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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으뜸이가 호주에서 한국에 왔다고? 그 으뜸이?

서공양_#7

by 윤달


그해 유독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공기는 거짓말처럼 달라져 있었다. 끈적하고 숨막히던 느낌 대신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내 시계는 멈춘 듯한 순간에도 계절은 기특하게 열심히 제 역할을 하며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여름 동안 나는 몇 번의 병원 상담을 더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지쳐 있었고, 여전히 아팠으며, 매일 무너져 내렸다.


아직은 아팠던 그런 9월이었다.


그러면서도 9월의 선선한 바람은 나를 안아주는 듯했다. 이 계절의 변화는 내 안의 변화를 조용히 예고하는 듯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주 미세하게 작은 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나 미약해서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듯하다.


그날 아침도, 전날 먹은 약 때문인지 아니면 밤새 어디로 도망치는 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멍한 상태로 잠에서 깼다. 양치를 하고 식탁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띵동–문자가 왔다.


‘친구야!! 나 한국 왔어!! 얼른 만나자.
보고 싶어. 잘 지내지?’
-으뜸이-


문자가 왔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내 과거에서 반가운 손님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내가 이 손님을 어찌 맞이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당황스러웠다.


나는 20대에 여러 나라에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갔고, 다시 돌아와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캐나다 그리고 호주에 가서 살았다. 그때는 내 인생의 종착역이 호주라고 생각해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영주권을 준비했었다. 물론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나 혼자 거의 대부분을 준비하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 때 만난 친구가 으뜸이었다.


20대 중반에 만난 우리는 같은 집에서 하우스메이트로처음 만났는데, 그녀는 호주에 딱 3개월만 놀러 왔다고했다. 후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호주에 쭉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나이도 동갑이었을 뿐 아니라 이야기도 잘 통해서 금방 친해졌다. 그렇게 한집에서 6개월을 살았고, 그 이후에도 종종 연락하던 친구였다. 으뜸이는 밝고 솔직하고 늘 현재를 사는 아이였다. 난 그런 부분들이 항상 부러웠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으뜸이와 만날 약속을 했고, 우리는 양재천이 보이는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으뜸이를만나던 날, 난 절대 이 우울과 어둠을 들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입술을 꽉 깨물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빨간 가디건을 입은 으뜸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10년 전과 똑같았다. 나는 너무 오랜만의 외출이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생경했다. 하지만 왠지 금방 편해졌다. 그 편안함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내 친구의 따뜻함과 밝음 덕분이었겠지–


디저트가 나온 접시에서 포크를 가져가며 으뜸이가 말했다.


“야, 난 지금도 네가 새벽 4시만 되면 좀비처럼 일어나서 막 영어로 에세이 쓰고 책상에 앉아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공부하던 게 눈에 선해. 그리고 넌 내가 지난 10년 동안 호주에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어. 난 아직도 누구 만나면 너 이야기 가끔 하는 거알아? 내가 예전에 알던 애가 어쩌고하고.”


“내가 그랬었어? 기억도 안 난다 야.”


그런데 정말 기억이 안 났다. 난 나의 예쁜 것은 항상 외면하며 살았나 싶었다.


“응, 너 진짜 기억 안 나? 매일 그렇게 공부했잖아. 그때네가 얼마나 반짝반짝했는데, 넌 그걸 몰랐단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도 거기 살면서 너 같은 애를 못 봤어. 그래서 내가 너 좋아했잖아. 멋있어서. 난 그런 네가 항상 부러웠어.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졸려서 못하겠더라.덕분에 지금도 영어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아. 웃기지? 아무튼 친구야, 넌 진짜 너를 모른다. 좀 알아라! 너 자신을.”


라며 그녀 특유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디저트 접시를 싹싹 비웠다.


그런 해맑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늘 걱정 없어 보이는 네가 부러웠어. 너는 늘 오늘 하루, 바로 여기서 지금을 만끽하면서 사는 것 같았어. 난 늘 ‘이 일이 안 되면 다음 플랜이 뭐가 있을까’ 하면서 미래에 가서 걱정하고 있을 때, 너는 볼 때마다 현재를 살면서 지금처럼 깔깔 웃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으뜸이는 테이블 위에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커피의 빨대를 잡으며 조금 큰 소리 그리고 동그라진 눈으로 내게 말했다.


“어머머, 웬일이니?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진짜 웃긴다. 나 그때 밤마다 얼마나 걱정하면서 잠들었는지 몰랐구나? 너 잘 때 난 옆에서 매일 고민했어.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하나. 그거, 현재를 잘 만끽하는 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이잖아. 오늘 여기서 먹을 때도 난 너랑 이 음식들에만 집중했어. 이거 할때는 이거만 하는 거지 뭐. 너도 할 수 있어. 난 아직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거 못해. 푸하하.”


그러고는 으뜸이의 웃음소리를 한참이나 더 들었다. 그리고 나는 창밖을 봤다. 끊임없이 흐르는 양재천이 보였다. 어둠이 내린 그곳에는 가로등 불빛, 산책하는 사람들,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강아지, 아직도 초록이 반짝이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 옆에 지금 현재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이 모두 부정당한 것처럼 허무하고 덧없이 느껴졌는데, 그녀는 그 모든 시간을 ‘가장 열심히 사는 반짝이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내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조금은 조심스럽게 내려놓게 했다.


‘아, 맞다. 나 그런 사람이었지.’

난 늘 내 삶에 진심이었고, 치열하게 달렸던 사람이었지- 으뜸이는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다시 마주 보게 해주었다. 지금의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긴 여름의 시간이 그냥 지나가도록 두었을 뿐 망가진 게 아니었다.


그날 으뜸이와 헤어진 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양재천을 바라보았다. 밤 공기는 맑았고 강물은 가을의공기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속으로 생각했다.


‘서른일곱, 나는 양재천을 달려야겠다.’


그저 저 긴 천을 오롯이 혼자서 달리고 싶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나를 찾아오던 지독한 관성을 가진 부정적인 생각들을 내 어깨에서 떼어내고, 그 생각들이 다시 달라붙기 전에 힘껏 달려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싶었다.



그리고 집에 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문자가 왔다.


‘무슨일 있어? 입은 웃는데, 눈은 왜 이렇게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그렁그렁하지? 그냥 내 느낌인가? 그럼 다행일텐데.
친구야.
너는 무엇보다 반짝반짝이 제일 잘 어울려.
난 빈말 안하는 대쪽 같은 으뜸이야.
알지? 굿나잇:)’
-으뜸이-








"나는 망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던 것같아요. 그날 으뜸이와 먹었던 음식도 맛있었고, 식당에서 나오던 음악도 좋았어요. 그동안 저는 오감을 잃은 것 같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그 친구의 눈 속에 비치던 나였어요. 친구의 눈속에서 과거의 반짝이던 내가 현재의 초라해진 나를 위로한거였죠.


‘괜찮아. 지금 이 모습도 괜찮아. 옛날의 너도 지금의 너도 앞으로의 너도 모두 괜찮아.’


빨간 가디건을 입고 내게 예쁜 말을 요란하게 쏟아내던 내 친구는 사랑스러웠고, 그 앞에 나는 10년 전의 반짝이던 내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 날 생각했어요. 그동안 나에게는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 날 때를 맞춰 일어났을 뿐이고, 나는 아주 잠시 멈춰 서서 그 긴 여름의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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