편안하고 익숙한 휴지休止가 아닌 완전 정지라는 점에서 낯설다. 물론 처음과 마지막의 '이미지'는 하늘을 향해 얼기설기 솟아난 숲을 비추며 대구를 이루는 척하지만 사실 음악의 냉정한 소거를 통해 완전히 다른 공간, 완전히 다른 사건으로 각각 분리된 시간이 진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천국은 너무 멀어>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사츠키와 유조의 인터뷰 씬에서는 영화 안팎의 이미지가 뚝뚝 끊기어 관객이 눈 대신 귀에 집중하게 만든다. AV 편집자로 일하는 남자 유조는 영안을 가진 탓에 고등학교 때 살해당한 동급생 미츠키의 혼을 볼 수 있다. 아직 성불하지 못한 미츠키와, 별볼일 없고 내향적인 유조가 서로의 유일하고도 서먹한 친구가 되어 10년 이상 함께 하던 어느날, 영화과 유학생이 된 미츠키의 동생 사츠키가 언니를 소재로 졸업작품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며 유조에게 연락해온다.

인터뷰 장면에서 영화 밖의 시선을 대리하는 동생 사츠키가 화면의 '앞'에서 안으로 유조를 보고, 유조는 녹화되는 영상 화면을 통해 관객과 사츠키에게 비춰지며, 화면 '옆'으로 밀려나 숨겨진 유령 언니 미츠키는 그런 사츠키와 유조를 구석에서 본다. 어쩐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닮은 이 구도에서 사실상 '보이는' 것은 유조 한 명뿐이고 그나마도 카메라 모니터를 통해 작게 등장하지만 관객은 셋이 ‘모두 있다’는 사실을 소리로서 감각한다(고 영화가 주장한다). 미츠키의 빙의를 감내하거나 또는 흉내내는 유조와, 카메라 바깥에서 이 영상의 쓸모를 면밀히 따져보던 사츠키가 포옹할 때도 예상치 못한 잡음이 끼어든다. 배우들의 몸이 맞닿으며 마이크가 마찰되어 영화를 영화라고 인식할 만한 노이즈를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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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돌아가, 엔도, 오카모토, 하마구치 세 명의 대학생이 카페에 앉아 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경마 얘기는 하마구치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면서 돌연 끝나버리고, 오카모토는 이 틈을 탄 듯이 엔도에게 고백한다. 이때 카메라는 가까움의 물리적 형상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 거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꽉 채워진 클로즈업 숏에 얼굴을 담는다. 순식간에 연인이 된 두 사람의 이상야릇한 기류는 돌아온 하마구치의 알쏭달쏭한 얼굴로 보건대 제대로 포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마구치는 그 기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를 뿐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뭔가 일어났어."

관객은 알고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하마구치의 상태값은 <드라이브 마이카> 가후쿠의 이어지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아직은 배우들 사이에만 일어난 일이야. 그다음 단계가 있어. 관객에게 그걸 열어가. 하나도 빼먹지 말고 극장에서 다시 재현해.” 가후쿠의 지론을 따르자면 <천국은..>에서 사츠키와 유조가 끌어안는 순간의 잡음으로 인해 관객이 찬물을 맞고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감각하는 것은 '관객에게 그걸 열어가'는 일의 정확한 배반이다. 그러나 어쩌면 경계는 인식되어야만 흐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되기를 추구하는 줄 알았던 영화(라는 장르)도 결국 영화였다는 사실1이 감지되는 동시에 죽은 미츠키의 영혼을 영화가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영화 속에선 진실이라는 사실2가 빙의라는 비현실적 '설정'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와 같이 사츠키도 유조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믿어보고 싶은 속내를 내비친다. 또는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졸업작품을 위해 유조와의 포옹을 이용한다.


진실과 거짓이 분리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이야기가 분리된다. 푸코의 마그리트 해제를 빌려오자면, <천국은..>의 경계가 지어짐과 동시에 파괴되는 이 시점에, 하마구치의 영화란 단순히 세계를 모방한 닮음을 지향하지 않고(유사) 연쇄적 닮음이 세계를 관통하는(상사) 체제를 따르게 된다. 보이는 것은 말해지지 않고, 말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 그리하여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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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접근하자면 푸코는 확언과 모방과 재현을 목적으로 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재현을 거부하고 해체하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을 시대적 개념적 대립항으로 둔다. 20여년 후 <드라이브 마이카> 속 가후쿠가 ‘하나도 빼먹지 말고 재현’하라는 유사의 명령을 읊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드라이브 마이카>는 ‘표상의 질서가 세계를 재현할 수 있다’는 벨라스케스의 믿음을 완벽하게 구현하려는 인간의 붕괴와 재조립을 담은 영화에 가깝다. 한편 <천국은…>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전제가 대표하는 근현대의 믿음 체계를 반문하며, 이미지와 언어(소리)가 서로를 배반하는 장면을 만들어 마그리트처럼 ‘표상이 신뢰 가능한 재현인지’부터 다시 묻기 위한 영화다. 말하자면 <드라이브 마이카>와 <천국은 아직 멀어>는 서로를 계승하는 동시에 회귀하고, 또한 (사뭇 실험의 의도를 갖고, 하마구치답게 흔들거리며) 푸코의 표현대로라면 ‘문턱’을 넘어다닌다.


<천국은..>과 마찬가지로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 역시 연쇄적이고 중첩적인 접촉-비접촉의 테마로 나아가는데, 장편 <Floods>의 구상 중 튀어나온 것으로 알려진 중편은 결국 12년이 지난 지금도 미완/미결(엔딩 크레딧의 “Not The End…”)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 경우에 접촉 그 자체보다는 접촉에 대한 극도의 혐오가 치히로란 인물의 핵심을 이룬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 치히로는 이복 형 토고와 그 연인 사토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치히로에게 닿기 위해 토고는 ‘너도 나와 동류라면 목 뒤에 이상한 뼈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치히로는 토고가 들려준 이야기대로 자기 자신을 고대 어류 폴립테루스로 여긴다. 그러나 정작 토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 잊고 말았다는 이 폴립테루스의 가설은 되려 치히로를 세계와 더더욱 단절시킨다.

그는 폴립테루스 인형을 들고 다니고 자주 자신과 주변인을 물고기나 물의 관계에 비유한다. 형 토고조차 치히로에게 닿으려고 장난스레 추격하던 중 치히로가 손으로 총을 쏘는 척하는 몸짓에 ‘반응’했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진 나뭇가지에 볼을 크게 긁히게 되는데, 이는 치히로의 안무 선생님의 주문으로 곧장 이어진다.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냐. 상대의 움직임에 나의 움직임을 맡기는 거야.”

토고의 상처는 자기 움직임의 타이밍, 정도, 밀도를 결정하려는 상대의 의지를 반해 오로지 제 의지에 의해 밀어붙인 - 다시 말해 물의 흐름과도 같은 순리에 저항한 - 벌을 받은 것에 가깝다. 또한 이 상처는 치히로의 움직임에 반해 억지로 닿으려는 자는 모두 다치고 말 것이라는 영화의 남은 전언을 예고한다.

그런 점에서 치히로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킬링 디어>의 마틴 같은 전능한 소년 신, 혹은 페촐트 <운디네>의 운디네처럼 순수한 무작위의 신과 같이 그려진다. 치히로의 욕망은 (최소한 과거에는) 이복형 토고를 향한 듯도 하다. 토고의 연인 사토미는 침대에서조차 치히로 걱정인 토고에게 “당신네 형제들은 예전부터 항상 그랬지”라며 탐탁잖은 톤으로 진단을 내리는데, 형의 옆자리를 꿰찬 사토미는 치히로 입장에서야 훼방꾼이나 다름없다. 동류에 향하는 제 ‘사랑’을 멸시하는 세상을 대리하는 사토미를 피하며 치히로는 결국 감정의 창구인 접촉 자체를 두렵고 하기 싫은 것, 들키기 십상이니 위험한 것으로 치환하기에 이르렀을 테다.


혈육에 대한 희미한 집착의 흔적, 이성애 관계의 여성 쪽을 향한 노골적 적의, ‘동족’을 찾아헤매는 고독의 아우라는 모두 치히로가 토고-사토미 관계에서 겪은 실패와 좌절을 동급생 나오야-아즈사와의 삼각 관계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가 자발적으로 타인의 신체에 손댄 단 한 순간이 바로 ‘닿으면 안 되는 춤’을 함께 추는 나오야의 척추를 만지며 “너도 이상한 등뼈를 가졌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유도 모르고 차인 나오야를 관찰하던 치히로는 제게 연심을 드러내는 아즈사를 향해 불퉁하게 “나오야가 불쌍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즉각 <아사코>에서 아사코와 오랜 친구였던 마야가 갈등하는 아사코에게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아사코의 남편 료헤이를 두둔하고 ‘불쌍하다’고 표현하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듯 마야가 료헤이/바쿠를 갖지 못해 그를 대신할 남자 쿠시하시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아사코>의 여러 장면을 통해 암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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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야의 여자친구였던 아즈사가 나오야의 접촉을 완강히 거부하다 뛰쳐나가고, 직후 치히로에게 제 손등을 사이에 둔 채 키스하며 안긴 결과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과도 무척 닮아있다. 치히로에게 원치 않는 이와의 강제된 접촉은 죽음 이상으로 불쾌했을 것이다. 결국 아즈사는 강둑의 수문 근처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섬뜩함이..>에서 물의 흐름은 그다지 아름답거나 평화롭지 못하다. 범람에 대한 소문은 공기 중 불길하게 떠도는 공포의 냄새처럼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스릴러의 모티브다. 후에 이 범람은 지진과 해일의 형태로 <아사코>에서 재현되고, <해피 아워>에서 워크샵 활동가 우카이의 예술로 언급된다.

인간이 물의 흐름을 바꾸거나 막아둔 댐(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 방파제(아사코), 개간지(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 개발과 수해의 모티브는 하마구치 영화에서 이토록 빈번하게 반복된다. <악은..>에서 강조되었던 ‘언제나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과 닮은, “상대에 움직임에 나를 맡기”는 상호작용의 반대항으로서의 비-인위가 누적된다. 그것이 결국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무작위로 선택된 누군가가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아사코>의 사라진 고양이, <악은..>에서 타쿠미가 목을 졸라 죽인 타카하시, <섬뜩함이..>의 아즈사, <드라이브 마이카>의 부인 오토와 어려서 죽은 딸, 그리고 (죽음의 직접적인 장면은 대과거로 숨겨져있지만) <천국은..>의 미즈키처럼.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은 ‘피해자’들의 억울함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사악한 인류세에 속한 그 누구도 이 공동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완전히 무고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자연)의 벌은 누구에게나 내려질 수 있다. 이렇듯 하마구치 영화에서 인간과 세계는 끝없이 서로를 반향하며 유사성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아무것도 확증할 수 없지만 ‘맥락상’ 치히로가 아즈사를 죽였을 것이라며 시침을 떼듯 전개되는데, 정작 형사들이 찾아왔을 때 제가 아즈사를 죽였다며 자수하는 건 나오야 쪽이다. 치히로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굳은 채 형사를 따라나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나오야를 쳐다볼 뿐이다. 이때 나오야는 미끄러지고 피해다니며 자유로이 헤엄치며 세상을 놀리듯 굴던 치히로를 박제된 물고기처럼 어딘가에 고정해두는 역할을 한다. 치히로의 살해를 가장 먼저 눈치챈 듯하던 나오야의 심경의 변화는 치히로의 움직임에 대한 반응으로, 불가사의한 자수는 ‘치히로의 움직임에 나를 맡기’려는 행위로 해석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죄를 지었나’보다는 ‘누가 세상과 더 깊이 연루될 수 있나’에의 경쟁이다. 나오야는 세계를 반영하는, 세계의 기대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인간이 되어 저 혼자 나아간다. 파훼로써 저를 세상 앞에 내놓을 뻔했던 치히로는 다시 한 번 고립되어 고여버리고, 그렇게 그는 ‘문턱’을 넘지 못한 인간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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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엉뚱한 하마구치는 친구들과 함께 할 때마다 점차 요상한 고립감을 느끼는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급기야 단 하루 같이 놀았을 뿐인 엔도의 옛 동창 마츠이를 배웅하며 퍽 다정히 “언젠가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라고 인사한다. 그러나 삼수생인 마츠이는 하마구치의 상냥함에 별 관심이 없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가는 나이에, 대입이란 큰 과제 안에 갇혀 친구들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에겐 학창 시절 좋아했던 엔도만이 절대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혀 연이 없던 하마구치와 마츠이가 둘만 남겨진 것 또한 오카모토와 엔도가 ‘설명 없이’ 그들을 두고 경마장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이시이는 좋아하는 선배인 마츠이의 남모를 실연까지도 눈치챈듯 기차에서 사전을 독경처럼 읽어나간다.


나츠(여름)에서 시작된 긴 낭독은 여름, 감정, 성장과 성글게 연루된 여러 단어를 헤집는데, 이 장면은 <해피아워>에서 후미의 남편 타쿠야가 주최한 여성 작가의 낭독회와 <우연과 상상>의 두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늦깎이 학생 나오가 세가와 교수의 소설을 다소 발칙하게 읽어내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우습게도 이 장면에서 뒷좌석의 중년 남성 승객은 이시이가 시끄럽게 굴어 불만이라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이는 비전문 배우 기용과 애드립에의 너그러운 수용으로 요약되는 하마구치 연출의 또다른 트릭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는 비전문 엑스트라조차 아닌 진짜 승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마구치는 그 ‘풍경’을 치우거나 편집하는 게 아니라, 의도대로 낯섦이란 ‘상황’을 완성시키는 영화 속 물질처럼 사용해버린다.


이시이는 나데루(쓰다듬다)에서 독경을 멈추며 마츠이의 볼을 예고없이 쓰다듬는다. 그리고 화면은 돌연 암전되었다가 ‘몇 년 후’로 건너뛴다.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하마구치의 소망대로 오카모토, 엔도, 마츠이, 이시이와 하마구치까지 모두 도쿄의 한 볼링장에 모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몇 년 후’에 마츠이와 이시이는 도쿄 의대에 붙어 상경한 걸까? 둘은 연인이 된 걸까? 엔도와 오카모토는 여전히 사귀고 있을까? 그렇다기엔 이시이와 하마구치가 먼저 인사하고 떠나버리고, 마츠이와 오카모토가 엔도가 어색하게 동행하다 ‘상상 속 축구’를 하는 맥빠진 한낮 풍경이 영 석연찮다.

<아무렇지..>의 여러 어긋남에 대해서 하마구치는 의도적으로 설명을 거부한다. 관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겠다는 듯한 단절과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에필로그. 그러나 얼핏 낯설어 보이는 이 부자연스러움은, 부러 긴 시간을 들여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다큐멘터리와 같은 풍경을 조형하는 ‘하마구치 스타일’과 전혀 대치되지 않는다. 하마구치는 언제나 설명보단 분절에, 멀리 있는 잘 알려진 것보다는 가까이 있는 낯섦에 집중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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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과 진실에 대한 클리셰 로맨스 장르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을 것 같던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에서도 돌연 낯섦이 개입한다. 에이코와 세이이치 커플의 결혼식 당일 아침, 밤새 총각파티에서 과음하고 뻗어버린 세이이치가 식장에 달려오는 동안 에이코는 자신이 전 남자친구인 누드모델 히사시와 불과 세 달 전 부정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 신파극 특유의 극적 붕괴가 언제 찾아들까 조마조마한 관객을 두고 하마구치는 어떤 인디밴드 멤버들의 합주 푸티지를 중간중간 삽입한다.

이들은 커플의 옛 친구인지 무엇인지조차 설명되지 않고 영원히 메인 플롯과 분리된 독립적 층위로서만 존재한다. 합주실에서, 아마도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식장 대기실에서 환복하면서도 내내 베드룸팝 같은 가녀린 곡조를 흥얼대고 작곡에 대해 이야기하던 인디밴드 멤버들은 (일본에선 드문) 성당 결혼식 장면에서 뜬금없이 3인조 남성 중창단이 되어 드러머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중후한 성가를 뽑아내고 있다. 어쩌면 그 생뚱맞고 예기치 못한 축가가 <영원히..>가 말하려는 진실의 처세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해보면 진탕 마시고 잠들어버린 세이이치의 침대 곁에도 밴드 것과 닮은 비싼 기타가 하나 놓여있었다. 제 음악은 펑크든 록이든 까짓거 제멋대로 언제든 하고, 타인의 결혼식에선 고객이 좋아할 법한 홀리함을 연출해줄 수 있다는 생활인의 천연덕스러움이 밴드 멤버들의 정물화된 얼굴마다 묻어있다. 이전까지의 자유분방함은 말끔히 소거된 채로, 정장 입고 내 ‘결’과 맞지 않는 요식에 충실한 나도 나이듯, 진실은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에이코의 남동생 준과 히사시에게 반한 대학생 에리나는 그러한 진실의 정의에 그다지 동의하지 못한다. 에이코의 부정을 알고 있었다고 신부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고해한 세이이치와, 죄책감에 이 결혼을 못하겠다며 선언해버린 에이코. 어른들이 당황하고 화내고 커플을 몰아붙이는 소요 와중에 그날의 사진기사로 고용된 준은 “역겨워”라고 누나를 상처 입히고 뛰쳐나간다.

마찬가지로 히사시에게 반한 미대생 에리나는 에이코의 임신 사실을 알고도 결혼식을 망쳐버리진 않겠다는 히사시의 말에 “어른들은 다 이상해!” 하며 토라져버린다. 신랑신부의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일단 회사 일로 얽힌 사람이 많고, 나는 돈을 냈으니 식을 강행하자며 담배를 뻑뻑 피우는 세이이치의 홀어머니는 준과 에리나와 정반대에 선 세속의 인물이다. 관객은 에리나를 귀엽게 여기고 나이든 세이이치의 어머니의 대사에 박장대소하며 자신의 나이듦을 절감한다. 어쩌면 이 장면만큼은 시절이 우리를 둔감하게 만드는 일에 대한 애수 섞인 코미디인 것도 같다.


역겹다면서도 식전의 난장판은 열심히 찍어대던 준은 정작 결혼식이 시작되자 혼인 서약과 키스는 찍지 않기로 결정한듯 불퉁하게 손 놓고 있는데, 그렇게 결국 (에리나와 동년배인) 준이 선택한 진실만 카메라에 남는다. 누나와 형이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라고 한 것 역시 진실임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라서. ‘하지만’을 필요로 하는 반틈의 진실은 다 진실이 아니니까 거짓됐다고 느낄 때라서. 결혼이라는 인생 주기상의 분기점을 경유해, 사람(에)의 믿음이 완성품으로 주어졌다가 세월에 따라 점차 깎여나가는 게 아니라, 시작점에서 완전히 붕괴되어 있어 제대로 알 수 없는 ‘원본’을 재건하기 위한 첩첩산중의 세월만 남아있을 것임을 준과 에리나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는 서사는 다소 도식적으로나마 이전 영화들의 ‘믿음에 대한 믿음’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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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에서 사츠키에게 못난 망상증 환자로 의심받자 유조는 “어차피 안 믿을 거면 뭐하러 물어봐?”라며 쏘아붙이고, <아무렇지..>에서 경마의 매력을 설명하던 하마구치는 “말(馬)을 믿게 되면” 그 말의 경기 결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식이다. 또 마츠이는 상상으로 축구를 하자고 엔도와 오카모토에게 제안하며 “머릿속으로 그린 것을 믿으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섬뜩함이…>의 소년들은 상대의 움직임에 나를 맡기라는 안무 선생님의 말을 “너는 이해할 수 있겠냐”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럼에도 사츠키, 마츠이와 하마구치의 친구들, 그리고 나오야와 치히로는 타인의 ‘믿으라’는 주문에 꽤 성실히 임한다. 앞선 영화들과 달리 유일하게 하마구치가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영원히..>에서도 에리나가 “난 말야, 울고 싶을 때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란 팁을 주자, 처음엔 어린애의 실없는 소리처럼 넘기던 히사시도 식장을 나오면서는 결국 못 이긴 체 그 ‘웃는 척’에 가담한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실행하는 것, 믿지 못한 것을 믿는 체하는 것은 진짜이지 않은 것을 진짜인 척 찍는 카메라(라는 주체)와도 닮아있다. 이는 기어이 최근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차의 뒤쪽 창을 통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씬을 통해 “아예 대놓고 인물의 시선이 부재한 카메라의 시선을 내세”우는 태도로 발전한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그동안 어떤 영화에서도 시점숏을 찍은 적이 없”으며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감독의 발언을 고려한다면 이는 그의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변화임이 틀림없다.


푸코에 따르면 상사similitude - 원본 없는 복제와 그 복제와 그것의 복제 간의 되풀이 -가 재현을 해체하면 그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영화가 진짜인 척하지 않고 외려 그것이 영화임을 내세움으로써 관객과 더 잘 소통할 수 있겠다”는 발언에서 짐작건대 하마구치 류스케는 더이상 “하나도 빼먹지 말고 극장에서 그대로 재현”하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듯도 하다. 장편의 테스트베드로 쓰인 초기작 중단편들이 20여년 지나 도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드라이브 마이카>의 그 대사를 쓰기 아주 오래 전에 그는 이미 재현의 강박에서 벗어나 모호함의 놀이로 진입한 것처럼 느껴진다. “내 몸이 느끼기에 이것이 참 편안하다, 조화롭다고 하는 생리적인 느낌”이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기준이 되어, 실재감이나 형식적 통일성보단 세계라는 사물과 인간 간의, 진실과 진실에 닿으려는 행위 간의, 영화와 관객 간의 거리감이나 균형감이 우위에 선다. 그런 점에서 하마구치 영화는 모두 ‘문턱’의 영화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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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글

새로운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마추어리즘 - 이여로

[기획]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스페셜 토크 - 씨네21, 이우빈

[인터뷰] 균형의 조정,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 씨네21, 김소미

[비평] 감염과 면역의 몽타주 작가로서의 하마구치 류스케를 말하다 - 씨네21, 김병규

하마구치 류스케, '이상함을 풀이하는 방법으로서 잘 모르겠다'는 선택지에 관해서 - 코아르, 변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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