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민 칼럼] 을사늑약 120년 한일협정 60년
며칠 지나면 을사년이다. 푸른 뱀의 해다. 지난 두 차례의 을사년에 각각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조약이다. 통감부 설치로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65년 또다시 을사년이 되었을 때 한국과 일본은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한일기본조약이 그것이다. 1945년 해방 후 20년 만에 비로소 국교를 정상화한 것이었다. 군사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발전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 불완전조약으로 5억 달러를 받아내 포항제철을 만들고 경부고속도로를 깔며 경제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공과 과가 있지만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종잣돈으로 고도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과연 지금의 한국이 있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1965년 한일협정은 불완전협정이었다. 과거를 깔끔하게 청산하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지속적으로 양국 관계에 발목을 잡았다. 강제동원 배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윤석열 정부도 사실상 이를 받아들여 제3자 변제 방식을 통해 빈 컵에 반 잔의 물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통 큰 결단이었다는 평가와 더불어 굴욕적 외교라는 비판이 동시에 존재한다,
2025년, 을사년. 을사늑약을 강제당했던 12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한민국의 힘은 강해졌다. 물론 불완전조약으로 일컬어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60년 전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21세기가 되기 전만 해도 20~30년 이상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되었던 경제력은 오늘날 대등한 수준이 되었다. 일본이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불황에 빠져 헤매는 동안 한국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202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 6000달러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했다. 인구 5000만 이상 국가 가운데 6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영향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 소프트파워 또한 일본을 앞선 지 오래다. K팝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는 이미 전 세계 으뜸이다. 2023년 한국인 7백만 명이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 방문 외국인 2250만 명 중 거의 3분의 1에 육박한다. 반면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250만 명에 불과하다. 일본 인구가 한국의 2.5배나 되는 데 비하면 적은 편이다.
좁혀지지 않는 역사인식 문제로 양국은 매년 갈등을 겪는다. 교과서 검정 결과가 나오는 봄,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일본 외교백서 방위백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로 기술될 때마다 갈등은 불거진다. 한일관계에는 늘 뇌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한일 두 나라의 협력은 긴요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 이웃 국가이기 때문이다. 안보 측면에서도 협력은 필수불가결하다. 북한의 광기 어린 핵 미사일 개발에 따른 군사적 위협에 공동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치열한 다툼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도 한일 협력은 절실하다.
그래서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제2의 김대중 오부치 선언이 필요하다. 당시 우리 문화계는 일본문화 개방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혼란스러워진 정국이다. 다가오는 을사년, 차기 정권을 책임질 세력은 한일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해로 삼기를 바란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도 지난 총선에서 참패해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긴 했지만 그가 역사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정치지도자들에 비해 온건하고 유연한 만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장기 불황과 국력 쇠퇴로 일본 내에서는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목소리는 점차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수천 년간 우수 문화를 전해주었듯 너른 아량으로 형님 외교를 펼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