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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을거야

오늘의 윤슬

by sunny

커피 볶는 날 우리 집 거실은 풋풋하고 알싸한 생두 향기로 채워집니다. 촤르르.. 저울 위에 놓인 스테인리스 그릇에 생두가 담기고,

500그램씩 소분된 콩들은 각자의 이름표가 붙여진 바구니로 옮겨집니다.

각기 다른 품종이 순서별로 책상 위 검은 분류판 위에 펼쳐집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결점두를 골라내는 공정을 거친 후에야 뜨거운 열을 만나 원두로 탄생합니다.



커피를 볶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거실은 풋내음 속에 준비의 과정이 진행되었고

우리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로스팅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툭—무심결에 건드려진 두 개의 생두 바구니가 와르르 테이블 위에 쏟아졌습니다.

순식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엉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콜롬비아와 엘살바도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같은 품종의 연푸른 생두들이 구분도 할 수 없이 뒤섞여버렸습니다.

우리는 멈췄습니다. 말없이 바닥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냥 우리 둘만 마시는 걸로 해요.”

그렇게 우연히 블렌딩 된 생두를 볶아내었습니다.


고소한 견과류의 향, 카카오의 쌉쌀함, 흑설탕처럼 은은하고 부드러운 단맛.
평소의 남편의 눈꼬리는 8시 20분을 가리키는데 맛을 본 순간 9시 15분이 되었습니다.
놀람과 기쁨의 각도였지요.

두 가지의 커피를 볶아 내려했지만 예상치 않게 섞여버린 그 순간이 하나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계획 밖의 기쁨을 가져다준 블렌딩 된 커피의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윤슬, 가득한 집>의 첫 번째 드립커피의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로요.



그림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짧은 문장과 부드러운 그림들이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언젠가 이 책의 제목으로 커피 이름을 짓고 싶다.’

그림책을 덮으며,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을 붙이고 싶은 커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우리는 볼리비아의 후안카 가족이 정성껏 재배한 커피 체리 안에 단 하나의 콩만 자란 작고 둥근 희귀한 콩인 피베리 생두를 선주문했습니다.
예약하고 나서 곧 도착할 줄 알았던 생두는 예기치 않은 산지의 사정, 선박 지연, 운송 문제로 인해 무려 다섯 달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올 수는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수시로 배송조회를 확인하며 ‘괜찮을까?’ ‘생두가 오는 길에 상하지는 않을까?’ ‘진짜 도착은 하려나?’ 노심초사하며 기다린 생두가 드디어 우리 손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남편은 애태우던 마음을 고스란히 품고 로스팅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따뜻하게 한 잔, 차갑게 한 잔을 조심스레 내렸습니다.

그리고 첫 모금을 마신 그는 외쳤습니다.
“와, 괜찮아요.”

쓴맛을 감싸는 은은한 산미, 수줍게 다가오는 달콤함!
이 커피의 맛이 마치 쓰디쓴 인생 한 자락에 뜻밖의 위로가 찾아온 느낌이라고 남편이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과 같은 맛이 아니었을까!

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진짜 괜찮네요.”

기대 없이 마주한 기쁨, 오랜 기다림을 잊게 만드는 선물 같은 커피였지요.

그래서 우리는 <윤슬, 가득한 집>의 두 번째 드립커피의 이름을 그림책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괜찮을 거야’ 로요




B7A71138-3DD8-49F9-8F4B-0331A22A1C11.jpeg 윤슬, 가득한집의 기념품이 된 영수증..(부적과 같이 지니고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커피를 주문하시는 손님들은 이 독특한 이름들을 보며 자연스레 묻곤 합니다.

“이 커피 이름, 무슨 뜻이에요?”

그럴 줄 알고 어쩌다 사장이 된 남편은 이름이 지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준비를 항상 하고 있습니다. <윤슬, 가득한 집>은 커피만 마시고 가는 분들보다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이 더 많은 곳입니다.


공간 인근에 있는 원불교 망미교당에 제사가 있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남편이자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 모녀가 행사 전에 방문하셨습니다.
커피를 드시지 못하는 어머니는 디카페인 차를, 둘째 따님은 디카페인 바닐라 라테를, 큰 따님은 산미가 있는 커피를 주문하셨습니다.
먼저 떠난 분을 그리워하는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주문과는 별도로 무언가 드리고 싶었다는 남편은 주문 내용과는 별도의 내용이 적힌 메뉴를 영수증으로 출력하였습니다. 영수증은 필요 없다며 사양하는 큰 따님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입니다’라며 건네 드렸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두 메뉴를 찍어서 메시지로 전달했습니다.
따님은 눈물을 흘리셨고, 엄마에게 그 영수증을 보여드렸습니다.

건네받은 영수증을 한참 동안 보던 어머님은 조용히 나가셔서 동네 과일집에서 커다란 수박 한 통을 들고 오셔서 건네주셨습니다. 고마워서 그래요... 라 하시며.

이 두 커피의 이름은 어느새
손님들의 이야기가 되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가 되며,
바리스타가 전하는 메시지가 되어갑니다.


윤슬, 가득한 집.
우리는 오늘도 윤슬처럼 반짝이는 한 분 한 분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마음 다해 마주하려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 상황을 뛰어넘는 괜찮은 반전이 일어나기를,
‘괜찮을 거야’라는 다정한 다독임 속에 기다림의 시간도 소망으로 덮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의 윤슬들 (손님이든, 혹은 하루하루 마주하는 작고 큰 순간들이든) 그 만남 속에 채워질 가득한 이야기들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즐거운 상상에 잠깁니다.

새로 태어날 세 번째 드립커피의 이름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와서 누군가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게 될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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