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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동숭동에서

그때 그 벤치, 그 거리, 그 공기까지

by 김유인



동숭동을 처음 가본 건 1982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문예회관에서 연극을 보러 갔었다.

처음 가본 동숭동은 아직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지만,
붉은 벽돌로 된 문예회관 건물은 그때까지 못 보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서울 시내는 사각형의 건물들이 재미없게 들어서 있었을 뿐인데,
이곳은 여러 개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공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그 붉은 건물에 들어가서 연극을 본 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본 연극이 "강릉 매화전"이라는, 약간 코믹이 가미된 작품이었는데
한양에 사는 양반이 강릉의 기생에 빠져 조강지처를 버리고 재산을 탕진한다는
조선 시대 배경의 이야기였다.
무대도 크고, 유명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연극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아버지는 나를 원두커피 향이 가득한 난다랑으로 데리고 가셨다.
난다랑은 샘터사 건물에 있던 고급 찻집이었고, 간단한 식사도 팔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그전엔 시험 때 잠을 쫓기 위해 마시던 커피 말고,
커피 전문점에서 마신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샘터사 건물은 담쟁이덩굴이 붉은 벽돌을 타고 올라가
초록 잎사귀와 붉은 벽돌의 조화가 참 멋스러웠다.
들어가는 입구도 특이했고,
건물 안쪽으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의 설계였다.
난다랑은 시원한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였다.
그날, 연극이 끝나고 어두워지는 거리 풍경을 보며
아버지와 함께 앉아 차를 마셨었다.
멋진 저녁이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아버지와의 데이트는

엄마가 없는 딸을 향한 배려였을 것이다.

샘터사


문예회관 앞 커다란 벤치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였고,
주말이면 자리가 없을 만큼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모아놓고 거리공연이 시작되곤 했다.
그곳은 순수하고 낭만이 있던, 젊음의 거리였다.

그리고 샘터사 건물 뒤, 문예회관과 벽을 맞댄
오비베어 호프집과 하이델베르크라는 맥주집은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었다.
오비베어는 생맥주와 훈제족발을 파는,
그 시절 몇 안 되는 맥주집이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맥주 마시던 젊은 시절.
이제 그 젊음은 없지만,
어딘가 누군가는 지금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거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도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대학의 도시이자 지성과 학문의 도시.
90년대에 아버지랑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같이 갔을 때,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부터 꼭 와보고 싶었다며 감격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동숭동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음악만 틀어줬다.
어느 날 같이 갔던 친구가 음악 좀 바꿔달라고 부탁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
내 친구 왈,
“여기는 술 마시고 독일식으로 ‘아흐~’ 해야 해?”
해서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쯤 ‘대학로’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도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KFC가 문을 열면서,
그곳은 발 디딜 틈 없는 명소가 되었다.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깥까지 줄을 서 있는 건 기본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매장 안으로 사람을 찾으러 들어가면
너무 많아서 30분은 걸리곤 했다.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고 나서는,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대학로에 들러 노는 게 나의 코스였다.
딱히 약속이 없어도, 그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친구도 만나고
카페에 들러 차도 마시고,
레코드점에 들러 음악도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랑 약속하면 당연히 동숭동에서 했다.

주중의 한산한 문예회관 앞 벤치에
약속 없이 앉아 책도 읽고,
헤드폰을 끼고 음악도 들었다.
가을이면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앉아,
붉은 벽돌 건물과 대조되는 파란 하늘을 보며
친구들과 20대의 불확실한 미래를 얘기하곤 했다.

어느 주말엔가, 차 없는 거리에서 열린 공연 중
큰 트레일러를 무대로 만든 벗님들의 공연이 있었다.
청명한 날, 넓은 무대 위에 펼쳐진 그 공연은
내 젊은 날의 푸르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의 동숭동은

지금처럼 화려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소박하고 다정한 곳이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때 그 벤치, 그 거리, 그 공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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