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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33

by 윤금현

33 장.



똑똑.

송영구 아리랑 법무실장은 출근하자마자 이현석 회장실로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영구는 현석의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회장님, 입금 되었습니다. 백 억입니다.”

현석은 영구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안도의 빛을 띄웠다. 그러나 한 구석에는 약간 어두운 기운도 보였다.

“그럼 가맹점들에게 알리면 되는군. 한 달 정도면 다 될 수 있겠지?”

“예.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일단 그 백 억으로 가맹점 보증금을 준 다음, 태화 투신에서 다시 백 억이 들어오면 그걸로 사채를 갚기로 하지.”

영구는 끄덕끄덕했다. 회장이 그래도 열심히 애를 쓰는구나. 하지만 내 계획은 절대 모를 거야.

현석은 물끄러미 영구를 바라보았다.

“송 실장,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예?”

영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면 절대 안 된다.

“회장님, 그럼 이자 십 억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매출에서 갚기로 할 거야. 지금도 아리랑의 매출은 괜찮은 편이니까.”

“하지만 회장님 아드님인 최준영에게, 땅을 살 매입 자금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참, 그걸 잊었군. 그것도 몇 십 억 들텐데…….”

“회장님, 가맹점들이 가지고 있는 가게는 우리 아리랑의 땅이 아닙니다. 그건 점주들이 각자 마련한 땅이고, 상당수는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걸 담보로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현석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사업에 충실히 매진하는 거야. 그 방법 밖엔 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맹점들에게 공문을 보낸 다음, 그 다음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믿고 맡기네.”

영구는 현석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드디어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이 총알이 누구에게 맞느냐 하는 것만 남았다. 영구는 그게 절대 자기는 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손혜정은 내 손에 들어왔고, 손혜정이 들어오면, 태화 투신도 내 손에 들어온다는 생각이 든 영구는 자기의 금빛 찬란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 * *


“이진영 상무를 내 방으로 오라고 하게.”

현석은 인터콤으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고,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이제 다음 수를 놓을 차례인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진영이 현석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빛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진영아, 거기 앉아라.”

진영이 소파에 앉자, 현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영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어째 얼굴이 안 좋다? 무슨 일 있냐?”

“…….”

“너, 혜정이하고 잘 안되는구나. 그렇지?”

“예.”

진영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혜정이하고 결혼할 마음이 없지?”

현석은 조용히 말했고, 진영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그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래. 그렇게 해라.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너하고 혜정이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그만 접자.”

“예.”

진영은 짧게 대답했고, 아버지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안 되는 것은 바로 포기해 버리는 현석의 성격이 때로는 일을 쉽게 만들기도 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아버지, 그런데 준영이 형이 혜정 씨한테 관심이 있습니다.”

진영의 말에 현석이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진태도 준영이 얘기를 하던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구나.’

“준영이가 혜정이한테 관심이 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준영이가 그러던?”

진영은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잠시 생각을 했다. 혜정은 임신을 했고, 그 아이의 아빠가 준영이라는 말을 여기서 할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잠시 덮어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영은 입을 열었다.

“준영이 형이 그렇게 말했어요. 나쁘지 않잖아요? 혜정이는 대단한 여자라는 거, 아빠도 잘 아시잖아요. 제가 감당이 안 되는 그런 여자.”

‘진태가 준영이를 마음에 들어한다? 준영이도 혜정이를 좋아한다? 진영이도 알고 있다?’

“아빠, 저는 실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요.”

현석은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이 녀석이 그래서 혜정이를 싫어하는구나.’

“누구냐?”

“아직은 말씀 못 드려요. 아직…….”

“왜 그러니? 거기도 문제가 있냐?”

진영의 눈빛이 더욱 슬퍼졌다.

“예. 그 여자는 저를 안 좋아해요.”

현석은 진영을 찬찬히 바라보았고, 진영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네가 좀 더 큰 모양이구나. 괜찮다. 그렇게 슬픔이나 괴로움도 배워야 하는 법이지.”

“예.”

“그 여자하고 잘 되면, 그때 데려와라. 알겠지? 그리고 당장 할 일이 있으니, 여자 생각은 당분간 하지 마라.”

현석의 단호한 말에 진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식을 팔아야 한다. 당장 팔 것은 아니고, 두어 주 있다가 팔 거니까, 너는 그동안 회사 이미지하고 매출을 잘 관리해라. 주식이 올라야 하니까.”

“예. 가맹점 문제로 그러시는군요?”

“그렇다. 난 이 사회에 새로운 회사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다. 이제 더 이상 가맹점 등치면서 하는 사업은 안 돼.”

진영은 정말로 아버지 이현석이 대단하게 보였다. 어느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가려 하는 아버지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 * *


“부장님, 저 송영구입니다.”

상원은 영구의 전화를 받자, 주위의 부하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보내주신 자금은 잘 받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 작전을 부탁드립니다.”

상원은 양미간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실장님, 주식을 올려달라는 말씀이신데, 그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좀 걱정이 되어서 그러지요.”

“하하, 걱정 마세요. 제 연수원 동기들이 판검사만 해도 수 백 명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제가 다 해결합니다. 아무 걱정 말고 진행해 주십시오.”

상원은 영구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그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주식 시세를 인위적으로 올리는 것, 소위 작전을 하자는 것인데, 그 다음 어떻게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상원이었다. 주식이 올라가면 아리랑은 좋겠지만, 그러면 아리랑은 주식을 팔아, 그 차액으로 이자를 갚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상원이 집어넣은 돈이 그대로 이자로 돌아올 판이다. 상원으로서는 아무런 이득도 없게 된다.

“실장님, 우리는 무슨 이득을 보게 됩니까?”

“휴우……. 부장님, 계속 주가를 올리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리지요. 정점을 찍기 바로 전에, 그건 제가 알려드릴 겁니다만, 찍기 바로 전에 팔면 됩니다. 태원으로서도 상당한 이익을 볼 겁니다. 그 다음 정점을 찍게 되겠지요. 그때 아리랑이 주식을 팔 겁니다. 그러면 아리랑도 이익을 볼 거 아닙니까? 이자 십 억이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은행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백 억 빌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싫어서, 그리고 부장님 사업도 도와드릴 겸해서, 백 억을 빌린 거 아니겠습니까?”

“저야 이자를 받으니 좋기는 합니다만……. 이자는 분명히 받을 수 있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십 억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아리랑은 충분히 지급할 능력이 됩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상원은 전화를 끊었다.

“형님, 어째 얘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군요.”

부하 중 한 명이 말을 하자, 상원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걱정 마라. 수 틀리면 묻어버리면 되니까. 일단 아리랑 주식을 대량으로 사라.”

상원의 눈에 비장한 각오가 떠올랐다.


* * *


일찍 퇴근한 현석은 미현, 윤영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보, 그 가맹점 일은 잘 되고 있어요?”

“응, 잘 되고 있어. 송 실장이 잘 하고 있어.”

“참 그 사람은 일을 잘 해요. 여보.”

현석은 미현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빠, 오늘 아리랑 주식 올라가던데.”

현석은 윤영의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그러더냐? 우리가 가맹점을 정리하고, 직영제로 한다는 소문이 난 모양이구나.”

“아빠,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직원으로 하면, 월급은 어떻게 줄려고?”

현석은 윤영의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빠, 안 그래? 직원이 천 명은 될텐데……. 어휴, 한 달 월급만 얼마야?”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된다. 그런데 너는 결혼 안 하냐?”

윤영은 혀를 내밀며 현석에게 메롱을 했다.

“너, 아빠한테 그게 무슨 버릇이야?”

“두 오빠들이 모두 가면 나도 갈께.”


* * *


선경은 밥을 먹다말고, 또 생각에 잠겼고, 그런 선경의 마음을 순화가 눈치를 챘다.

“선경아, 너 남자 문제구나?”

선경의 눈이 커지면서, 순화를 보았다.

“엄마, 어떻게 알았어?”

“얘가……. 엄마도 여자다. 여자의 눈빛은 척 보면 안다.”

“말도 안 돼.”

종환은 말없이 두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선경아, 여자는 딱 두 가지 고민만 한단다.”

“그게 뭐에요?”

선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종환이 끼여들었다.

“여보, 그게 뭔데? 나도 궁금해.”

순화는 종환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하나는 남자를 어떻게 꼬실까 하는 거야.”

“에이, 엄마도 참……. 그건 나도 알겠다.”

“하하하. 그래. 남자인 나도 그건 알겠네.”

“엄마,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순화는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두 번째는 말이야. 어떻게 남자를 정리할까 하는 거야.”

종환과 선경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종환의 입에서 놀람이 터져나왔다.

순화의 말은 우스개처럼 들렸지만, 선경의 가슴은 바늘에라도 푹 찔린 것처럼 쓰라렸다. 엄마가 말한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자신에게 생겼으니까.

“그럼, 엄마, 이런 문제는 어때?”

“말해 봐.”

“만약에 말이야…….”

종환과 순화는 선경의 입만 쳐다보았다.

“만약에……. 진영 오빠가 나한테 관심이 있으면…….”

선경의 말에 종환과 순화는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만약이라고는 했지만, 아마 그런 분위기를 선경이 느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둘에게 들었다.

“진영이는 너하고 남남이니까……. 문제될 건 없지만……. 거 참 애매하구나.”

종환은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고, 순화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