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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38

by 윤금현

38 장.



12 월도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진영은 아침 일찍 빌라를 나와, 회사 일을 좀 처리한 다음, 점심을 먹은 다음 호텔에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호텔 스위트 룸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선경이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이미 돌아선 마음은 변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영은 답답하기만 했다. 형 준영도 마음에 안 들었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변호해 주지 않는다고 느낀 진영은 다시 준영과 얘기를 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밖을 보니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호텔 방 안에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영이 문을 열어주자, 준영이 들어왔다. 호텔 방에 비치된 가운 차림의 진영은 하나 더 있는 가운을 준영에게 던져주었다.

“이거 입어.”

자신에게 휙 던져진 가운을 보더니, 준영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형하고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는 거야.”

준영은 하하 웃으면서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준영이 문을 열었고, 호텔 직원이 카트를 밀고 방으로 들어왔다. 카드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들과 양주 한 병, 맥주 다섯 병 그리고 소주도 두 병 있었다.

음식 상이 거실에 차려지자, 준영과 진영은 마주보고 앉았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더니, 진영은 담배를 꺼내 식탁 위에 내려 놓았다. 둘은 담배를 하나씩 피면서 조용히 서로를 보았다.

“형, 나 그만 포기할까 봐.”

“뭐를?”

“선경이를. 그리고 회사도.”

준영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진영아, 선경이는 그렇다 쳐도, 회사를 어떻게 포기하냐? 아버지가 가만둘 것 같으냐?”

“형, 내 인생은 내 인생이야. 형도 그렇잖아.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어?”

준영은 술을 한 잔 마셨다. 가장 아픈 곳을 진영이 찔러온 것이다.

“이제 그것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다시 친부모를 보니, 그냥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더라.”

“뭐가 이해가 돼?”

“내 아버지가 준 돈으로 집도 얻고 했다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

진영은 담배를 꺼내 또 피웠다.

“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글쎄……. 어쩌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활에 몰리면……. 사람들이 돈 때문에 죽기도 하잖아. 소중한 생명을 그렇게 버릴 정도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형은 아빠가 될 수도 있어. 혜정 씨가 아기를 가졌잖아.”

준영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그러게 말이다. 그건 나도 어찌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찾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형, 나 같으면 찾아갈 거야. 가서 솔직히 말하지 뭐.”

준영은 술을 한 잔 더 마신 다음,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해결될까? 혜정 씨 성격을 생각하면……. 휴…….”

“아마 혜정 씨는 아이를 낳을 거야. 그건 내가 잘 알아.”

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고 상상을 하니, 정말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형, 회사를 형이 받는 게 어때?”

“그럼 너는 뭐하려고?”

진영은 잠시 창 밖을 보았다. 눈발이 살살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눈이 오려고 하네. 저기 좀 봐.”

준영은 진영의 말대로 창 밖을 보았다. 하얀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쟤들은 무슨 생각으로 떨어질까?”

“야, 이진영! 너 오늘 이상하다.”

“형, 내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형이 회사를 물려받는 게 어때?”

준영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건 절대 아버지가 허락하시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지?”

“나한테 분명히 말을 하셨어. 회사는 진영이에게, 나는 농업 건물을.”

준영은 쐐기를 박듯 말을 했다.


* * *


김상원은 사무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전에 걸려온 전화 때문이다. 지금도 송영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최준영과 이진영이 XXX 호텔 스위트 룸에 있습니다. 내가 전화를 하면 분명 둘은 나올 겁니다. 아마 대리 기사를 부르겠지요. 술 마시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까요. 어떻습니까? 한 번에 둘을…….’

천장을 쳐다본 김상원은 물고 있던 담배를 껐다. 이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야, 너 말이야. 지금 당장 XXX 호텔로 가서 로비에서 대기해라.”

“예. 부장님.”

상원의 부하,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허름한 점퍼를 걸치더니, 밖으로 잽싸게 나갔다.


* * *


호텔 방 안에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영은 폰 화면을 보았다.

“어, 송 실장님이네?”

“야, 받지 마라.”

준영이 얼른 진영을 제지했으나, 벌써 늦었다.

“예. 실장님, 무슨 일입니까? ……. 예? ……. 예?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 아, 괜찮습니다. 대리 부르면 되니까요.”

진영은 전화를 끊었고, 준영의 얼굴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왜? 무슨 일이냐?”

“김상원이라고 알지?”

김상원의 이름을 듣자, 준영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거기서 사채를 빌렸는데, 지금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나 봐. 김상원 사무실로 와 달래.”

“거 봐라. 내가 뭐랬냐? 송영구 이 사람…….”

“형, 안 갈 거야?”

준영은 술기운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진영은 좀 많이 마셨지만, 준영은 그저 분위기만 맞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상원 그 사람 잘 알지?”

“알지. 같이 일했으니까. 태원 새마을 금고 이사장 아들이야. 김태원의 아들이지.”

진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군.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같은 글자를 쓰다니…….”

“뭐 말이냐?”

“생각해 봐. 아버지가 김태원, 아들은 김상원, 이상하잖아? 우리는 이렇게 이름을 안 쓰는데.”

준영도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왜 ‘원’ 이라는 글자를 같이 사용할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진영은 급히 일어나더니, 거실 소파에 널려 있던 셔츠와 바지를 집어 입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진영이 비틀거리며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준영은 피고 있던 담배를 껐다.

“어? 진영아, 옷이 이상하다? 바뀐 거 아니냐?”

“몰라. 나 먼저 나가서 체크 아웃할께. 아, 대리도 불러야 해.”

진영은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체크 아웃하겠다고 하면서, 대리 기사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했다.

진영은 호텔 문 옆의 신발장에서 차 키를 집어들더니, 서둘러 방을 나섰고, 준영은 진영이 남긴 진영의 옷을 입었다. 주머니를 만져보니 진영의 지갑이 들어 있다.

“아, 시계.”

준영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선경이 준 시계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내려가서 진영의 지갑과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진영은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냈다. 그런데 시계와 차 열쇠가 같이 나오자, 진영은 호텔 프론트에 벤츠 열쇠를 맡기면서, 자신의 손목에 시계를 찼다. 선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겠지? 한 번 차 봐도.’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다 달라는 진영의 부탁에, 진영을 잘 알고 있는 직원은 얼른 차 키를 가지고 지하로 내려갔다. 특별 손님에게 해주는 일종의 서비스였다.

잠시 후, 호텔 정문에 봉고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때 호텔 마당 한쪽에서 검은색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오더니, 전화를 거는 남자를 붙잡았다.

“왜 그러세요?”

“여기 대리비 2 만 원입니다. 이거 받고 그냥 가세요.”

“당신들 누구요? 왜 이러는 거요?”

“좋게 말할 때, 돈 받고 꺼져.”

검은 옷의 남자가 으름장을 놓자, 겁에 질린 대리 기사는 돈을 받더니, 호텔 밖으로 얼른 사라졌다. 다른 남자가 전화를 걸자, 호텔 로비에 있던 허름한 점퍼를 걸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 앞에 지하에서 올라온 벤츠가 멈췄다. 프론트 맨이 내려서 호텔로 들어갔고, 준영과 진영이 밖으로 나왔다. 점퍼의 남자가 둘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준영과 진영은 뒷좌석에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강남역으로 갑시다.”

벤츠의 앞 좌석에 탄 사람이 행선지를 물어보자, 준영은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김상원의 사무실로 가려는 것이다.

이윽고 차는 밀려드는 차량의 홍수 속으로 들어가더니,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골목길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너무 막히는데요.”

“빨리만 갑시다.”

준영이 말하자, 대리 기사 흉내를 내고 있는 점퍼의 남자가 어두운 골목으로 차를 몰아넣었다. 저 앞에 환히 불이 켜진 도로가 보였다. 왕복 2 차선의 작은 도로였다.

“저기로 해서, 좌회전해서 갈 겁니다.”

남자의 말에 준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남자는 안전벨트를 바짝 조이더니, 정면의 대로로 차를 몰았다. 골목 끝까지 간 벤츠는 그대로 직진을 했다. 그순간 왼쪽에서 검은색 카니발이 달려오더니, 그 속력 그대로 벤츠의 왼쪽 뒤를 들이받았다.

쾅!

충격으로 벤츠는 빙글 돌았고, 중앙선을 넘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오던 택시가 다시 벤츠의 뒤에 부딪쳤다.

쿵!

끼이익!

택시는 멈췄으나, 처음 들이받은 검은색 카니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운전석 뒤에 앉아 있던 진영은 카니발의 충격 때, 왼쪽 뒷문에 부딪쳤다가 준영에게로 튕겼다. 그 다음 택시의 2 차 충격 때, 뒷좌석에 그대로 부딪쳤고, 준영은 진영의 몸 위에 쓰러졌다.

준영은 운전석 문이 열리며, 점퍼의 남자가 밖으로 뛰쳐 나가는 것을 보면서, 깜박 정신을 놓고 말았다.


* * *


“예? 병원이요? ……. 알겠습니다.”

종환은 순화를 보면서 말했다.

“교통 사고래. 준영이가.”

순화의 얼굴이 순간 새파랗게 질렸다. 옆에 있던 선경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빠, 같이 가!”

선경의 말에 종환이 끄덕이자, 순화와 선경은 방으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했다.


* * *


병원 응급실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종환과 순화 그리고 선경은 현석, 미현 그리고 윤영과 마주쳤다.

“어? 선생님?”

현석이 인사를 하자, 종환은 깜짝 놀랐다. 순간 머리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진영이도…….”

미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흑흑…….”

현석의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예. 둘이 함께 사고를 당했답니다. 뺑소니랍니다.”

“이럴 수가.”

종환은 현석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선경은 눈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응급실 안쪽을 둘러보더니, 의사들 몇 명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얀 침대 위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옷은 피투성이고, 신발은 벗겨져 있었다. 눈길을 올려 얼굴을 보니, 머리 전체에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침대 옆 링겔을 본 선경은 침대의 남자를 다시 보았다. 손등에 꽂혀 있는 바늘이 보였고, 그 아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선경이 준 시계.

‘헉!’

선경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손으로 입을 가렸으나, 그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의사들이 바이탈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런 선경의 뒤에서 종환과 순화가 다가와, 선경을 일으켜 세우더니, 응급실 한쪽으로 데려갔다.

“엄마! 준영 오빠가…….”

의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최준영 씨 보호자를 찾았다.

종환은 앞으로 나섰다.

“접니다만…….”

“지금 바로 수술을 해야 합니다. 동의서에 사인을…….”

젊은 의사는 종환을 데리고 갔고, 의사에게서 지갑과 휴대폰 그리고 담배를 받은 순화와 선경은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현석과 미현과 윤영은 또 다른 침대로 갔고, 거기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았다. 미현의 눈에 익은 진영의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역시 머리와 얼굴 한쪽에 붕대를 한 채 누워 있었다. 옷도 피투성이였다. 침대 옆에 있던 의사가 돌아보더니 말을 했다.

“보호자 되세요?”

“예.”

“이진영 씨는 괜찮습니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것이 좀 있을 뿐, 다른 데는 괜찮습니다.”

“이 피는 다 뭡니까?”

현석이 물었다.

“아, 이건 동승자가 흘린 겁니다. 그때 묻은 것 같습니다.”

의사는 지갑과 폰을 침대에 놓았다.

“진영아!”

미현이 침대 곁에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왼눈에 붕대를 한 남자는 오른눈을 뜨더니 미현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아 보였다. 준영은 부옇게 보이는 앞을 보며,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그러나 준영에게 그 엄마는 순화인지 미현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음 속에 있는 두 명의 엄마.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분은 누굴까?’

“아직 제대로 안 보일 겁니다. 시신경쪽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동승자는 두개골에 충격을 받았거든요. 이 사람은 그 사람 덕분에 충격을 덜 받았습니다.”

현석은 의사의 말을 듣자,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입양 보낸 준영이 이제는 교통 사고에서 진영까지 보호해 준 것이다. 정말로 운명이 얄궂다고 느끼는 현석이었다.

“여보, 현석 씨! 준영이는 어떡해?”

두 아들이 한꺼번에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 미현은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준영이는 양부모가 돌봐 줄 거야. 우리가 거기에 끼여 드는 건 좋지 않아. 안 그래?”

현석의 말에 미현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 * *


병승은 혜정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병승은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혜정이 일어나 앉았다.

“누나, 뭐 좀 상의할 게 있는데…….”

“앉아라.”

혜정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누나, 소희 말이야.”

병승의 말에 혜정이 빙그레 웃었다.

‘어째서 이렇게 남자들은 여자 때문에 다들 고민할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누나, 듣고 있어?”

“그래. 내가 뭘 도와줄까?”

“난 소희 마음을 모르겠어. 줄 듯 말 듯 하면서……. 사람을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혜정은 병승의 손을 잡았다.

“우리 동생이 이제 다 컸네. 그런 문제로 고민도 하고.”

병승은 혜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나가 완벽하고 완전한 해결책을 알려 주지. 자, 적어라.”

“누나, 그거 오십 년은 된 코미디야.”

병승은 멋적게 웃었다.

“첫째. 반지를 산다. 그것도 아주 비싼 걸로. 음……. 다이아가 좋겠군. 한 2 캐럿 정도로.”

혜정의 말에 병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다음, 두 번째. 분위기 좋은 데 가서, 결혼하자고 한다. 물론 반지를 꺼내 놓고. 반지가 없으면 안 돼.”

이제 병승의 얼굴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다.

“누나, 그러면 문제가 해결돼?”

“소희도 여자야. 나도 여자고. 여자는 여자만의 뭔가가 있어. 알겠니?”

“그게 뭐야?”

“여자는 본능적으로 때를 알아. 내 목숨이 걸린 때를.”

“그래서?”

“목숨이 걸리면, 여자는 결정을 내려. 여자와 밀고 당기고 하는 게 힘들지? 그땐 말이야, 마지막 선택을 하게 만들어. 그럼 여자는……. 선택해.”

“만약?”

“그래. 만약 거절당하면, 깨끗이 잊어. 문제 해결.”

병승의 얼굴이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의 얼굴이 되었다. 두 눈에 비장함이 서렸다.

“역시, 누나는 대단해.”

혜정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누나,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거든.”

“뭔데?”

“돈 좀 빌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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