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장.
하얗게 칠해진 병실 안에서 준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 밖으로 아침 햇살이 비췄다. 이제 12 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고, 며칠만 지나면 새해가 될 것이다.
준영은 얼굴의 왼쪽 절반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직도 머리가 욱신욱신했지만, 그래도 정신은 말짱했다.
‘대체 누굴까? 누가 이런 짓을 했지?’
준영은 차분히 생각을 하기로 했다. 너무나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현석과 미현이 들어왔다.
“진영아! 괜찮냐?”
‘이건 또 뭐지?’
“진영아!”
미현은 침대 옆에 앉더니, 준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짝 잡았다. 머리를 좌우로 천천히 돌려본다.
‘날 진영이로 아는 건가?’
“여보, 진영이는 괜찮은 거 같아.”
현석은 가만히 준영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진영아, 준영이는 지금 수술 끝내고 중환자실에 있다. 지금은 볼 수가 없고, 아마 오후에나 볼 수 있을 거야. 그때 가 봐라.”
‘아, 진영이는 크게 다쳤구나.’
준영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호텔에서 나올 때, 옷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갑에 신분증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시계도 진영이가 입고 있던 바지에 들어 있을 것이다. 자기와 진영이가 일란성 쌍둥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진영이가 되는 건가? 내가 아리랑을 물려받는 건가?’
준영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라났다. 악마가 준 기회같기도 했다. 그 악마는 자신과 진영을 동시에 없애버릴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멀쩡하지 않는가? 준영은 그 악마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당분간은 진영으로 있어야 한다.
‘아마, 송영구가 관계되었을 거야. 김상원도 함께. 이 둘을 빼고는 얘기가 안 돼.’
“진영아, 오후에 윤영이가 올 거야. 그때까지는 나하고 함께 있자.”
준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카트가 밀려 들어왔다. 아침 식사 시간이다.
“그럼, 식사해라. 나는 출근해야겠다.”
현석은 준영을 다독거리더니, 문을 향했다. 그러나 다시 뒤로 돌았다.
“진영아, 회사 문제는 당분간 신경 안 써도 된다. 지금 자금 문제는 잘 풀렸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다행이다.’
준영은 현석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 *
중환자실 밖의 의자에 순화와 선경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병실 문이 열리더니, 중년의 의사가 나왔다. 순화와 선경이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의사는 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을 했다.
“당분간은 아마 말을 못할 겁니다. 의식도 가물가물한 상태이고. 왼쪽 뇌를 다쳤기 때문에 걷거나 그런 것도 안 됩니다. 오른쪽 반신에 마비가 왔습니다만, 걱정 마세요. 식물인간은 아니니까요. 일 년 정도, 재활치료를 하면 걸을 수 있을 겁니다.”
순화의 얼굴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간병할 사람이 있습니까?”
의사의 말에 선경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할 겁니다.”
선경의 말에 순화가 깜짝 놀랐다.
“엄마, 학교도 끝났어. 이제 방학이고, 더구나 계약도 끝났으니까. 당분간은 시간이 있어. 그리고 내가 옆에 있어야 돼. 이젠, 아무도 못 믿어. 이건 분명 뭔가가 있어.”
경찰로부터 뺑소니 사건에 대하여 들은 선경은 누군가가 준영을 해칠려고 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준영이 과거에 사채업자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는 선경은 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가 있어주면 고맙지.”
“그럼, 들어가 보세요.”
의사의 말에 순화와 선경은 병실로 들어가 진영을 보았다. 머리와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은 상태로, 코에도 관이 삽입되어 있었고, 손등에도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가슴이 살살 오르락내라락 하는 것을 보니, 분명 살아 있었다.
선경은 살그머니 진영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진영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빠.”
선경은 진영을 불렀다. 붕대 사이로 감겨진 두 눈 속에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자기의 말을 알아듣는 것만 같았다.
뒤에 서 있던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두 사람에게 나가야 한다고 말을 했다.
순화와 선경은 병실을 나와, 다시 복도의 의자에 앉았다.
“엄마, 이제 집에 가서 준비를 해야겠어. 나는 여기서 잘 테니까, 엄마는 아빠를 챙겨.”
“그래. 그럼 어서 가자.”
* * *
송영구와 김상원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실장님, 최준영이는 중환자실에 있고, 이진영이는 괜찮답니다.”
상원이 말하자, 영구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차라리 바뀌었으면 좋았을 걸.”
“그러게 말입니다. 최준영이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상원은 영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경찰 처리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영구는 상원에게 뒷처리를 물었고, 상원은 담배를 빼어 물었다.
“일단은 뺑소니 사건이니까요. 카니발 운전한 놈은 벌써 중국으로 갔습니다.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 겁니다. 대리 기사를 했던 녀석은 필리핀으로 보냈습니다. 같이 보내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상원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도 영구는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아, 그리고 카니발은 폐차시켰습니다. 벌써 들어갔지요.”
그제야 영구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어쩌면 최준영이 크게 다친 게 더 좋은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상원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또 왜?”
영구는 상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송 실장님, 최준영이가 멀쩡하다면 아마 맨 먼저 나를 의심했을 겁니다. 실은 준영이하고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이진영이는 아무 것도 모르니, 절대 의심 같은 것은 못할 겁니다. 거기는 실장님이 잘 처리하시겠지요?”
“걱정 마세요. 그건 제 손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영구가 말을 끝내자, 상원은 탁자 밑에서 네 장의 종이를 꺼내더니, 두 장씩 모아 놓았다.
“하나는 백 십 억에 대한 영수증입니다.”
“다른 하나는?”
“먼저 영수증은 가짜라는 사실과, 5 십 5 억에 대한 영수증입니다. 즉, 이면 계약서지요.”
영구는 네 장의 종이에 사인을 해서 상원에게 주었고, 상원 역시 영구의 이름 밑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었다. 그리고 둘은 각자 두 장씩을 가진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십 억짜리 가짜 영수증은 뭐에 쓰려고 합니까?”
상원의 말에 영구는 싱긋 웃기만 했다.
* * *
태화 투신 본부장실에 손혜정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창 밖을 보면서 12 월의 차가운 날씨를 느끼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교통사고에 대하여 진태로부터 들은 이후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는 이제 삼 개월로 접어들었다. 혜정이 배를 쓰다듬자, 그날 밤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밤이었으니까. 최준영이 많이 다쳤다고 했다. 아이의 아빠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의 아빠다.
‘가봐야겠지?’
혜정은 길고 긴 장고 끝에 결심을 했다. 퇴근 후 저녁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혜정은 책상 위의 전화를 들고, 진태에게 걸었다.
“아빠, 저에요.”
“무슨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그래도 너하고 정혼한 사이가 아니더냐? 언제 가볼래?”
진태는 혜정이 진영을 병문안 가는 걸로 생각을 했지만, 혜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혜정은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가 볼래요. 저녁에 집에서 봬요.”
* * *
“어? 언니? 여긴 어쩐 일로…….”
혜정이 중환자실로 들어서자, 마침 청소를 하고 있던 선경이 반갑게 맞았다.
“진영 오빠 보러 온 거군요. 여기도 들러 주셔서 감사해요.”
“어때? 오빠는?”
“그냥 그래요. 아직도 절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선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간 때문에 여기 먼저 들른 거야. 진영 씨는 이따가 보러 갈 거고.”
“아, 그렇구나. 그래도 언니가 와 주다니…….”
아무 것도 모르는 선경은 그저 혜정이가 고맙기만 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일 주일만 더 있다가 일반 병실로 갈 거니까. 그리고 진영 오빠 아버지가 특실로 예약해 주셨어요. 거기는 혼자 쓰니까, 제가 하루종일 지킬 거에요.”
선경의 말에 혜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뭘 지켜?”
“아, 언니는 모르는구나. 준영 오빠가 예전에 폭력 조직에 좀 있었거든요. 사채업도 하고 그런데…….”
혜정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를 해꼬지할 사람이 없거든요. 그 사람들 말고는……. 사건도 너무 이상하고…….”
“뭐가 이상해?”
“경찰이 그러는데, 호텔에서 불렀던 대리 기사는 자기가 운전을 안 했다고 진술했데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서 했다고……. 자기는 대리비만 받고 그냥 왔다고 했데요. 하지만 경찰은 일단 그 사람을 용의자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거짓말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저는 그 사람 말이 믿어져요.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에요.”
혜정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단 말이지? 이거 호기심이 생기는데…….’
혜정은 이진영을 당장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선경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비록 자기를 속인 비열한 남자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고 때는, 그런 건 일단 접어두고 싶은 혜정이었다.
준영이 혼자 쓰는 특실로 급하게 찾아간 혜정은 노크를 했다.
준영은 침대의 위쪽 절반을 세워놓고, 책을 보고 있다가, 혜정이 들어오자 너무나 놀랐다.
“진영 씨, 몸은 괜찮아?”
혜정이 물었으나, 준영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준영의 머리 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지금 나는 진영이다. 그리고 혜정 씨는 진영이를 미워한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지?
“방금 선경 씨를 만나고 왔는데 말이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걸.”
혜정은 침대에 누워있는 준영을 보자, 안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혜정은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았다. 그런 혜정을 준영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혜정은 준영에게 선경이 해 준 말을 했다.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준영 씨가 해 준 이야기 같은 거…….”
“없어요.”
“뭐? 진영 씨, 언제부터 나한테 말을 올렸다고……. 목소리도 그게 뭐야?”
준영은 순간 아차했다.
“아니, 아니야. 지금도 머리가 아파서…….”
“엄살은……. 하여간 예전부터 엄살이 심했어. 그건 알아줘야 해.”
“여긴 왠 일이야? 나한테 감정 안 좋잖아?”
준영은 혜정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진영으로 된 자기는 철저히 진영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날 밤에 대해서 말하려 왔나?
“선경 씨는 예전에 준영 씨가 있던 조직을 의심하던데.”
그러나 혜정은 준영의 예상과는 다르게, 호텔의 그 날 밤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선경이가 그런 의심을…….’
준영은 혜정에게 조금은 이야기를 해주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병원에서 나갈 수도 없는 준영으로서는 혜정에게 의지를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송영구 실장과 김상원이라는 사람이 아는 사이야.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 강남에서 싸웠던 일 있잖아?”
준영의 말에 혜정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다 패버렸잖아. 그런데 그 패거리들이…….”
“잠깐! 뭘, 진영 씨가 다 패버려? 그건 준영 씨가 해결했어. 진영 씨는 그냥 도망가기나 했지.”
준영은 다시 아차했다. 아직도 진영이 흉내가 몸에 안 배어 있었다.
혜정은 그냥 진영이 호기를 부린다고 생각을 했다.
“맞아. 나는 그냥 시비만 걸었어. 미안. 그런데 그 패거리들이 준영이 형이 예전에 같이 일했던 그 사채업자들이었데. 형이 그랬어. 그때 송영구 실장이 와서 해결했잖아. 아마 그때 김상원이하고 둘이 알게 되었을 거야.”
혜정의 눈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송영구가 관여되었구나. 내 직감이…….’
“그들이 그때 일로 보복을 한 것이 아닌가 해.”
‘아니. 그런 보복이 아니야. 진영 씨. 이건 내가 부탁한 거야. 송영구 이 사람…….’
혜정은 서서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송영구와 결혼을 전제로 아리랑의 파멸을 부탁했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송영구가 폭력 조직을 끌어들일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진영 씨가 목표였을 거야. 그런데 준영 씨가 당하다니…….’
혜정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준영도 침대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야. 진영 씨. 그냥 있어. 나 급히 가볼 데가 있어서 그래. 몸조리 잘 해.”
혜정은 황급히 병실을 나갔고, 그런 뒷모습을 준영은 조용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