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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Gold)과 피(Blood)-48

by 윤금현

48 장.



현석은 어두워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틀 전의 일이 머리에서 자꾸만 떠올랐다. 준영이 와서 부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 사람을 열 명 정도 빌려주세요. 이유는 묻지 마시고.”

“진영아, 요새 무슨 일 있냐? 왜 그렇게 바쁜 거냐? 그리고 사람을 빌려달라니…….”

“그게……. 그 교통 사고 때문에 그럽니다. 조사를 해야 하는데,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해서요.”

“얘야, 그건 경찰이 할 일이고, 더구나 지금 아무런 단서도 없지 않느냐? 경찰이라고 놀고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현석은 걱정스런 말투로 준영을 달랬다.

“그리 큰 일은 아니에요. 일이 좀 많고, 시간도 별로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현석은 준영에게 회사의 젊은 남자 직원들로 열 명을 골라 붙여 주었다.


“무슨 일이지? 회사도 이제 점점 안정이 되어 가고 있는데…….”

현석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영구가 없어졌기 때문에, 일단 친구의 법무법인에 연락하여, 다른 변호사 한 명을 임시로 고용하고 있었고, 지금 그 변호사가 방 밖에서 자기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구나.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현석은 비서를 불러 변호사를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벌써 밖은 어두워졌지만, 할 일은 해야만 했다.


* * *


김상원은 젊은 남자 두 명을 대동하고, 자신의 비엠더블유 자동차에 올라탔다. 두 명은 앞에 타고 자신은 혼자서 뒤에 탔다.

“태원으로 가자.”

상원의 차가 출발하자, 빌딩의 정문 현관 문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폰을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출발했습니다.”


상원은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를 달려 태원 새마을 금고 본사에 도착했다. 운전자는 그대로 두고, 자신은 다른 한 명을 대동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일 층에 자리잡은 태원의 본사로 상원이 들어가자, 스무 명이 넘는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상원에게 인사를 했다. 상원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후, 허겁지겁 뛰어나온 본부장을 앞세우고 가장 안쪽에 있는 금고실로 향했다. 상원은 금고실에서 개인금고를 연 다음, 거기에서 A4 크기의 하얀 종이봉투 한 장을 끄집어 냈다.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자신과 송영구의 서명이 확실히 보였다. 김상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이걸 가지고 가면…….

상원은 금고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로부터 네모난 검정 플라스틱 가방을 건네받았다. 가방을 열어, 거기에 종이봉투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건물에서 나왔다. 양복을 걸친 젊은 남자 두 명이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김상원은 짜증이 났다.

“야, 이 새끼들아, 저리 안 가?”

상원이 욕을 하자, 두 남자는 멀뚱히 상원을 쳐다보았다.

“야! 담배 안 꺼?”

그제야 두 남자는 겁에 질린 듯한 몸짓을 하며, 건물 앞을 떠났다.

상원은 차에 탔고, 차는 바로 출발했다. 그러자 저만치 피했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예. 출발했습니다. 사무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비엠더블유 안에서 상원은 생각에 잠겼다.

‘내일 아침에 바로 찾아가야겠다. 그러면 엄청 놀랄 테지. 이걸로 아리랑을 접수할 수 있을 거야. 송영구도 이건 몰랐을 걸. 내가 왜 순순히 5 십 5 억을 안 받았는지…….’

상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송영구를 속여 넘긴 것이다. 송영구는 5 십 5 억에 눈이 팔려, 나 김상원의 깊은 속을 몰랐던 것이다. 겨우 5 십 5 억, 이걸로 아리랑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리랑을 집어 삼킬 수는 있다. 상원은 아버지 김태원이 떠올랐다. 이제 이걸로 자신의 입지가 확고해지는 것이다.

비엠더블유가 신천 역을 지났다. 차창 밖으로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들이 보였다. 상원은 천천히 야경을 감상했다. 그때였다.

“형님, 저거, 저거…….”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그러자 운전하던 남자가 차를 세웠다.

“왜 그러냐?”

상원도 창 밖을 보았다.

“형님, 저거, 손혜정이……. 손혜정이 아닙니까?”

손혜정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상원은 창 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형님, 저기, 저 하얀색 모피 코트 입은 여자 말입니다. 빨간 목도리 한 여자…….”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상원도 자세히 보았다. 손혜정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다.

거리에 서 있는 여자는 혼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폰을 얼굴에 대고 서 있었다. 여자가 상원 쪽을 바라보았다. 건물의 옥외 광고판에서 쏟아져 내리는 LED 불빛에 여자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손혜정이었다.

상원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 여자를 잡으면, 최준영을 끌어낼 수 있다.

“야! 가서 잡아 와!”

“예? 형님?”

“뭐 해? 빨리 내려!”

상원의 재촉에 앞 좌석의 두 남자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야! 칼 챙겨!”

그러자, 조수석에서 내렸던 남자가 다시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글로브 박스에서 케이스가 씌워져 있는 가느다란 단검을 꺼냈다.

“말 안 들으면, 어깨 같은 데 찔러도 된다. 단, 죽이지만 마라.”

상원의 말에 두 남자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둘은 이제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손혜정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원이 뒷쪽 유리창으로 보니, 손혜정은 상원과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 뒤로 두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 혜정의 모습이 십 여 미터 정도 멀어지다가, 왼쪽으로 향하더니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상원의 부하들이 서둘러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엠더블유 운전석 문이 슬며시 열렸다. 상원은, 뭐지?, 하면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모기약 같은 것이 분사되었다. 헉! 하고 놀란 상원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고, 그 다음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흔들었으나, 벌써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상원은 석유 냄새 같은데 하면서 앉아 있던 좌석에서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잠시 후, 네 개의 문이 전부 잠기더니, 차 문이 탁 하고 닫혔다.


두 남자는 앞서 가던 모피의 여인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하얀 등 뒤로 빨간 목도리가 흔들거렸다. 건물 로비에는 경비원 밖에 보이지 않았다. 둘은 천천히 걸어서 계단으로 갔고, 위를 보니 여인은 2 층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둘은 뛰어서 계단을 올랐고, 2 층의 절반을 올라갔을 때, 흰색 모피 코트는 3 층의 절반을 올라가고 있었다. 둘은 다시 뛰었고, 3 층에 도달하자, 여인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둘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그대로 뛰어서 사무실 앞까지 왔다. 문이 완전히 안 닫힌 채 살짝 열려 있었다. 둘은 문을 확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좁은 통로, 십 미터 정도 되는 통로 끝에 거실 같기도 하고, 사무실 같기도 한 공간이 보였다. 통로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거기에, 손혜정이 연한 조명을 받으며, 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모피 코트 밑으로 여자의 미끈한 다리가 하얀 스타킹에 싸인 채 두 남자를 보고 있었다. 어서 와, 어서 와, 하고 부르는 것 같았다. 둘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천천히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십 여 미터를 지나 통로 끝까지 왔을 때, 갑자기 불빛이 사라졌다. 그러자 손혜정의 모습도 사라졌다. 두 남자는 그 어둠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고, 다음 순간 퍽! 퍽! 소리와 함께, 대리석 바닥에 쭉 뻗고 말았다.


* *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꿈인가 싶었다.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상원은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자신의 눈이 뜨여져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쾅! 쾅! 쾅!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제야 상원은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보이고, 그 밖에 사람 얼굴도 보였다. 상원은 손을 뻗어 차문을 열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앞쪽을 보니, 운전석 창문에도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 사람은 손으로 핸들을 가리켰고, 거기에는 열쇠가 꽂혀 있었다. 상원은 뒷문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차 안을 들여다 보던 남자가 거수경례를 했다. 가슴팍에 폴리스라고 써진 글자가 보였다.

“여보세요,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요. 차를 빼세요.”

경찰이 상원에게 말했다.

상원은 차 안을 다시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두 놈들이 손혜정을 따라 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두 놈들은 아직……. 상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려 보세요.”

경찰이 재촉하자 상원은 차 밖으로 나왔다. 차디찬 밤의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가자, 상원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가방! 상원은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플라스틱 검정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종이 뭉치들을 확 휘저어서 밖으로 빼낸 상원은 정신없이 종이더미를 뒤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없다! 그것이 없다! 상원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없으면 아리랑에 갈 수 없고, 아리랑에 갈 수 없으면, 자신은 아버지 김태원을 볼 낯이 없게 된다. 그때 김상원의 머리에 최준영이 떠올랐다. 이게 다 그 자식이……. 어떻게 한다? 갑자기 상원의 머리에 송영구가 떠올랐다. 송영구……. 필리핀…….

“이봐요, 괜찮습니까? 여기 차 세우고 자면 어떡합니까?”

김상원은 얼른 돌아선 다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바로 빼겠습니다.”

상원은 뒤에서 앞좌석으로 몸을 들이밀어, 차 열쇠를 빼낸 다음, 차 밖으로 나왔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부하 녀석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운전석에 탄 상원은 차 시동을 건 다음, 사무실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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