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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40

by 윤금현

40 장.



폰이 울리자, 이름을 확인한 송영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접니다.”

“송 실장님, 만나서 얘기할까요?”

혜정의 목소리가 나오자, 송영구는 바짝 긴장을 했다. 아무리 결혼을 전제로 협약을 맺은 사이이기는 하지만, 절대 믿을 수는 없었다. 송영구의 지금 상태로는 손혜정도, 김상원도 믿을 수가 없었다.

“혜정 씨, 지금은 바빠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전화로 얘기하지요. 그 사건, 실장님이 한 거지요?”

혜정은 바로 문제를 꺼냈다.

영구는 혜정에게서 이런 식으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미 말이 나온 이상,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만 했다.

‘음, 이거 문제군. 시인하느냐, 부정하느냐?’

“실장님, 왜 말이 없으신가요?”

영구는 맘을 정했다.

“혜정 씨, 저는 그 교통 사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간접적으로 어떻게 관계가 되었나요?”

영구는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 여자를 넘어서야만 한다.

“저는 자금의 흐름을 방해해서, 아리랑에 타격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와 혜정 씨의 약속이었습니다. 결혼을 조건으로 한 약속이었지요. 그런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최준영에게 보복을 한 겁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럼 아리랑의 자금 사정은 나빠졌나요?”

영구는 한시름 놓았다.

“그건 혜정 씨 아버님 때문입니다. 태화에서 자금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아리랑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주가가 떨어졌기 때문에, 아마 손진태 회장님도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을 겁니다.”

폰을 든 혜정의 손이 떨렸다.

‘아버지도 손해를 보았다고? 그건 계획에 없던 건데…….’

“혜정 씨, 최준영이 많이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진영은 멀쩡하다면서요? 그렇다면 실제로 아리랑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습니다. 자금도 잘 돌아가고 있고…….”

“그럼, 우리 계획은 실패한 건가요?”

혜정의 목소리가 힘이 없게 들리자, 오히려 영구는 더욱 힘이 났다.

“아닙니다. 저는 무조건 혜정 씨 편입니다. 우리는 결혼할 사이가 아닙니까? 저를 믿으십시오. 다음 계획이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혜정은 영구의 속셈을 전부 알고 싶었지만, 영구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아직 비밀입니다. 그리고 혜정 씨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나쁜 짓은 저 혼자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통 사고 건 말입니다. 이건 조용히 덮는 게 나을 겁니다. 벌써 모든 증거가 사라졌으니까요.”

혜정이 전화를 끊자, 영구는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손을 더듬어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수표를 만져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 * *


‘이진영이 살아 있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최준영이가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니, 그런대로 된 거야. 이제 농업 회사는 물 건너 갔고. 이진영이를 어떻게 한다?’

영구의 머리에 상원이 떠올랐다. 교통 사고 건을 처리하는 걸 보니, 상당한 수완가다. 일처리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다. 영구는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겠다.’

영구는 상원을 만나러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법무실장실 인터콤이 울렸다.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영구는 현석의 호출을 받자, 가방을 챙겨 회장실로 올라갔다.


“송 실장, 그 돈은 갚았나?”

현석의 얼굴은 오랜만에 웃고 있었다. 프랜차이즈 가맹점 일도 거의 처리되었고, 태화에서 도와준 덕분에 사채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단지 주식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으나, 현석은 그것도 차차 해결되리라 믿었다.

“네, 회장님. 제가 직접 갚았습니다.”

“영수증은 받았어?”

현석의 말에 영구는 가방을 열어, 하얀 종이봉투를 꺼냈다. 거기에서 두 번 접어진 A4 용지 한 장을 끄집어 내었다. 영구는 그 종이를 손으로 잘 펼쳐, 현석에게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현석은 종이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아리랑과 태원 새마을 금고 사이에 백 십 억의 지불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아래쪽에 대리인으로서 송영구와 김상원의 이름이 있었고, 서명도 깨끗이 되어 있었다.

현석은 그 종이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수고했어. 이제 자네는 가맹점의 모든 사람들을 우리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네.”

영구는 고개를 숙여 현석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은 현석을 배신하려고 하는 중이지만, 현석의 사람에 대한 이런 점은 정말로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보게.”

영구는 회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 * *


미현과 윤영 그리고 준영은 원무과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퇴원 수속을 받으러 왔습니다.”

의사는 준영에게 퇴원을 해도 좋다고 했고, 미현은 의사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원무과 앞에서 미현은 손으로 준영의 등을 쓰다듬었고, 그 순간 진영 때문에 잊고 있었던 큰 아들 준영이 생각났다.

“헉! 윤영아!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미현의 외침에 윤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엄마, 왜 그래?”

준영도 놀란 표정으로 미현을 보았다.

“준영이, 준영이 말이야.”

그제야 윤영과 준영은 미현의 말 뜻을 알아차렸다. 준영은 한 번 중환자실에 가서 진영을 본 적이 있었지만, 미현과 윤영은 아직 그러지 않았었다.

“내가 미쳤나 보다. 진영이만 챙기고 이러고 있으니……. 준영이도…….”

“엄마, 퇴원 수속 끝나면 같이 가서 봐요.”

윤영은 미현을 부축해서 대기실 의자에 앉혔고, 준영은 자신의 퇴원 수속을 했다.

이윽고 수속이 끝나자, 세 명은 함께 진영이 누워 있는 중환자실로 갔고, 거기에서 홀로 병실을 지키고 있는 선경을 만났다.

미현은 붕대와 이런저런 바늘을 몸에 꽂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진영을 보고, 그만 말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준영아, 준영아…….”

“아직 제대로 의식이 없어요. 그래도 눈은 깜박거리니까요.”

선경이 진영의 상태를 말해 주자, 준영의 눈에 번뜩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선경조차 이것을 알지 못했다.

‘김상원이……. 이 새끼를…….’

주먹을 쥔 준영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런 준영을 본 선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영 오빠, 왜 그래요?”

선경의 눈빛은 준영을 진영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눈빛이었고, 준영은 얼른 몸에서 힘을 뺐다.

‘둘이 서로 어떻게 말을 했지? 아마 선경 씨라고 했겠지. 그리고 여기는 엄마도 있으니…….’

“선경 씨, 아니에요. 그냥 형이 너무 많이 다쳐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만…….”

선경은 준영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으나, 아직도 얼굴 여기저기에 밴드를 붙였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사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우리 그만 가요. 준영 오빠는 선경 씨가 있으니까. 엄마가 여기 있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돼요.”

미현은 윤영의 말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다음, 선경에게로 돌아섰다.

“준영이 좀 잘 부탁해. 정말로 잘 부탁해.”

선경은 미현에게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세 명은 병실을 나왔다. 준영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선경을 돌아보았고, 그때까지도 선경은 준영을 보고 있었다. 준영은 그 눈빛이 묘하다고 느꼈다.


* * *


준영은 종환의 자그마한 빌라를 찾아갔다.

“어서 와.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종환 역시 준영을 진영으로 알고 있다. 순화는 병실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경도 보이지가 않아, 준영은 마음 편히 종환을 만날 수 있었다.

“준영이 형이 많이 다쳐서 어떡합니까?”

준영의 말에 종환은 한숨부터 쉬었다.

“이제 부모를 만나서 잘 살게 되나 싶었는데…….”

종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 얼굴을 본 준영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여기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준영은 종환의 낙심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왔다. 정말로 나를 키워준 아버지. 저도 모르게 준영의 눈동자가 빨개졌다.

“괜찮을 겁니다. 재활 치료를 하면 금방 걸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야지. 빨리 나아야지…….”

준영은 종환에게 위로의 말을 하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통 와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별 일 없이 괜찮구나. 여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선경이가 있으니까.’

준영은 이때만큼 선경이가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준영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생각 같아선 김상원의 사무실에 쳐들어가 박살을 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준영은 자신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상원의 패거리들은 적어도 몇 십 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준영이라도 그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걸 싸움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준영은 차분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송영구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준영은 한 명 한 명씩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손혜정이 마지막에 남았다.

‘어쩔 수 없군. 혜정 씨를 찾아갈 수밖에.’

준영은 마음을 정했다. 폰을 꺼내 손혜정의 전화번호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