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은퇴 후 설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by 윤경민

*은퇴 후 설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장생활을 30년 넘게 하니 정년퇴직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으니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주어질 것이란 기대(?)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일은 조금만 하고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것들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은 불확실한 정년 연장은 논외로 하자. 현역 언론인으로서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건 현실이니까. 그 전제 하에 인생 후반기를 설계하기로 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30년 중 20년은 거의 일만 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적으로 주 5일제가 도입되기 전은 물론이거니와 그 후에도 사실상 주 7일제에 가까운 '살인적' 노동이 다반사였다. 어찌 보면 스스로 그걸 즐겼는지도 모른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방송하며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엔도르핀으로 육체적 피로를 견뎌왔고 극심한 스트레스도 버텨왔다. 방송이 주는 묘한 매력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곧 죽을 것처럼 힘들 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한 순간이었다. 그만큼 이제는 오롯이 나의 삶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나머지 10년은 이전 20년과 비교하면 여유가 많았다. 워라밸, 소확행 이런 말들이 직장인들의 메이저 문화로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나의 노동 패턴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뉴스가 주력 상품인 언론사에서 '뉴스도 서비스하는' 기업으로 옮기고 나서 나의 정체성에 약간의 혼란을 느끼기도 했으나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관리자의 무거운 책임을 벗어나고 1년 반. 직책수당과 '법카'는 사라져 불편함이 커졌으나 마음은 한결 가볍다. 물론 누리던 권력이 사라지니 허전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은퇴 후 삶의 설계에 분주하다. 뭐든 미리미리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은퇴 설계도 그런가 보다. 우선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만든다. 전 세계 20개 도시 한 달씩 살아보기 프로젝트가 가장 상위 랭크다. 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건데, 아직은 프로젝트명만 정했다. 구체적 도시명은 못 정했다. 꼭 살아보고 싶은 곳은 유럽과 동남아 몇 개 나라. 특히 런던은 20대 초반 추억을 되살려 꼭 한 번 다시 살아보고 싶은 도시다. 그리고 에든버러도. 파리와 로마, 나폴리, 취리히, 부다페스트,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1993년 초 배낭 메고 보름동안 종횡무진했던 도시들을 다시 다녀보고 싶다. 이번엔 도시당 한 달씩 살며 천천히. 관광명소도 물론 다녀야겠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니 사전에 해당 국가와 도시의 역사, 문화, 지리 공부는 필수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현지인들과 맥주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 좋겠다.


이것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탈이다. 제주 올레길 완주,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DMZ 평화의 길 걷기도 도전해보고 싶다. 어머니가 도전하셨던 산티아고 순례길도.


또 국내 박물관 순례, 미술관 순례, 계절별 지역 축제 찾아다니기도 버킷리스트에 넣어두었다. 지식을 충전하며 문화와 역사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나간다는 것. 은퇴 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에는 배움 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니며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글로 정리해 지식 나눔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글 쓰고, 강의하고, 노래하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재미나고 행복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은퇴 후 삶이다.


언제까지 살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나름 예상 수명, 목표 수명이 아니라 예상 수명을 말하자면 95세. 백세시대에 접어들었으니 가능성은 50% 이상이다. 아직도 살 날이 40년 가까이 남았다고 치면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할 일이 차고 넘친다. 대략의 그림을 그렸으니 이제는 계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촘촘히 짜보자.


엥? 그런데 이걸 어쩌지? 비용이 문제로구나. 국민연금과 개인연금 만으로는 부족할 것이 뻔 하니... 계획보다 비용 조달 방안 강구가 우선이구나.


2025년 6월 마지막 날.

###

keyword
작가의 이전글털보 담임의 대걸레자루 '빠따'가 그리워질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