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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D Jul 13. 2016

한국인의 제 2의 홈구장, 다저 스타디움

Dodger Stadium, Los Angeles, CA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이하 LA 다저스)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국민 구단’과도 같은 팀이다. 90년대 후반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며 한 마음으로 다저스를 응원했을 것이다. 부상으로 1년 넘도록 뜸해지긴 했지만 최근에는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선수의 활약상과 더불어 매일 아침 다저스 경기 결과를 살펴보는 팬들이 많았다. 두 선수 말고도 최희섭 선수나 서재응 선수도 한 때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활약했던 적이 있을 만큼 다저스는 한국 야구팬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국민 구단 LA 다저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저 스타디움 역시 한국인들에게는 제 2의 홈구장과도 같은 가장 친숙한 메이저리그 구장이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 대표팀이 베네수엘라를 대파하고 일본과 명승부를 펼친 경기장 또한 다저 스타디움이었다. 최근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미국 서부 여행 중에 빼놓지 않고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직접 가보지 않았더라도 중계방송으로 우리 선수들의 활약상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푸른색 다저 스타디움의 모습을 봤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다저 스타디움으로 가는 길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고향을 찾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013년 정규시즌 막바지에 류현진 선수 등판 경기에 맞춰 서부 야구장 여행을 계획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가 자이언츠 홈 경기를 보고 LA로 이동하여 다저스 홈경기를 본 뒤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까지는 경비 절약을 위해 그레이하운드 야간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여덟 시간을 넘게 달린 끝에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황량함 그 자체였다. 나름 다운타운 내에 위치한 터미널이라고는 하지만 LA가 워낙 면적이 넓은 도시라 그런지 주변에 높은 건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토요일 이른 아침이라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황량한 주변 분위기 속에서도 서던 캘리포니아 특유의 청명한 하늘만큼은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장시간의 버스 여정에 지쳐 있던 터라 우선 숙소에 가서 쉬기로 했다. 출발 전에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다저 스타디움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숙소를 잡아두었다. 미국은 유럽처럼 유스호스텔이 흔한 것도 아니고 한국처럼 도심지에 모텔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에어비앤비를 통해 야구장 방문에 딱 맞는,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저렴한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다저 스타디움의 주차장


숙소에서 푹 자고 나서 경기 시간에 맞추어 다저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LA는 미국 내 어느 도시보다 교통체증이 심각한 도시이다. 이를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다저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차들이 벌써부터 주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경기장 가까이에 숙소를 잡은 행운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심 내에 위치한 유니언 스테이션 기차역에서 경기 한 시간 반 전부터 십 분 간격으로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고 한다. 만약 숙소를 먼 곳에 잡는 경우에는 이 교통편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다만 셔틀버스 전용차선이 따로 있는지는 확인 못한지라, LA의 교통체증을 고려한다면 셔틀버스를 타더라도 아주 일찌감치 출발해야 할 것이다.

                                                       

Welcome to Dodger Stadium
다저 스타디움에서 바라본 주차장

차들이 많은 만큼 주차장도 어마어마하게 넓다. 숙소에서 주차요금 정산소까지 걸어온 만큼 다시 주차장을 지나수 걸어가야 경기장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실제로 다저 스타디움 주차장은 무려 16,000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2012년 당시 다저스 구단주였던 프랭크 맥코트가 이혼 소송에 휘말려 구단을 매각할 때도 주차장만은 팔지 않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야구장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니 드넓은 주차장에 차량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모습이 나름 장관이었다. 어렸을 적 잠실 야구장에 경기를 보러 갈 때 근처 탄천 주차장이 야구장에 온 차량들로 가득차 있던 모습이 기억나는데, 탄천 주차장 열 개가 다저 스타디움을 둘러 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차장 한 구석에서는 한인 관광버스도 몇 대 볼 수 있었다. 인근 지역에서 한인들이 단체로 다저스 경기를 관람하러 자주 오는 것 같았다.


다저 스타디움에서 바라 본 LA 다운타운

넓디넓은 주차장을 따라 걷는 것도 가뜩이나 지치는 일인데, 더군다나 길이 언덕길이었다. 다저 스타디움은 평평한 곳이 아니라 차베스 협곡의 언덕 경사면 위에 지어졌다. 언덕을 다 올라 경기장 코 앞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보니 LA 다운타운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힘겹게 올라온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언덕 꼭대기에서 야구장 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홈플레이트 뒤쪽 좌석으로 이어졌다. 특이한 점은 홈플레이트 바로 뒤 1층 좌석이 아니라 꼭대기층 좌석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대개의 야구장은 경기장에 입장하면 내 자리를 찾아 올라가기 바쁜데 다행히 다저 스타디움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언덕 위를 파내고 경기장을 건설했기 때문에 입구만 잘 찾아 들어가서 내려가기만 하면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구조였다.


유니폼으로 알아본 류현진 선수의 인기


홈플레이트 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56,000석 규모의 광대한 관중석이 눈 앞에 펼쳐졌다. 다저 스타디움은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이다. 한 번도 시도한 적은 없지만, 초기 설계 당시부터 외야석을 복층으로 올릴 경우 8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LA 시장이 확실히 규모가 크긴 큰 모양이었다. 다저 스타디움은 층마다 좌석의 색깔이 달랐다. 나중에 따로 구장 투어를 했을 때 들은 가이드 말에 따르면 각 좌석의 색깔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특징적인 자연환경을 감안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1층은 눈부신 태양빛을 뜻하는 노란색, 2층은 백사장과 사막의 모래를 상징하는 오렌지색, 중계석과 스위트 박스 위층은 언덕을 나타내는 푸른빛이 도는 녹색, 마지막 꼭대기층은 바다와 하늘을 의미하는 파란색이라고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색이 그 색이었나 하고 의구심이 조금 들긴 하지만 색깔의 조화만큼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중계방송을 통해서 봐왔던 경기장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 전경과 오버랩되면서 드디어 다저 스타디움에 도착했구나라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관중석 꼭대기에서 바라본 다저 스타디움 전경. 2014년 날씨가 흐린 날 구장 투어 때 찍은 사진이라 안타깝게도 하늘이 뿌옇다.



자리로 내려가기에 앞서 경기장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최대한 다양한 것들을 관찰하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등번호 99번의 유니폼과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항상 기사를 통해 LA 현지에서 류현진 선수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어떠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99번을 입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다수가 현지 한국 교민들이었지만 미국인 팬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경기를 관전한 이틀 중 류현진 선수가 등판한 둘째 날에는 99번 유니폼이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다저 스타디움의 터줏대감 반열에는 들지 못한 듯 했다. 클럽하우스의 유니폼 진열대나 팬들의 티셔츠에서 가장 많이 보인 이름들은 단연 프랜차이즈 스타인 클레이튼 커쇼와 지금은 남남이 된 맷 켐프, 그리고 당시만 해도 쿠바 돌풍을 일으키던 야시엘 푸이그였다. 또다른 프랜차이즈 스타 안드레 이디어와 멕시코 출신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애드리안 곤잘레스의 이름도 많았다. 물론 당시는 2013년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커쇼를 제외하고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터이다. 아마도 신인왕 수상을 예약해둔 코리 시거 저지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서 류현진 선수도 활약해서 피츠버그에 27번 티셔츠가 판을 치듯 LA에 99번 티셔츠가 다시 늘어났으면 좋겠다.


관중석에 들어서니 3루쪽 다저스 덕아웃 근처에 관중들이 한 데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두세 명의 선수들이 덕아웃 위로 관중들이 던져준 야구공에 싸인을 해서 다시 던져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불펜 투수 파코 로드리게스와 포수 팀 페데로위츠였다. 보통 메이저리그 야구장에서는 경기 전 훈련을 마치고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 날 선발 라인업에 빠진 선수 몇 명이 전담하여 관중들의 싸인 요청에 응해준다. 당시 다저스는 이미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확정지은 상태였기 때문에 선수들과 관중들이 한 결 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싸인공을 주고 받았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항상 공을 챙겨 다녔지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덕아웃 앞까지 가려면 비싼 1층 좌석 중에서도 맨 앞 쪽 구역에 진입해야 하는데 그 입구를 직원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아마 표 검사를 하는 듯 했다. 내가 어린 아이랑 같이 있으면 어떻게 통사정이라도 해서 진입을 시도해봤겠지만, 멀리 이국 땅에서 거절당하는 아픔을 맛보기는 싫어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서던 캘리포니아 야구장만의 한가로운 분위기


입장을 기다리는 관중들. 얼핏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많다. 사진처럼 다저 스타디움 주변에는 야자수가 유독 많이 심어져 있다.

다저 스타디움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것에는 중계화면으로만 봤던 모습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우선 경기장 뒤로 보이는 야자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명한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는 푸른 야자수는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LA의 날씨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해가 질 무렵에는 석양 빛을 배경으로 역광 때문에 어두워진 야자수의 모습은 운치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다저스 경기 중계방송 중 이닝 사이에 가끔씩 보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남부 캘리포니아 어디를 가도 야자수가 많긴 하지만 다저 스타디움 주차장을 시작으로 경기장 주변에 집중적으로 야자수가 심어져 있었다. 관중석 색깔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처럼 다저 스타디움을 그냥 야구장이 아니라 서던 캘리포니아의 랜드마크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경기 중간에 관중석 위를 둥둥 떠다니는 비치볼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조금 지나 지루해진다 싶을 때쯤 열 개 정도의 비치볼이 관중석 여기저기를 떠다니고 있었다. 예전부터 비치볼이 그라운드에 들어와서 경기가 잠시 중단되는 장면을 방송으로 봤던 기억이 있는데 바로 그 비치볼이었다. 별 것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기 주변으로 비치볼이 오면 한 번 씩 쳐보려고 애를 써댔다. 그러다가 잘못 쳐서 행여 볼이 다른 층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주변 사람들의 엄청난 야유 세례를 감수해야 했다. 요즘에는 다른 구장에도 가끔 비치볼이 등장하지만 원조는 다저 스타디움이다. 다저 스타디움의 분위기는 그 어떤 야구장보다 여유롭고 한가했는데, 이미 순위가 결정된 이후라 그랬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비치볼이 그 분위기에 한 몫 거들고 있었다. 사실 좋게 말해서 여유로운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소 산만한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다른 구장 같으면 승부가 다 결정난 7~8회에 시작되었을 파도타기가 이 날은 4회부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파도는 다섯 바퀴를 돌아도 끝날 줄을 몰랐다.



밀리언 셀러 다저 덕과 한국 술


다저 덕 사 먹으려고 줄 선 사람들

다저 스타디움의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다저 덕(Dodger Dog)’이다. 아주 기본적인 야구장 핫도그이지만 안에 들어간 소시지가 25센티미터는 되어 빵보다 길게 삐져 나온다. 50년이 훌쩍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다저 덕은 그 판매량이 어마어마하다. 미국 핫도그-소시지 협회(National Hog Dog and Sausage Council)에서 과거 소비량을 바탕으로 예측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동안 다저 스타디움에서 무려 3백만 개가 넘는 핫도그가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메이저리그 서른 개 구장 중 압도적 1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2위인 텍사스 레인저스 글로브라이프 파크는 약 150만 개에 그쳤다. 아무리 다저 스타디움의 규모가 가장 크고 최근 인기가 좋다고 해도 3백만 개의 핫도그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 수치가 정확하다면 2014년에 다저 스타디움을 찾은 관중 5명 중 4명은 핫도그 하나씩을 먹었다는 것이다. 먹어보니 아주 뻔한 핫도그 맛인데 신기하게 맛있었다. 많이 팔려서 빵도 소시지도 따끈따끈하다보니 입에 쑥쑥 들어갔다. 성인 남자라면 두세 개는 금방 먹어치울 것 같았다. 많이 팔리는 데에는 역시 다 이유가 있었다.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계속 입에 들어가는 다저 덕


다저 스타디움에는 다른 경기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맛도 찾을 수 있었다. 김치를 넣은 핫도그인 ‘김치 덕’이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 국산 맥주를 팔고 있었다. 하이트맥주를 미국 야구장에서 보니 새삼 반가웠다. 한국 주류의 경기장 내 입점은 과거 류현진 선수의 통역 업무를 담당했던 마케팅 담당자 마틴 김 씨가 입점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2013년 당시 내가 방문했을 때 미국 맥주는 12달러 50센트에 판매되고 있었지만 하이트맥주의 가격은 6달러에 불과했다. 용량 차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두 배 차이까지는 아니었다. 전략적으로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맛없기로 유명한 한국 맥주의 소문이 LA까지 났던 모양이었다. 물론 한국 야구장 맥주 가격에 비하면 여전히 비싼 가격이긴 하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우명했지만 충격적이게도 참이슬 소주를 팔고 있는 소주 바가 경기장 내에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깡소주가 아닌 소주 칵테일 형태로 팔고 있었고 다른 주류도 판매하고 있었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소주를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몇몇 관중들이 한모금씩 홀짝거리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삼촌과 함께 야구장에 갈 때 삼촌이 몰래 숨겨 가던 팩소주의 추억이 떠올랐다. 한국의 음주 문화 전파에 다저 스타디움이 톡톡히 기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저 스타디움 내의 참이슬 소주 바


야구장에는 한국인도 많았지만 히스패닉 관중이 정말 많았다. 히스패닉 관중들은 백인 관중보다 흥이 넘치는 편이라 경기장 분위기가 동부나 중부 야구장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가끔은 야구장이 아니라 중남미 축구장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특히 LA는 멕시코 국경과 그리 멀지 않다보니 미국에서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이다. 야구장에도 멕시코 출신 관중들이 많았는지 같은 멕시코 혈통의 애드리안 곤잘레스가 타석에 등장할 때마다 큰 환호성이 들렸다. 환청이 들릴 정도로 중계방송을 통해 많이 들어 익숙한 곤잘레스의 등장 음악인 ‘엘 마리아치 로꼬(El Mariachi Loco)’가 경기장에 울려퍼지자 (지금은 다른 곡으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멕시코 전통 가락에 맞춰 덩실대는 히스패닉 관중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관중들


이처럼 다저 스타디움에는 다른 경기장에는 없는 특유의 볼거리, 먹을거리, 분위기가 있었지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동상이었다. 다저스도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전통의 명문 구단이자 재키 로빈슨, 샌디 쿠팩스와 같은 걸출한 스타 선수를 배출한 구단임에도 동상 하나 없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동상 대신 다저스의 영구 결번에 해당하는 숫자 모형들이 홈플레이트 게이트 바깥에 세워져 있었다. 관중의 상당수인 히스패닉 관중을 배려하여 모형 한 쪽에는 각 영구 결번 인물에 대한 영어 설명이, 다른 한 쪽에는 스페인어 설명이 곁들어져 있었다. 아마도 60년 넘게 지금까지 다저스 경기 중계방송을 하고 있는 빈 스컬리 씨가 언젠가 은퇴하게 되면 마땅히 결번할 번호가 없는 그의 동상이 다저 스타디움 어딘가에 세워지지 않을까 하고 3년 전에 예상했는데,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스컬리 씨를 위해 다저스 주변도로 이름을 '빈 스컬리 애비뉴'로 바꿨다고 하니 한 동안 다저스에서 동상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지구 라이벌 팀 ‘산 사나이’ 토드 헬튼의 마지막 경기


주말 두 경기를 관전했지만 아쉽게도 다저스는 모두 한 점 차로 패하고 말았다. 이미 순위가 결정된 이후에 치러진 경기였기 때문에 다저스도, 상대 팀인 콜로라도 로키스도 무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류현진 선수는 둘째 날 경기에 선발 등판했으나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4이닝만을 소화했다. 다만 2실점을 하면서 시즌 초 목표로 했다던 방어율 2점대 진입이 실패하고 말았다. 방어율이 정확히 3.00에 머물러서 아웃카운트 한 개만 더 잡았으면 하는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을 앞둔 돈 매팅리 감독의 결정은 단호했다.         


이 날 경기는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한 선수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경기였다. 바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산 사나이’ 토드 헬튼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이다. 헬튼은 로키스에서만 17년 선수생활을 한 선수로서 박찬호 선수와 김병현 선수가 한창 전성기에 맞붙었던 정상급 타자로 우리나라 팬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다저스는 같은 지구 경쟁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의 마지막을 섭섭지 않게 대접해주었다. 경기에 앞서 헬튼에 대한 헌정 영상과 함께 빈 스컬리 씨의 축하 메세지를 전광판에 상영했다. 그의 마지막 타석에서는 모든 홈 관중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주고 헬튼도 인사로 화답하는 뭉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헬튼의 야구인생 마지막 경기이자 다저스의 2013년 정규시즌 마지막 홈 경기이도 했던 이 날은 다저스에서 지정한 ‘팬 감사의 날(Fan Appreciation Day)’이었다. 이닝과 이닝 사이에 무작위로 좌석번호를 추첨하여 전광판으로 사은품 당첨 결과를 알렸다. 다저스는 2013년 한 해 동안 메이저리그 최다인 374만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한 만큼 사은품의 스케일도 남달랐다. 다음 시즌 시즌권부터 해외 여행상품권, 카지노 호텔 숙박권 등 다양한 선물의 주인공이 경기 내내 가려졌다. 물론 30년 인생 동안 파울볼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나였기에 이런 이벤트에 내가 당첨될리는 만무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선수단과 팬들이 한 해를 마감하는 영상을 스크린으로 함께 시청하고 포스트시즌을 향한 각오를 다지는 시간도 가졌다. 모든 이벤트가 마무리된 후에는 꼬마 팬들이 부모와 함께 다저 스타디움 잔디 위에서 캐치볼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도 주어졌다. 경기가 끝나고 어린이 팬들이 베이스를 돌 수 있는 이벤트는 많이 봤지만, 잔디의 질을 무엇보다 철저히 관리하는 메이저리그 구장이 잔디를 밟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처음 봤다. 팬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실하게 해주고 있었다.


다저 스타디움이 그래도 한국인에게는 제 2의 홈구장인데 두 경기 밖에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마침 이듬해에 다시 한 번 LA에 갈 기회가 생겨, 비록 홈 경기는 없었지만 짬을 내어 구장 투어에 참가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경기장 곳곳을 둘러보는 와중에 다저 스타디움이 메이저리그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야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근 구단주가 바뀌고 구장 시설이 상당 부분 현대화되었기 때문에 지어진 지 50년이 넘는 오래된 야구장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또한 1962년에 개장한 다저 스타디움은 메이저리그 최초로 지어진 ‘어느 좌석에 앉아도 경기장이 잘 보이는 야구장’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전용 야구장은 2층 좌석을 지지하는 두꺼운 철기둥이 1층 좌석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1층에 잘못 앉으면 철기둥이 그라운드를 가로막고 있어서 제대로 경기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다저 스타디움보다 나이가 많은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나 시카고의 리글리 필드를 가게 되면 철기둥 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보기 힘든 좌석이 꽤 있다. 하지만 다저 스타디움을 지을 때는 별도의 철기둥의 지지 없이 위층 좌석을 올리는 공법을 선택하여 관중들의 편의를 도모했다고 한다.


투어는 다저스의 역대 주요 수상자들의 트로피가 전시된 공간으로 이어졌다. 이 곳은 경기가 있는 날에는 홈플레이트 바로 뒷좌석 관중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는 MVP, 사이영 상, 신인상,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 수상자까지 다저스의 화려한 역사를 장식해 온 선수들을 발자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 ‘박찬호 도우미’로 유명했던 라울 몬데시의 골드글러브 트로피도 두 개나 보였다. 여기서 알게 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이영 상 트로피는 투수가 야구공을 쥐고 있는 손 모양의 트로피인데 수상자가 우완투수이든 좌완투수인든 오른손잡이 트로피만 준다는 것이었다. 가이드는 다저스의 사이영 상 수상자에는 대대로 쿠팩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커쇼에 이르기까지 좌완투수가 많은데 왜 왼손 트로피는 만들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했다. 장난기 섞인 볼멘소리 속에서도 마운드가 강한 전통의 투수왕국 다저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투어 막바지에는 다른 야구장 투어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덕아웃에도 내려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실제 선수들이 사용하는 공간에 있다는 것은 어느 팬에게나 즐거운 일일 것이다. 투어에 참가한 팬들이 가장 많이 사진을 찍는 곳도 다저스 덕아웃이었다. 특히 한국 팬들에게는 류현진 선수가 유리베나 푸이그와 장난을 쳤던 바로 그 곳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묘한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다저스 덕아웃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구장 투어 참가자들. 역시나 한국 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다저 스타디움은 그저 평범한 야구장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구장을 지은 지 오래되었다 보니 최근 20년 넘게 유행하고 있는 메이저리그 야구장의 건축 스타일인 복고풍을 따르고 있지도 못하다. 건물 외관이 대단히 멋지게 생긴 것도 아니고 내부에 그럴싸한 조형물도 없는, 그냥 야구 경기장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국프로야구의 야구장들과 가장 닮아 있는 야구장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경기장에 있으면 나도 모를 익숙함과 편안함이 든다. 물론 규모 면에서 한국 야구장과는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그 규모에 압도된다기보다 친근함이 먼저 느껴지는 야구장이 다저 스타디움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친근함은 오랫동안 LA 다저스에서 활약해 온 한국 선수들을 응원해오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다저스에 대한 애정 때문에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렇게 한국인에게는 고향 같은 제 2의 홈구장 다저 스타디움에서 더 많은 한국 팬들이 중계방송으로만 봐왔던 현장을, 그리고 서던 캘리포니아 특유의 한가로운 분위기를 직접 눈과 귀와 피부로 실감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파란 하늘만 봐도 기분 좋아지는 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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