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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의 추억... 밤샘 에어컨에 죄책감

by 윤경민

더워도 이렇게 덥진 않았다. '하꼬방'(상자처럼 생긴 방이라는 뜻의 잔재일본어)이라고 불리던 슬레이트 지붕 좁은 집에 살던 어릴 때도 말이다. 에어컨은 언감생심 구닥다리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여름을 넘겼다.



신혼 때도 그렇게 버텼다. 4층건물 다세대주택 3층 전셋집에 살 때 더위에 아이가 잠을 못 자고 보채면 아내는 부채질로 밤을 새웠다. 한여름 기껏해야 보름 정도였을까. 지나면 참을만했다. 에어컨을 들여놓은 건 내 집마련에 성공해 아파트로 이사하고도 몇 년이 지나 서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더위가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요 몇 년 전부터는 딴판이다. 특히 작년에는 서울에서 열대야가 한 달 넘어 34일이나 지속되는 기록적인 폭염이 한반도를 덮쳤다. 밤에도 이러니 낮은 말할 것도 없다. 외출하기가 겁 날 정도였다. 올해는 폭염이 더 일찍 찾아왔다. 더 오래갈 모양이다.



사무직인 나야 하루 종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휘감는 실내에서 더운 줄 모르고 지내지만 야외에서 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들은 이 불볕더위를 어떻게 견뎌내는지 안쓰럽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니께도 항상 당부드린다. 제발 한낮에는 논밭에 나가지 마시라고. 그러면 답이 돌아온다. 새벽에 나가서 10시 전에 들어오니까 걱정 말라고.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농사일이라는 게 그렇겠는가.



재작년까지만 해도 전기요금 폭탄이 무서워 아내는 에어컨을 함부로 켜지 못했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혼자 있는 동안 전기세를 축낼 수 없다며 그 찜통더위에도 선풍기 하나로 버텼다. 그랬던 아내가 작년부턴 달라졌다. 온열질환에 사망자까지 속출한다는 뉴스에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며 에어컨을 켜는 시간이 늘었다. '살인 더위'에 손을 든 것이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는, 아니 그랬던 나 역시 지난 이틀 밤 연속 에어컨을 틀어놓고 잤다. 전기세 아끼려다 스트레스받고 건강 해칠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그런데 찜찜하다. 이 가마솥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렇게 시원하게 잘 자도 되는 걸까. 마치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머니 같은 농민들, 야외에서 땡볕에 일해야 하는 건설노동자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택배노동자들, 뜨거운 헬멧 쓰고 달리는 배달노동자들... 에어컨 없는 집, 있어도 전기료가 무서워 못 켜신다는 어르신들, 달동네 쪽방촌 사람들... 펄펄 끓는 찜통더위가 무서워 집에 못 가고 경로당과 은행 등을 전전하는 이른바 폭염난민들은 이 긴 여름을 어떻게 날까.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이 심각해지면서 '폭염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냉방시설 접근권, 피서권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세상이다. 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출처 : LG헬로비전(http://news.lghellovisi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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