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장.
선경은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만 색색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준영과 혜정은 그런 선경을 무심히 보고 있었다.
“준영 씨…….”
혜정이 준영을 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준영은 혜정의 눈빛을 보더니, 고개를 숙여 왼쪽 아랫배를 살폈다. 옷 위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준영 씨, 그거 아까…….”
준영은 천천히 일어나 뒤로 돈 다음 옷을 올려 보았다. 왼쪽 옆구리 쪽에 한 줄기 상처가 나 있었고, 거기에서 가느다란 빨간 선이 흐르고 있었다. 칼을 든 남자와 싸울 때, 찔린 상처였다. 다행스럽게도 옷 때문에 칼날이 미끄러졌는지, 아니면 상대가 당황했는지, 칼은 피부를 스쳐 지나간 모양이다. 준영은 병실을 둘러보았다. 한쪽에 응급 처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연 준영은 가제를 꺼내 피를 닦았다. 어느새 혜정이 옆에 와서 보고 있었다.
“앉아봐요.”
혜정은 소독약과 밴드를 꺼내, 준영의 상처를 임시로 치료했다.
“괜찮을까요?”
혜정의 걱정이 깃든 말에, 준영은 씩 웃어 보였다.
“이 정도야……. 소주 한 잔 마시면 되요.”
혜정의 눈에 미소가 어렸다. 이 남자……. 이 남자…….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할까…….
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영과 혜정이 돌아보자, 선경이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이들에게 다가왔다.
선경은 준영의 배를 보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
혜정은 얼른 준영의 옷을 내려주었다.
“준영 씨가 좀 다쳤어. 별 일 아니야.”
선경은 눈을 깜박거렸다.
“언니, 준영 오빠는 많이 다쳐서……. 저기 침대에…….”
혜정은 아차 하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혜정을 쳐다보는 선경.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때, 침대에서 으으으 하는 소리가 났다.
세 명 모두 일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진영이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이 열리며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준영 오빠, 괜찮아?”
선경의 말에도 진영은 계속 뭐라 소리를 냈다.
선경은 뭔가를 깨달은 듯, 준영과 혜정을 보더니, 다시 진영을 불렀다.
“진영 오빠, 괜찮아?”
그 순간 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선경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 * *
“선경아, 당분간은 비밀이다.”
준영이 말하자, 선경은 팔짱을 끼며 도전적인 눈빛을 해 보였다.
“왜? 왜? 대체 둘이서 무슨 꿍꿍이야?”
준영과 진영에게 한 번 속았던 선경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선경아, 내가 설명해줄께.”
“오빠, 해 봐. 나도 그 설명이란 걸 좀 듣고 싶어서, 몸살이 다 날 지경이니까.”
이제 혜정까지 선경의 옆에 나란히 앉아, 준영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준영은 뒷머리를 한 번 긁은 다음,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께.”
“왜? 도망가려고?”
선경이 준영을 노려보았다.
“아니, 담배 하나 피고 올께. 나도 좀 진정하자, 선경아.”
“그래요. 준영 씨. 우리 둘이 기다릴께요.”
혜정은 선경의 손을 잡았다.
“자, 오빠, 이제 말을 해 봐.”
“그게 말이야. 진영이하고 둘이서 술을 마셨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 거야. 송영구 실장 전화.”
준영의 말에 혜정은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송영구가 이 일에 개입되어 있구나.
“오빠, 그래서?”
“송 실장이 어디로 와 달라는 거야.”
“준영 씨, 거기가 어디에요?”
“사채를 빌렸는데, 일이 이상하게 풀린다나 뭐라나, 어쨌든 김상원, 아까 그 놈들을 보낸 놈이에요. 김상원 사무실로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영이가 급하게 서두르다가 내 옷을 입었어요. 내가 옷이 바뀌었다니까, 진영이는 그냥 무시하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된 거에요.”
혜정은 대충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선경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빠, 그래서?”
“그래서, 대리 기사를 불렀지. 그리고 가다가 교통 사고가 난 거야. 나도 정신을 잃어서, 그 다음부터는 몰라. 깨어보니 병원이었고, 다들 나를 진영이라고 부르더라.”
“그럼 그때 아니라고, 왜 말 안 했어?”
준영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김상원이라는 이름이 떠올랐거든. 날 목표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내가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 그쪽이 속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지. 어쨌든 김상원이 속긴 속았어.”
“그런데, 왜 김상원인가 하는 사람이 날 납치하려고 했을까요? 난 아무 상관도 없는데…….”
혜정이 준영에게 물었다.
“그건……. 그건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김상원과 혜정 씨는 연결이 안 되는데…….”
준영은 혜정에게 솔직히 말했다.
이번에는 혜정이 생각에 잠겼다. 김상원……. 김상원과 송영구……. 둘은 아는 사이라고 했어. 같은 편……. 송영구와 나……. 같은 편……. 그럼 김상원과 나는…….
혜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김상원이 자기를 노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송영구와는 결혼을 전제로 거래가 성립된 사이이므로, 송영구가 자기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었다.
‘송 실장을 만나야겠구나.’
혜정은 마음을 굳혔다. 벌써 창 밖은 환하게 날이 밝고 있었고, 아스라한 햇빛 사이로 하얀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준영 씨, 눈이 내리네요.”
혜정과 선경 그리고 준영은 창밖을 보며, 날리는 눈송이를 보았다. 준영은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진영도 어느새 눈을 뜨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진영아, 괜찮냐?”
진영은 말은 못하였으나,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더니 오른팔을 들려고 했으나,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자 선경이 얼른 다가가 오른팔을 살살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선경을 진영이 바라보았다. 혜정은 준영의 살짝 찔렀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선경아, 부탁한다.”
준영의 말에 선경이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준영과 혜정이 나간 다음, 오후에는 미현과 윤영이 와서 진영을 보았다. 그러나 선경은 두 사람에게 진영과 준영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진영도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현과 윤영은 준영이 고개도 움직이고 몸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에 너무나 감사했다. 담당 의사도 차도가 아주 좋다고 했다. 그래서 미현과 윤영은 안심하고 집으로 갔고, 그들이 간 다음, 퇴근 시간이 되어서 종환과 순화도 병실에 왔다. 준영이 많이 좋아진 것에 다들 기뻐했다.
* * *
송영구는 이현석의 앞에 서 있었다.
“송 실장, 선물 건은 안 되겠어. 더 이상 자금이 없어. 잘못하면 다음 달 월급 주기도 빠듯해.”
현석의 말에 영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할 수 없지요.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영구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하자, 현석이 불러세웠다.
“송 실장, 참……. 요새 힘들지?”
“괜찮습니다.”
“수고했어. 나도 퇴근해야겠어.”
* * *
진태는 식탁에서 소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정화와 앉아 있었다. 일하는 아줌마들은 다 퇴근하고 없었다.
“당신은 어때? 소희 말이야.”
진태의 말에 정화가 배시시 웃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어요.”
“이런 건 말이야. 시어머니 될 사람 의견이 아주 중요하단 말이야. 그 있잖아. 고부간의 갈등.”
“호호, 난 그런 거 없어요.”
진태는 소주를 한 잔 마신 다음, 그 잔을 정화의 앞에 놓고, 소주병을 들어 가득 채웠다.
“한 잔 마셔.”
그러나 정화는 입술만 살짝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난, 병승이가 소희와 결혼하는 거, 찬성이야. 별 문제 없잖아?”
“너무 사상적이지 않아요. 혹시 좌파 아닐까요?”
진태는 허허허 웃었다.
“당연 좌파지. 그 모임 이름도 레프트(LEfFT)잖아. 일부러 그렇게 지었겠지. ‘우리는 좌파요.’라고 광고하는 거지. 척 보면 몰라?”
정화의 얼굴에 걱정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우리는 소위 말해서 부르조아인데, 좀 어울리지 않지 않나요?”
진태는 소주병을 들더니 한 모금 마셨다.
“여보! 뭐하는 거에요? 입을 대고 마시다니…….”
“아, 잔을 안 주니까 그러지…….”
정화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벌컥 마셔 버리더니, 진태에게 잔을 내밀었다. 크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화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런 맛없는 걸 왜 남자들은 마시나 몰라?”
진태는 돌아온 잔에 소주를 따르더니, 헤벌쭉 웃었다.
“내 얘기 하나 해줄까?”
“뭔데요?”
정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한 남자가 술집에 혼자 와서 술을 마시더래. 거,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말이야. 아, 이거 외국 이야기야. 웨이터에게 위스키 한 잔을 시켜서 마신 남자가 셔츠 앞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살짝 들여다보는 거야. 그러더니 한 잔을 더 주문하더래. 그리고 또 뭔가를 들여다보고. 또 한 잔 더. 또 들여다보고.”
“하나도 재미없어요. 그게 어쨌는데요?”
“더 들어봐. 그렇게 술을 마신 남자가 갑자기 음, 이쁘군!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웨이터에게 술은 그만 주고 계산서를 달래. 남자는 돈을 내고 나갔는데, 이제 웨이터는 그 남자가 뭘 봤는지 너무나 궁금한 거야. 그래서 옆 남자에게 물어보았어. 대체 그 남자가 뭘 들여다 봤는지를.”
“그래서요?”
“옆 남자는 나간 남자의 친구였던 거야. 얘기가 두서없지만 그냥 들어. 이 남자가 하는 말이, 그 친구가 자기 와이프 사진을 들여다 보더래.”
“뭐예요?”
정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야기의 주제가 뭐예요?”
“남자가 술을 마시는 이유를 물었잖아. 술을 마시면 마누라가 이쁘게 보이거든.”
정화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진태는 얼굴에 홍조를 띈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화에게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정화의 눈을 그윽하게 들여다보았다.
“음, 이쁘군!”
“아이, 징그러.”
정화는 손으로 진태의 얼굴을 밀려 했으나, 그 손을 진태는 와락 잡아버렸다. 이번에는 정화의 얼굴이 발그레 변해갔다.
* * *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벌써 열 한 시를 지났다. 혜정과 영구는 단 둘이서, 고급스러운 술집의 비밀스러운 안쪽 방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양주 병과, 치즈와 마른 과일로 구성된,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는 안주 그릇, 그리고 김이 아직도 나고 있는 바베큐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실장님, 계획은 잘 되고 있나요?”
“예. 잘 되고 있습니다.”
영구의 말은 혜정에게 자신없게 들렸다.
혜정은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김상원이란 사람, 잘 알지요?”
영구의 눈이 화들짝 떠졌다.
“어떻게 아느냐고는 묻지 마세요. 저도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럼요. 태화 투신의 정보력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제가 깜박했습니다.”
영구는 너털웃음을 웃어보였다.
“그런데, 아직도 아리랑은 자금 문제로 힘들어 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혜정은 영구의 가장 큰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혜정 씨, 걱정 마십시오. 내일 할 거니까요.”
“내일?”
혜정은 영구를 부드럽게 보았다. 손을 뻗어 영구의 손을 살며서 잡았고, 영구는 혜정의 손길이 닿자, 숨이 천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말해봐요. 나도 알 권리가 있어요.”
혜정은 김상원의 부하들이 자기를 납치하려 했다는 말을 송영구에게 전혀 하지 않았고, 영구 또한 상원에게서 이번 일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혜정의 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혜정 씨, 그렇지만…….”
영구가 망설이자, 혜정은 여자의 가장 큰 무기를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구 씨, 나, 오늘은 마음 먹고 나왔어요. 이제 나도 알 권리가 있다구요.”
“뭘…….”
혜정은 손가락으로 영구의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혔다.
“이 술집 바로 옆에 오성급 호텔이 있지요. 거기 스위트 룸 하나가 지금 누구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까요?”
이제 미끼는 던져졌고, 고기가 물기만 하면 된다.
영구의 눈에 욕망이 휙 하고 지나가더니,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혜정의 손을 슬며서 쥐었다. 혜정은 가만히 있었다.
“지금 내 주머니에 5 십 5 억짜리 수표가 한 장 있습니다.”
“그래서요? 설마 아리랑의 자금을 훔친 건 아니겠지요?”
영구는 고개를 끄덕했다.
“훔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일 태원 새마을 금고에서 사람이 갈 겁니다. 이현석 회장에게. 오십 오 억의 부채를 상환하라고.”
혜정의 얼굴이 완전히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걸 본 영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채무를 완납한 영수증이 있지만, 실은 절반만 지불했다는 또 다른 영수증이 있습니다. 이게 진짜이지요. 그리고 아리랑은 당장 오십 오 억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태원에서는 바로 압류를 걸테고, 아리랑은 대단히 곤란해질 겁니다.”
혜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막이 있었구나.
“딱 하나 변수가 있습니다.”
“뭔데요?”
영구는 혜정의 손을 놓고, 술을 한 잔 마셨다. 입술로 잔의 옆에 묻은 양주 한 방울까지 핥아먹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귀여운 하얀 쥐를 앞에 두고 즐기는 뱀 같았다. 혜정은 몸이 오싹해졌다.
“바로 혜정 씨입니다.”
“제가 왜?”
“태화 투신에서 자금을 빌려주면 아리랑은 살아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영구의 입에서 태화 투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혜정은 왜 김상원이 자기를 납치하려 했는지 분명히 알았다. 자기를 볼모로 아버지가 아리랑에 돈을 못 빌려주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송영구, 이 나쁜 놈, 자기랑 결혼하기로 한 여자까지 이용하다니…….’
혜정은 아까부터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영구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제가 막을 거니까. 그럼 내일 아리랑은 끝장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혜정 씨.”
영구는 혜정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면서 흐흐흐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