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장.
XX 호텔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준영은 로비에서 초조하게 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십 오 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그때 로비의 문을 통하여 혜정과 병승이 들어오는 것이 준영의 눈에 띠었다. 준영은 일어나 손을 흔들었고, 잠시 후, 세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진영이 형, 오랜만이에요.”
병승은 준영을 진영으로 알고 있다.
“이제 병승이도 알 필요가 있어서 데리고 왔어요.”
혜정의 말에, 준영이 아니라 병승이 깜짝 놀랐다.
“누나, 무슨 일인데…….”
“병승아, 너도 잘 들어 둬. 앞으로 회사도 운영하고 하려면, 이런 내막들에 대해서 미리 공부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준영은 혜정의 말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 누가 먼저 얘기를 할까요?”
준영이 말을 꺼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틀린 것이 있으면 고쳐주세요.”
혜정은 가만히 준영을 쳐다보다가, 동의를 했고, 병승은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점점 긴장을 했다.
“먼저, 지금 혜정 씨는 임신을 했고, 아이 아빠는 나입니다.”
“예? ……. 누나…….”
“잠자코 들어.”
혜정의 말에 병승은 토끼눈만 뜬 채 준영의 입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냐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것 때문에 혜정 씨가 나에게……. 음……. 혜정 씨, 거친 표현을 써도…….”
“상관없어요. 누구나 다 잘못을 했으니까요.”
준영은 혜정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혜정 씨가 아리랑이 망해 버렸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습니다.”
준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혜정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혜정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여기부터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일어난 사건은 이렇게 되었지요. 아리랑의 송영구 실장이 태원 새마을 금고, 여기는 사채업자들인데, 태원하고 손을 잡고 아리랑에 모종의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왜 송 실장이 배신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태원의 김상원이라고, 이 사람이 태원의 회장 아들인데, 김상원이 혜정 씨를 납치하려고 했었고…….”
납치라는 말이 나오자, 병승은 혜정을 보면서 더욱 더 눈을 크게 떴다.
“준영 씨가 나를 구해주었다.”
혜정이 중간에 끼여들었다.
“준영이 형은 지금 병원에…….”
병승은 말을 하다 말고, 준영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윽고 그 눈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은…….”
“그래. 교통 사고도 김상원이가 저지른 거야. 그게 우연히 나하고 진영이가 옷을 바꿔 입게 되었고, 사고 후 사람들이 모두 혼동해 버렸지. 나하고 진영이하고. 그래서 진영이가 준영으로 병원에 누워 있게 된 거야.”
“누나, 그러면 아이 아빠가……. 진영이 형인 거야? 아님, 준영이 형인 거야?”
병승은 이제 모든 것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혜정은 병승이 자신을 쳐다보자, 손으로 준영을 가리켰고, 준영은 고개만 까딱했다. 이제야 병승은 조금씩 이해가 된다는 얼굴이 되었다.
“다행히도 준영 씨하고 진영 씨가 바뀐 덕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야.”
혜정이 보충 설명을 했지만, 병승에게는 아직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제 내가 말을 할 때가 되었군. 준영 씨, 송 실장은 나와 거래를 했습니다. 나는 두 형제가 나를 속였기 때문에, 아리랑에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송 실장을 끌어들였습니다.”
이제는 준영의 눈이 토끼눈이 되었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혜정을 바라보면서, 준영은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러자 병승도 따라서 술잔을 들었다.
“너, 운전해야지?”
혜정이 병승을 제지하려 하자, 병승은, “아니, 난 오늘 누나와 끝까지 함께 할 거야.” 하고 대답하더니, 그대로 맥주를 마셔버렸다.
“좋아.”
혜정은 병승을 든든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준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송 실장은 나에게 결혼을 조건으로 걸었습니다.”
그제야 준영은 송영구가 왜 아리랑을 배신했는가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 여자라면 충분히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준영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보통 여자가 아니다. 준영은 침을 꿀꺽 삼켰고, 그 모습을 혜정은 살짝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를 납치하려고 하다니……. 나는 그런 배신은 용납 못합니다.”
혜정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럼, 지금 송영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회사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준영이 말하자, 혜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마, 어디론가 피했을 겁니다. 그 이유도 말해드리지요.” 하고 말했다.
“준영 씨는 모르겠지만, 아리랑이 사채업자들에게서 백 억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이자 십 억을 합쳐 갚았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아니요. 절반, 즉 5 십 5 억을 송영구가 빼돌렸습니다.”
“뭐요?”
준영의 목소리가 커지자, 혜정이 황급히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이제 태원에서 5 십 5 억을 갚으라고 오면, 이현석 회장님이 곤란해지겠지요.”
“이런, 제기랄, 이 나쁜 놈을…….”
준영의 눈에서는 살기가 뻗쳤으나, 혜정은 느긋하게 병승을 바라보았다.
“송영구는 가짜 영수증을 회장님께 드렸답니다. 그리고 진짜는 김상원이 가지고 있지요. 송영구가 사라진 지금, 만약 김상원이 이걸 알면, 바로 진짜 영수증을 들고 아리랑으로 올 겁니다. 이게 문제이지요.”
혜정은 말을 마쳤고, 준영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지금 당장 어디서 5 십 5 억을 마련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하지요? 송영구를 찾을 수도 없는데…….”
준영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이걸 본 병승은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근원은 누나네. 누나가 송 실장을 꼬셔서 이렇게 만든 거 아냐?”
병승은 혜정 탓을 했다.
“아니. 이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어. 내가 잘못한 거야.”
준영은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준영이 잘못해서 혜정에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아무리 진영이 제안했더라도, 준영이 거절하면 그만이었을 일이었다. 준영은 혜정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준영 씨, 나는 태원의 김상원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만약 내가 납치되었다면, 어떤 일을 당했겠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혜정의 눈이 노기를 띠었다.
“어떤 식으로든 돌려줘야 해요.”
준영은 혜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선경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면서 졸린 눈을 깨웠다. 밤마다 진영이 꿈틀대면서 잠꼬대를 하는 통에, 선경은 깊고 편한 잠을 자는 게 힘들었다. 이제는 침대 위의 남자가 준영이 아니라 진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침대 위의 남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련해졌다.
‘난, 누구를 좋아하는 걸까?’
그순간 병실에서 쿠당탕 소리가 났다.
선경은 깜짝 놀라 뛰어나갔고, 진영이 병실 바닥에 떨어져 꿈틀대는 것을 발견했다.
“오빠!”
진영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몸에 연결되어 있던 링겔이 걸려있던 스탠드도 함께 넘어졌다. 병실 바닥에 유리조각과 액체가 흥건히 흐르기 시작했다. 선경은 재빨리 호출 버튼을 누른 다음, 진영을 감싸안았다.
진영이 선경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자꾸 몸을 일으키려고만 했다.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혀를 움직여 뭐라 선경에게 말을 하려고만 했다.
병실 문이 열리며 남자 간호사와 여자 간호사가 뛰어들어왔다. 둘은 진영을 들어 다시 침대로 옮겼다. 다시 한 명의 여자 간호사가 들어와, 병실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선경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지만, 간호사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진영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진영이 왼손을 들어 허공에 흔들었다.
선경은 진영을 가만히 보다가, 탁자에서 종이와 볼펜을 집어 진영의 옆에 놓았다.
진영이 힘겹게 볼펜을 들어,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비뚤비뚤했지만, 선경은 알아볼 수 있었다.
‘선경……. 나……. 일어설…….’
“그래, 진영 오빠, 오빠는 일어설 거야. 걱정 마.”
선경이 진영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내자, 비로소 진영은 볼펜을 놓고, 선경과 눈을 마주쳤다. 이 모습을 간호사들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형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부하의 질문에 김상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형님, 송영구는 필리핀으로 도망갔습니다.”
상원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여기저기 줄을 대서, 송영구의 행적을 추적했더니, 송영구는 삼 일 전에 필리핀으로 출국했다는 정보가 나왔다.
‘송영구, 이 자식이……. 5 십 5 억을 가지고 날라……. 나를 물을 먹여……. 이럴 수는 없어.’
“형님, 회장님께서 아시면…….”
김상원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아시면,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야쿠자라면 당연 할복을 해도 시원찮을 일이었다.
‘진짜 영수증이 있지. 이걸 가지고 가서 돈을 받아내야겠다. 그래야 아버지한테 체면이 서지.’
“차 대기시켜.”
김상원은 태원 새마을 금고 본사 깊숙이 있는 비밀금고에 넣어둔, 아리랑과의 진짜 거래 영수증을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밖을 보니, 이제 슬슬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상원은 담배를 피면서 자욱한 연기 속에서 송영구를 생각했다. 분명 뭔가가 잘못되었다. 누가 송영구를 빼돌렸을까? 최준영일까? 손혜정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원의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형님, 차 준비되었습니다.”
상원은 담배를 끄고, 다시 한 번 창밖을 보았다. 이제 금방 거리는 어두워질 것이고, 다시 인간들이 만든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 상원은 내일 아리랑으로 쳐들어가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