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하는 여행 #1
처음 여행이란 걸 한 건 2005년이었다. 다들 그러하듯 여행에 맛이 들렸다. 덥고 추운 참 많은 곳을 다녔다. 더 이상 그 맛을 보는 게 쉽지 않아진 건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결혼 - 이민 - 임신 - 출산 - 육아의 트랙을 연이어 뛰며 그토록 좋아했던 혼자하는 여행과는 멀어졌다. 대신 눈으로라도 맛보겠다며 여행 블로그, 인스타를 들여다 봤다.
저기 진짜 가보고 싶다.
저거 진짜 맛있겠다.
저기 앉아서 책 보고 싶다.
근래 '카페인' 증후군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남의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증에 걸린다는 이야기. 난 좀 달랐다. 누군가 즐기는 여행의 맛이 내게도 달았다. 지금으로선 가서 누리기 어려우니 눈으로 보며 여행의 맛을 누리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들이 부럽다기 보단 그들의 사진으로 상상할 수 있어 고마웠다. 원래 진짜 여행도 D-day를 손꼽아 기다리며 하는 상상- 그게 제일 단 법.
그러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두 눈 크게 뜨고 바삐 보며 다닌 여행기 말고, 두 눈 감고 상상하며 쓰는 여행기도 멋지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저 곳에 간다면 누리고 싶은 그 숱한 상상들. 그 상상을 상상만 해도 엔돌핀이 솟는다.
가만보자. 어디부터 가볼까.
내 본능이 가장 또렷하게 생각해낸 단어는 뜻밖에도 '제주'였다.
인스타그램에서 제주를 검색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기를 한참. '그 날'의 제주에서 할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매화, 등대, 라떼, 전복 그리고 스냅. 가장 황홀했던 다섯 가지 상상.
눈감고 하는 제주 여행이다.
01 솜털 매화 밑을 끝도 없이 걸을테다.
만화를 좋아했다. 어릴 적 집 앞에 있던 도서대여점에서 안 본 만화가 없었다. 빌리다 지쳐 몇 개는 샀다. 연극만화 <유리가면>이 그랬다. 소녀 마야가 역경을 딛고 연극에 대한 혼을 불사르는 이야기인데, 백과사전 전집만큼의 방대한 분량에서 기억에 남는 건 단연 '매화골'이다. 마야가 꿈꾸는 연극 '홍천녀'의 배경이 되는 천 년 묵은 거대한 매화나무.
매화골에 꽂혔던 그 시절 때문이었을까. 꽃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좋았다. 노량진 학원가를 에워쌌던, 그 옛날 캠퍼스를 휘감았던 벚꽃이 좋았다. 숱한 제주 여행 사진 중에서도 매화에 가장 눈길이 갔다.
몽글몽글한 매화가 저 앞 한참까지 이어져 있는 길을 아끼고 아껴 오래 걸어야지. 좀 덜 이쁘더라도 편한 신발을 신고 가야겠다. 어지간한 짐은 숙소에 두고 가볍게 걸어야지. 사진은 너무 많이는 말자. 이 장면은 호호백발 되서도 들여다보고 싶은 순간에만 잠시 멈춰 셔터를 찰칵. 흥 좀 올랐다 싶으면 갓 떨어진 매화 꽃잎 귀에 꽂고 셀피도 몇 장.
마침 2월은 매화축제라니. 매화로 꽃놀음을 하기엔 한림공원, 휴애리, 노리매, 칠십리시, 걸매생태공원이 그렇게 좋다 한다. 킵.
02 석양 아래 빨간 등대에서 애잔한 추억팔이를 할테다.
등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극적인 재회의 장소로 쓰였던 것 같다. '아, 나 이 등대 지나던 길이었는데' 할 만한 장소는 아니다보니 '늘 당신을 생각했소. 그래서 이 곳에 들렀는데 운명처럼 당신을 만났구료.' 식의 애끓는 운명론을 표현하기 괜찮은 프레임이다. 게다가 제주라니. 울릉도와 독도엔 없는 애잔함이 담뿍 묻어나는 제주라니.
저 등대 아래서 난 누구와의 재회를 꿈꿀까. 혹, 어떤 시간을 추억하고 있을까. 일단 등대가 새끼 손가락 크기로 보일 때부터 그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어야겠다. 되도록 점점 커지는 등대와 내 걸음 사이엔 아무 생명체도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귀여운 커플이 나잡아봐라를 하며 지나간다면 ...... '그래, 좋을때다. 즐겨라.'하며 기다려주겠다. 어쩌면 그들의 풋풋함에서 나의 오래된 추억을 떠올릴지도.
느린 걸음으로 등대에 다다랐을 즈음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면 좋겠다. 곧 어둠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짧은 시간 가장 비현실적인 그라데이션이 깔리는 그 장면. 손에는 커피든 차든 따뜻한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면 좋겠다. 커피가 식을 때 쯤엔- 잠시 전 추억팔이가 유치해 미치겠는 아줌마로 돌아와 잰걸음으로 저 길을 다시 걸어나와야지. '아우 주책이야.' 이런 멘트와 함께.
03 바다를 보며 바닐라라떼를 마실테다.
길에 밟히는 게 커피지만, 눈에 밟히는 것도 커피다. 그놈의 커피가 무엇이간데 이리도 사람을 설레게 할까. 특히 여행지에서 마시는 커피라면, 게임 오버.
제주 여행에서 마시는 커피라면 응당 눈으론 바다를 마시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몰아치고 더위나 추위가 괴롭혀도 바다여야 한다. 편의점 의자 같은 것보단 제주 돌더미나 나무 벤치라면 좋겠다. 아메리카노보단 바닐라라떼가 좋겠다. 칼로리의 공포 쯤이야 여행이데 뭐 어때. 바다 마시며 먹는 커피는 0칼로리다. 바닷 바람이 칼로리 다 가져간다.
04 전복 라면에 전복 추가를 외칠테다.
라면을 가장 많이 먹었던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술이 다 어디로 들어갔을까 싶을 정도로 다량의 알코올을 주 5일 마시던 시기, 술 무서운 줄 몰랐던 날들. 하지만 숙취는 그 때도 무서웠다. 거나하게 마신 다음날이면 신촌 구석지에 있었던 해장라면집을 찾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라면을 보면 그 때의 무모함, 그 때의 인연들이 떠오른다.
라면에서 피끓는 청춘을 떠올린다면 전복은 서른 너머의 평온한 삶과 맞닿아 있다. 뉴질랜드에 살며 전복을 잡기 시작한 것. 손끝으로 바위를 더듬어 손바닥만한 전복을 걸러낸다. 잠시 미안하다 이야기하고 바위와 녀석의 사이에 전복칼을 넣는다. 잠시 손을 들어 손바닥을 쫙- 펴보자. 대충 피지 말고 있는 힘껏. 당신의 손바닥과 손가락을 합친 길이보다 더 큰 전복 하나가 통째로 당신의 라면그릇에 올라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면발 사이로 토실토실한 녀석이 보인다. 게다가, 제주다. 게임은 애저녁에 끝났다.
05 교복입고 친구 스냅 찍어버릴테다.
여행지마다 최적의 동행이 있다고 믿는다. 내게 파리는 사랑하는 남자와 가야 하는 도시, 교토는 호젓하게 홀로 다녀오고 싶은 도시, 로토루아는 꼬물꼬물 아이 데리고 즐기고 싶은 도시였다. 제주는, 친구와 함께 가고 싶다.
10대와 20대. 친구가 삶의 대부분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었고, 그들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욕심으로 인해 자주 좌절했다. 때론 마음을 닫았다. 나이를 먹고 가정이 생기며 친구의 부피는 확실이 줄었다.
하지만 질량은 다르다. 친구라는 인연으로 스친 수 백 명을 지나 몇이 남았다. 많이 꼽아봐야 열 손가락으로 충분하다. 일년에 한 두 번 보는 게 고작일지나 더없이 편하다. 그들과는 어떤 말이라도 괜찮단 걸 안다. 시간이 솎아준 진짜 인연이다. 그런 그들과 제주를 여행하고 싶다.
유치 찬란한 교복을 빌리자. 친구 장롱 면허 꺼내 운전대 잡게 하고 면허없단 핑계로 옆자리에서 맥주든 뭐든 마시자. 불평하는 친구에게 마른 오징어 몇 개 물려주자. 멋진 장면이 보이면 호들갑 떨며 멈추게 할테다. 여기서 사진 찍자며 셀카봉 들고 허둥지둥.
종일을 맛집 투어로 가득 채운데도 좋다. 먹으면서 먹을 걸 이야기하자. 숙소에 들어가서 내일 먹을 걸 이야기하자. 그렇게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중 몇 개는 출력해서 집 어딘가에 놓자. 십 몇 년 쯤 지나 이삿짐 속에서 발견하고 한참을 웃을 수 있는 보물이 될 거다.
쓰고 보니 행복하다. 눈감고 한 제주 여행이 제법 선명하다. 언젠가 저 다섯 개를 꽉 채운 제주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대도 좋다.
다음엔 눈감고 어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