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장.
선경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선경아, 그럼 나는 가마.”
선경은 순화를 보았다.
“엄마, 조심히 가. 참, 아빠는 괜찮으셔?”
“아마 저녁에 오실지도 모르겠다. 요새 공무원들 힘들잖니? 여기저기서 감사 나오고 그렇다고 하더라.”
“엄마가 아빠 잘 챙겨 줘.”
선경은 엄마를 병실 밖까지 배웅했다.
다시 병실로 들어온 선경은 진영의 팔을 잡고 마시지를 시작했다. 그때 진영이 눈을 떴다. 입이 오물거리며 뭐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빠, 물 줘?”
선경의 말에 진영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선경은 컵에 물을 받은 다음, 진영의 입에 물을 살살 넣어 주었다. 행여나 목에 걸릴까 봐서, 한 방울씩 천천히 넣어 주었다.
진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선경은 물컵을 탁자에 놓은 다음, 다시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팔을 다 주무르고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을 때, 진영의 숨소리가 작아지며 다시 잠이 들었다.
‘편안히 자네. 덕분에 이렇게 함께 있게 되었지만.’
‘이대로 평생 못 걸으면 어떡하지?’
‘내가 곁에 있으면 되지. 최선경! 힘내라!’
선경은 다시 힘을 주어 진영의 다리를 마사지했다.
* * *
“회장님, 지금 자금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영구는 현석의 앞에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가?”
현석의 목소리 또한 무거웠다.
“차라리, 선물에 다시 투자를 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야. 지난 번에 옥수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 선물은 꺼내지도 마.”
현석은 단호히 말했으나, 영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장님, 손진태 회장님에게 부탁을 해서, 좋은 종목으로 골라달라고 하면 안될까요?”
“자네, 순진한 소리 하고 있네. 아무리 친구여도 그런 건 비밀이라네.”
영구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아리랑이 돈을 여기저기 쓰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현금이 줄어들게 되고, 그 다음은 부도가 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면 손혜정이 내 손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영구로서는 현석을 어떻게든 설득해야만 했다.
“회장님, 그러면 제가 정보를 얻어 오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자네가?”
“예. 제가 인맥이 넓지 않습니까? 확실한 걸로 알아오겠습니다.”
“그럴까?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럼 자네한테 맡기지.”
“예. 알겠습니다.”
영구는 현석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 * *
현석은 영구가 나간 다음, 자기도 방을 나서서 상무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준영이 출근해 있었다. 현석이 방에 들어가자, 깜짝 놀란 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영아, 송 실장이 그러는데, 선물을 해야겠구나.”
“아버지, 안 됩니다. 지난 번 옥수수 건을 잊으셨습니까?”
현석은 그 교통 사고 이후에 진영이 부쩍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도 예전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하고, 행동도 더 점잖아졌다.
“아버지, 그리고 저는 송 실장에게 믿음이 안 갑니다.”
현석은 소파에 앉았다.
“너, 왜 그러냐? 우리 회사가 이만큼 큰 것도 다 송 실장 덕분이다.”
준영도 자리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정말로 진지하게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그건 옛날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도 있습니다. 송 실장은 선물의 전문가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현금을 아낄 때입니다. 어음이 돌아올 때 막지 못하면, 아버지 아니면 제가 감옥에 가야할 판입니다.”
현석이 듣고 보니, 준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특히 현금을 아끼라는 말이,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 프랜차이즈 사업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였다. 현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번 만은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절대 송 실장의 투자 권유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럼 앞으로 송 실장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회사의 일등 공신인데…….”
준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버지는 너무나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계신다.
“차라리, 개업을 시켜주면 어떨까요? 자그마한 법무 법인을 만들 수 있도록 퇴직금을 넉넉히 주어서 내보내는 겁니다.”
“얘야, 진영아. 나는 네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 단지 옥수수 때문이라면……. 사람이 한 번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야. 송 실장을 그런 식으로 내치면 안 된다. 난 그렇게 의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준영은 현석에게 인상을 썼다. 하마터면 입에서, ‘그래서 아버지는 절 버리셨습니까?’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준영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직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 그 놈이 김상원이 하고 결탁했다는 증거만 잡으면…….
* * *
준영의 방을 나온 현석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아들과 가장 믿는 직원이 서로 반목을 한다. 권력 다툼인가? 현석은 아직도 왜 그렇게 진영이 영구를 미워하는지, 이유조차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진태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 진태에게 물어보는 거야. 현석은 전화를 꺼냈다.
“어, 오랜만이네.”
전화에서 진태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바쁘니까, 딱 하나만 묻자.”
“뭔데 그래?”
“내가 자금이 좀 딸려서 그러는데, 선물을 한 번 해볼까 하는데 말이야. 빨리 치고 빠질 수 있는 걸로. 자네가 하나 추천해 줘.”
“하하하. 내 대답은 노라네.”
현석은 진태의 거절에 그만 발끈해졌다. 친구 사이에 자세히 듣지도 않고, 무조건 거절부터 한다. 그러나 현석은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유는?”
“이봐. 그 이유까지 설명해 줘야 한다면, 자네는 정말로 선물을 안 해야 하네. 내 말 알아듣겠지?”
“…….”
진태의 말은 이어졌다.
“전문가란 말이야. 상대의 말을 듣고, 바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네. 이유를 설명해줘야 아는 사람은 벌써 이류지. 자네는 선물에 있어서는, 이류도 안 되고 삼류라네. 내가 친구로서 얘기하는데……. 참, 자네 내 과거 알지? 내가 처음에 이 사업 시작할 때, 얼마나 말아먹었는지 알잖아?”
현석의 머릿속에 옛날 일이 떠올랐다. 진태가 재산의 반을 육 개월 만에 날려 먹고, 술 한 잔 사달라고 온 적이 있었다. 술값이 없어서 온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나 하소연이 하고 싶었던 진태였다. 지금 그 모습이 선명히 현석의 눈에 보였다. 완전히 좌절한 남자. 아직도 몇 억의 돈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일 년 내에 전부 날릴 것만 같았던 바로 그 남자. 그 남자는 다시 일어섰지만, 현석은 어쩌면 그 모습이, 내년 아니 내일의 자기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내 말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그만 끊자. 알아서 해.”
진태는 냉정히 전화를 끊었고, 현석은 영구를 떠올렸다.
‘자네도 고생이다. 하지만 이번은 안 되겠어.’
* * *
“어, 언니?”
혜정이 병실로 들어서자, 선경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선경으로서는 혜정이 여기 자꾸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준영은 혜정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아빠인 것이다.
“준영 씨는 어때?”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이제 왼쪽은 움직일 수 있어요. 오른쪽은 아직 마비 상태지만.”
“그래? 다행이네.”
혜정이 소파에 앉자, 선경도 앞에 앉았다. 혜정은 침대에 누워 있는 진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선경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니?”
“왜?”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요.”
“뭐가?”
“언니가 준영 오빠를 자주 보러 올 필요가 있을까 해서요. 언니도 바쁘잖아요.”
혜정은 선경이 준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질투를 하나? 아님 나를 경계하나?
“아니. 난 진영 씨 형이니까…….”
“그래요? …….”
선경이 더 말을 하려 입을 열려할 때, 다시 병실 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준영이 들어왔다.
혜정은, “어, 진영 씨?” 하면서 일어섰다. 들어오던 준영도 깜짝 놀랐다. 침대에는 진영이 있지만, 다들 준영으로 알고 있다. 혜정도 준영을 보러 온 것이다. 왜일까? 준영은 혜정의 마음이 전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진영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혜정은 말을 해 놓고 나니, 진짜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준영과 진영은 친형제이다. 그리고 자기는 남남이다. 내가 왜 이러지? 혜정은 본능적으로 여자가 아기의 아빠를 찾는다는 것을 몰랐다.
“혜정 씨야 말로 여기에는 왠일이에요?”
그러나 준영은 혜정이 자기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갈 거에요. 잠시 시간이 되서 보러 온 것 뿐이에요.”
혜정은 아이의 아빠가 준영임을, 진영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만 난처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준영은 지금이 기회라고 느꼈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는 별 성과없이 대화를 끝냈지만, 다시 혜정과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잠시만 기다려요. 잠깐만 보고 같이 나가요.”
준영의 말에 혜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상원의 사무실.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열 명 정도 모여 있었다. 상원은 의자에 앉아 거만하게 이들을 둘러 보았다.
“내 말 알아듣겠지?”
“형님, 그러니까, 잡아다가 족치자 이거지요?”
“이 무식한 새끼야! 잡아오기만 하라고 했지, 언제 족치라고 하디?”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짧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심히 모셔오너라. 알겠지? 절대 실례가 되면 안 된다. 그리고 절대 몸에 손대지 마라. 다치면 큰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새끼는 죽여 버린다.”
“예.”
“내가 다시 말한다. 잘 들어. 네 명씩 차에 타서, 1 조가 잡는다. 그리고 강남에서 신림동까지 달려. 그 다음 거기서 2 조한테 넘긴다. 알겠지? 2 조가 다시 신림에서 강남으로 온다. 1 조는 넘긴 다음 바로 해산한다.”
“예.”
다들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상원은 담배를 꺼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송영구, 이 사람. 내 솜씨를 보면 깜짝 놀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