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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반작 Sep 09. 2019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 되어보기로 했다

가장 느린 걸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했다.



고요한 집안이 싫어서 TV를 틀었다. 리모컨을 만지작 거리며 채널을 바꾸다가 멈춘 화면에는 국토대장정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출연자들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뙤약볕 아래서 종일 걷고 있었다.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A에서 B로, 그날 정해진 목적지를 정하고 걷는 것이 끝이었다. 화면에 비친 그들은 몹시 지쳐 보였는데, 한편으론 이상할 만큼 행복해 보였다. 도대체 왜? 궁금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다는 그 순례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35일 동안 약 840km 정도를 걸었다. 길을 완주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주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행은 어땠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생애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을 길을 걷고 온 것 같다고.




그날의 마지막 순례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는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숙소가 있다. 보통 20-30km에 1개씩 위치해 있는 순례자 전용 숙소이다. 늦게 도착하게 되면, 침대가 없어서 땅바닥에 오래된 침낭이나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처음 며칠간 나는 하루에 20km를 걷는 것도 무리였다. 험한 산길인지라 숙소에 도착하면 발목과 무릎이 욱신욱신 아팠다. 그래서 숙소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 애썼다. 안락한 침대에 편히 누워서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넷째 날쯤 되었을까, 숙소에서 만난 내 나이 또래의 스페인 여자 아이가 말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서 하늘도 아름답고, 오는 길에 보이던 꽃길도 참 이뻤다고. 그 아이가 말한 하늘과 길을 나는 보지 못했다.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바삐 길을 떠났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돌멩이가 가득한 땅바닥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카미노는 빨리 걷기 경쟁 대회가 아니란 것을. 이후 나는 기꺼이 그날의 마지막 순례자가 되는 것에 응했다. 길을 걷다 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쉬기도 하고, 풀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기도 하고, 물가에 앉아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기도 했다.

어느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보단, 누구보다 많은 것을 느끼며 목표를 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았다. 나의 인생은 언제나 이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이 발을 주물러 줬다.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끗했던 날이었다. 걸을 때마다 시큼시큼해져 오는 발목 때문에 잠시 앉아있었다. 신발을 벗고, 아픈 발목을 주무르던 때였다. 나를 향해 한 외국인이 걸어왔다. "Are you Okay?" 그는 물음과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을 두 손으로 잡곤 주물렀다. 엇, 땀이 나서 발도 축축하고 더러울 텐데. 낯선 사람의 호의는 나를 충분히 당황스럽게 했다. 나는 어찌할 줄 몰랐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내 발목을 주물러 주곤, 옆에 앉아 물을 홀짝이다가 이내 떠나버렸다. 이후에도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호의는 계속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마을에서 마주친 타지인인 내게 "올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금 나한테 인사를 한 게 맞나? 뒤에 누가 있는 건가? 당황스러움에 몇 번을 뒤돌아봤다. 몇몇 현지인은 내게 물과 빵을 건네주기도 했다. 정말 이상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보이면, 이토록 소심한 내가 먼저 달려가 반갑게 "올라!"인사를 하곤 했다. 길에 앉아 쉬는 순례자에게는 초코바와 음료를 건네주기도 하고, 숙소에서 만난 관절이 아픈 노부부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파스를 자랑스레 붙여 주기도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의 행복을, 건강을 바라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피부를 붉게 타들어가게 만들었던 여름이었다. 쨍한 햇빛 덕분에 어딜 가도 초록 초록한 나무와 풀이 싱그러웠다. 지나치는 바람 소리, 새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의 대화 소리가 눈 앞에 펼쳐진 자연 풍경과 참으로 찰떡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순간들이 바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천천히 가도 된다는 여유로움, 삶에 대한 무한한 다정함, 그리고 사람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믿음이 있던 날들. 소심하고 겁 많은 내게 좋은 가치관을 준 여행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마흔이 되기 전에는 한 번쯤 다시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스페인이든 제주도든, 남해든 장소는 상관없을 것 같다. 그때가 온다면, 이번에는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걷고 싶다.  


낯선 이의 아픈 발을 주물러 주며, 눈에 닿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할 수 있는 한 아주 천천히 오랜 기간 걸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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