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장.
네온 사인이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화려한 길거리. 청담동 거리를 혜정과 준영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혜정은 앞만 보고 말없이 걸었고, 그 옆에서 준영은 자꾸 뒤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진영 씨, 왜 자꾸 안절부절이지? 왜, 내가 무서워?”
혜정은 걸음을 멈추고 준영에게 물었다.
뒤를 보면서 걷던 준영은 흠칫 놀라면서, 혜정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계속 걷기만 할 거야?”
이제 준영은 진짜로 진영인 것처럼, 혜정을 대하고 있었다.
“좋아. 어디 보자.”
혜정은 앞쪽을 보더니, 손으로 2 층 창문을 가리켰다.
준영이 보니 근사한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이 줄을 지어 있었고, 한쪽 벽에 자그마한 간판이 달려 있었다.
“저기로 가자.”
준영은 말없이 혜정을 따라, 2 층 카페로 들어갔다.
안에서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화려한 차림의 마담이 혜정을 반갑게 맞았다.
“호호, 아가씨, 요새 통 안오시더니, 오늘은 멋진 남자와 오셨군요.”
마담은 준영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언니, 조용한 방으로 주세요.”
혜정과 준영은 마담의 안내를 받아, 카페의 가장 안쪽에 있는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문 바로 안쪽에 넓은 공간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세 면에 소파가, 그리고 그 사이에 커다란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열 명도 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방이었다. 조명을 전부 켜자, 환한 불빛을 따라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본으로 주세요.”
혜정의 말이 끝나자, 마담은 문을 닫고 나갔다.
이윽고 술과 안주 접시가 들어왔고, 혜정이 술병을 땄다.
“진영 씨, 오늘 참 이상하네.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아니야. 형이 다쳐서 그래. 형이 나 때문에 당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혜정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와 함께, 진영에 대한 비웃음도 살짝 떠올랐다.
그러나 준영은 혜정의 말에도, 표정에도 신경쓰지 않은 채, 술만 마셨다.
“진영 씨, 지금 나는 준영 씨 아이를 가지고 있어. 그건 잘 알테고……. 앞으로 어떡할 거야?”
드디어 혜정의 입에서 준영이 가장 걱정하던 내용이 나왔다. 준영은 진영의 입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만 한다.
“아이는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둘이 결혼하는 게 어때?”
준영은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결혼? 속아서 임신을 했는데, 결혼을 하란 말이야? 그게 말이 돼?”
“그럼 어떻게 하려고?”
“너희 두 형제가 책임을 져야지. 나를 속인 죄를 받아야 할 거 아냐?”
혜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준영을 몰아세웠다.
“어떻게 해주면 나를 용서할 거야?”
“난 아리랑이 망하기를 바래. 너희 집안이 완전히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준영은 다시 술을 마셨다. 혜정의 화가 이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도 되었다. 결혼하려고 마음 먹은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그 남자의 쌍둥이 형의 아이를 가지다니. 준영은 버림이라는 단어에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버림받았던 자신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버림이라는 일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준영은 혜정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때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면서, 마담이 들어왔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다.
준영은 고개를 들어 보았고, 마담의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거 봐라, 이진영이도 함께 있네.”
대장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했다.
“너희들 누구야?”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룸에 울렸다. 벌떡 일어난 혜정은 팔짱을 낀 채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두 번째 남자가 마담을 소파로 밀어버리자, 꺅 하는 비명 소리가 룸을 채웠다. 그 남자는 앞으로 나서더니 앉아 있던 준영의 머리를 툭 쳤다.
“야, 부잣집 새끼야, 미안하지만 너한테는 볼 일이 없다 이 말이야.”
준영은 순간 생각을 했다. 진영이한테는 볼 일이 없다? 그러면 누구한테? 준영은 얼굴을 들어 혜정을 보았고, 순간 혜정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손혜정 씨, 태화 투신 본부장님, 우리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같이 가시기만 하면, 아주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너희들 누구냐고 물었다?”
혜정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세 번째 남자는 문을 닫더니, 문에 등을 기댔다. 대장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혜정에게로 다가서더니, 혜정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놔!”
혜정은 잡힌 손목을 빼려 했으나, 상대 남자는 더욱 꽉 쥐었고, 혜정의 얼굴에 고통스런 빛이 떠올랐다.
준영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야, 이 새끼, 진짜 최준영이하고 똑같네. 하하, 그 새끼는 아마 지금 식물인간이라던가, 뭐라던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도 조용히 가주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준영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척 보니 김상원의 부하들임에 틀림없다. 왜 김상원이 손혜정을 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손혜정도 보호하고, 자신의 정체도 드러나지 않으려면 , 싸움만은 피해야 했다.
“새끼, 입만 살아서…….”
순간 주먹이 날라오더니, 준영의 얼굴을 때렸다. 퍽 소리와 함께 준영은 룸의 바닥으로 쓰러졌다.
“진영 씨!”
혜정이 앉더니 준영을 안아 일으켰다. 준영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혜정의 뒤에서 두 남자가 혜정의 팔을 하나씩 잡고 끌어냈고, 혜정은 그대로 주르륵 문까지 끌려갔다.
“악! 진영 씨!”
그때 준영의 장기가 나왔다.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허공에 뜨기. 준영은 두 다리를 모은 다음,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준영을 본 세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순간, 준영은 혜정을 잡고 있는 두 남자는 그대로 놔둔 채, 대장격인 남자의 앞으로 뛰어 날았다. 준영이 자신에게 확 다가오자, 남자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준영의 발이 더 빨랐다. 허공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준영의 발이 남자의 얼굴을 이마에서부터 아래로 긁어내렸다.
퍽!
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남자는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갔다.
두 번째 남자가 문을 열려고 했으나, 준영은 몸을 돌리며 문을 발로 찼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나는 순간, 준영의 발이 남자의 옆구리를 찍어 눌렀다.
억!
남자는 혜정의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혜정은 다른 손마저 홱 뿌리치고, 룸의 안쪽으로 달려갔다.
혜정을 놓친 세 번째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준영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을 돌려차기로 차 버렸다.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쭉 뻗어버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또 한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역시 검은 양복 차림이다. 네 명 중 가장 어려보였다. 아마 카운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니까 왔을 것이다. 남자가 들어올 때 열린 문으로 마담이 살짝 빠져나갔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형님들!”
네 번째 남자가 말을 하자, 세 번째 남자는 칼을 꺼냈다. 그리고 처음 얻어맞은 남자는 코가 주저앉았는지 얼굴 전체에 피범벅을 한 채 비틀비틀 일어섰다.
“야, 죽여 버려!”
상대의 죽여버리라는 말에, 준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나는 이진영이 아니라 최준영이다. 몸 속에서 준영의 본능이 솟아나왔다. 중학교 때 패싸움에서 선배가 상대편의 칼에 찔려 쓰러지는 광경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칼 든 남자와 가장 어린 남자가 좌우로 갈라섰다.
준영은 한 발을 앞으로 나서면서, 칼을 든 자의 앞에서 모션을 취해 보았다. 상대는 칼을 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명의 발을 묶어둔 채, 준영은 네 번째 남자를 향한 다음, 그대로 복부를 걷어찼다.
꽤애액!
남자는 비명을 질렀고, 앞으로 몸이 숙여지자 준영은 다시 얼굴을 걷어찼다. 남자는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다음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준영은 칼을 든 남자를 보았다.
“너, 이진영이 아니구나.”
준영은 씨익 웃었다.
“나, 최준영이다.”
최준영이라는 말을 듣자,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칼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칼든 놈들은 전부 관절을 꺽어버리지. 너도 그 얘기는 익히 들었을 텐데……. 병신이 될래? 아니면…….”
준영의 말에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장은 얼굴 전체에 피범벅이고, 두 명은 쓰러져 있다. 남은 건 자기 혼자.
남자는 칼을 든 채 준영에게 달려들었고, 준영은 그대로 상대의 돌진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살짝 몸을 튼 준영은 왼쪽 옆구리에 지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을 머리에 새기면서, 왼손으로는 상대의 칼을 쥔 손목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목을 잡았다. 준영의 눈길과 남자의 눈길이 부딪쳤다고 느껴진 순간, 뻑 소리와 함께, 준영은 앞이마로 상대의 얼굴을 들이받아 버렸다. 귀에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무릎을 꿇자, 준영은 뒤에서 발로 등을 찍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등에 무릎을 댄 준영은 남자의 오른팔을 뒤로 꺾었다.
뚜둑!
으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오른팔이 반대로 꺾였다.
준영은 대장격인 남자가 코를 감싸쥔 채, 힘겹게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꿇어.”
그러나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퍽! 준영은 남자의 배를 걷어찼고, 남자는 두 손으로 배를 잡았다. 준영은 그 손을 다시 발로 찼다. 남자가 손을 들자, 퍽! 이번에는 다시 배를 찼다.
헉!
남자의 무릎이 굽혀지면서, 룸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준영은 룸 안쪽에서 두 눈만 크게 뜬 채, 얼어붙어 있는 손혜정에게로 돌아섰다.
“혜정 씨, 잠시 앉아 계세요.”
준영의 말에, 혜정은 정신이 든 듯,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두 손으로 핸드백을 꼭 잡고 있었다.
준영은 무릎을 꿇은 남자 옆을 지나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집었다. 다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준영은 입을 열었다.
“누가 시켰지?”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상원이 시켰지?”
역시 대답이 없다.
준영은 벌떡 일어나, 칼로 남자의 왼쪽 어깨를 위에서부터 찍어버렸다. 푹! 칼날의 절반이 쑥 들어갔고, 끄아악!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무릎을 꿇은 채, 왼쪽 어깨에 칼이 박힌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상원.”
“목표는?”
“손혜정.”
“이유는?”
남자는 고통에 가득찬 눈으로 준영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 눈에 공포가 가득차 있었다.
* * *
혜정과 준영은 진영이 누워있는 특실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열고 들어가니, 선경이 절반쯤 졸고 있는 얼굴로 진영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혜정은 얼른 달려가 선경을 안았고, 준영은 침대의 이불을 살짝 젖혀 진영의 상태를 보았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로 봐서, 아무 일도 없이 자고 있다.
“어, 언니? 진영 오빠?”
혜정이 준영을 보자, 준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혜정에게 신호를 했다.
선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이 밤에 어쩐 일이에요? 그것도 같이?”
선경은 잠이 덜 깼는지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선경 씨, 별 일 없지?”
“언니, 별 일은…….”
선경은 두 사람을 천천히 보았고, 그제야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준영은 병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혜정은 그 자리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혜정 씨, 들어 가세요.”
준영의 말에 혜정은 준영의 옆에 앉았다.
“아니요. 여기서 다 같이 밤을 새요. 이제 더 이상 무슨 일이 생기면 안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