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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음 Nov 02. 2022

동화와 영화를 오가는 체코

유럽 여행기 15


 체코의 작은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를 들렀다. 처음엔 이름이 어려워 가이드님께 5번은 족히 다시 물었던 듯하다. 당일에는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고, 한참이 지나 그날을 곱씹으며 추억할 때가 되어서야 비소로 자연스레 이름을 말하게 됐다. 체스키(체코의) 크룸로프(말발굽)는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이 보이자, 일행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아기자기한 풍경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한층 더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작은 골목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기념품 가게, 식당, 디저트 가게들. 저 앞의 골목만 지나면 라푼젤 같은 말괄량이 공주님이 뛰어다닐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 살면 동화가 저절로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볼 만큼 이상적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성은 놀이동산을 연상케 했으니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실을 지내면서 추억해 보면 다른 세계 같다. (물론 지구 반대편의 다른 세계가 맞다.) 오랜만에 놀이동산이라도 가고 싶어질 만큼 동심에 빠져본다.


체스키 크룸로프 풍경


 성을 벗어나는 길에 곰을 봤다. 옛날에 곰이 성의 문지기 역할을 하기도 하고, 곰의 먹이가 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한다. 곰까지 보니 나의 동심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갔다. 점심으로는 맥주를 시켰다. 가이드님 말씀에 따르면 체코가 맥주 소비량이 세계 1등이라고 하던데 (독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연 마셔줘야 인지상정 아닌가! 이것이 바로 현시대 어른이의 이상적 관광코스 아닐까.


성벽을 지나면 곧장 성벽 외곽아래 곰이 있다


 마을이 자그마해서 인지 둘러 흐르는 강이 커 보인다. 시원하고 옹골차게 흐르는 강이 이 작은 마을의 답답함을 떠내려 보내주는 듯하다. 유럽에서는 동화같이 색을 칠한 예쁜 건물들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이곳의 이미지가 가장 동화에 적합하게 느껴졌다. 역시나 들러가는 곳이어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지만, 잠시 '옛날 옛적에 어떤 작은 마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세상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시간이었다. 


마을의 골목 / 멀리 솟아있는 성







 우리는 체코의 프라하로 향했다. 


 프라하의 연인들이라는 드라마를 어릴 적 본 기억이 있는데 풍경과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조인성이 주먹을 물고 울던 장면만 떠오른다. 과연 그 파급력 있던 제목처럼 프라하는 연인들의 도시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낭만적이었다. 시민회관과 화약탑을 시작으로 구시가 광장, 천문시계, 까를교까지 간단한 시내 투어를 했다. 그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구시청사 천문시계! 정각을 앞둔 시계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시계는 1410년에 설치되어 아직까지 작동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 시계이다. 매 정각마다 뻐꾸기가 울리듯 20초가량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정각이 되면 오른쪽 위에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인형이 움직이며 종을 친다. 그 옆에 음악을 연주하는 터키인, 반대편에 돈지갑을 쥔 유태인 인형과 함께 죽음 앞에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말하고 있다. 거울을 보고 있는 인형은 인간의 허영심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장 꼭대기에 두 개의 창문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차례로 지나간다. 천문시계 아래에는 달력 눈금판이 있는데 시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지을 때 해야 할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계가 15세기 초에 설치되었고, 아직도 움직인다니! 그리고 시간 또한 정확하다. 알수록 인간은 참 위대하다.


구시청사 앞 사람들 /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천천히 까를교를 향해 걸어갔다. 거리와 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까를교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성 요한 네포무크 동상 아래 순교 장면 부조를 만지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전설이 있어 갑작스레 줄을 서 소원을 빌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매만진 덕에 반질반질 빛이 났다. 그때 어떤 소원이었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그중 어떤 소원은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정신없는 와중에 떠올린 소원이 마구잡이로 난무했었기에 기억이 안나는 듯하다. 우리는 그 석양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예약해둔 재즈바에 가기 위함이었다. 재즈바라니! 사람들과 함께 다니길 잘했다고 느꼈다. 아마 혼자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까를교 노을


 추천을 받아 방문한 재즈바는 jazz republic이었다. 과연 입구부터 영화에 나올 법한 분위기를 풍겼으므로 잠시 라라랜드나 소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하로 내려가니 빼곡한 테이블들 사이로 마치 비밀 요새의 중추 같은 붉고 푸른빛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운이 좋게도 가장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같은 테이블에 먼저 앉아있던 중년 부부는 사이좋게 맥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류는 옆 공간의 제조 바에 가서 따로 주문을 해오는 형식이어서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서둘러 맥주를 사 와 자리에 앉았다. 세션들이 등장하고 앞자리라기 보단 코앞 자리라는 말이 알맞을 만큼 무대와 좌석은 가까웠다. 마치 카메라를 얼굴에 밀착시킨 느낌이랄까. 덕분에 그들의 표정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세세하게 볼 수 있어 그들의 연주와 호흡에 맞춰 무아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했다. 조명과 연주, 분위기와 맥주, 지하의 공기와 슬며시 붐비는 공간. 어느 것 하나 나를 그들의 세계로 이끌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다. 


프라하의 재즈바


 그들의 눈빛과 표정, 악기 위에서 현란하게 춤추는 손들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행복한 표정으로 몸을 들썩이며 건반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조금 전 남몰래 짝사랑하던 마음을 고백을 하고 yes라는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한껏 들뜬 입가로 어깨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무언가에 열정을 쏟는 인간이란 그 자체만으로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명은 무대를 가득히 비췄지만 한쪽에서 신이 나게 건반과 춤을 추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드럼, 건반, 색소폰, 베이스. 4명의 세션들은 서로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이 연주하고 미소 지었고, 때론 각자의 소리를 잔잔히 듣고 다시 호응하길 반복했다. 그들의 즐거운 대화를 들으며 밤이 깊어 갔다.







 그렇게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동화 속에도 등장했다가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영화같이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어떤 장르를 거닐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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