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현실, 인문학이 사라진 자리에서

by 윤슬

대한민국의 현실은 숫자로 말한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2024년 이혼 9만 1천 건, 합계출산율 0.75명.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 비율은 25~39세 미혼의 절반을 넘고, 20대 청년의 81%가 독립하지 못한다. 경제는 세계 10위권이지만 삶의 질은 뒤처지고 있다. 성장의 속도는 빨라졌으나 행복의 체감은 낮아지고, 공동체는 느슨해지고 있다.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7명으로 5년째 OECD 1위다. 특히 노인 자살률은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이혼은 혼인 건수가 급감하는 가운데서도 줄지 않는다. 출산율은 0.75명으로 세계 최저, 수도권 일부 지역은 0.6명 대까지 떨어졌다. 이 숫자들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립된 노인, 해체되는 가정,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청년. 세 가지 현실은 악순환을 이루며 사회 기반을 무너뜨린다.

청년층의 현실은 더욱 명확하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과도한 주거비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서울의 전. 월세 가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치솟았고, 안정적인 주거 마련은 먼 미래의 과제가 되었다. 20대 비정규직 비율은 38.4%, 정규직 평균 근속연수는 2.6년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은 성장 과정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이 되었고, 캥거루족은 안락함을 선택한 세대가 아니라 떠날 수 없는 세대가 되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한국 사회는 어디서 길을 잃었는가.

표면적인 원인은 경제적 불안, 주거비 폭등, 교육 경쟁, 돌봄 부담, 고용 불안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는 질문하는 힘을 잃었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행복은 무엇인가, 공동체는 왜 필요한가. 철학이 사라진 사회에서 삶은 계산으로 환원되고 관계는 거래가 된다. 경쟁과 효율만 남은 사회에서 인간은 결국 수단으로 전락한다.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은 눈부셨다. 1960년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산업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유의 시간을 잃었다. 학교는 시험 위주로 가르치고, 대학은 취업률로 서열화되었다. 철학·문학·역사 같은 인문학 과목은 입시에서 비중이 낮아졌고, 실용성이 없다는 이유로 주변부로 밀려났다. IMF 이후 구조조정은 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들었고, 살아남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다.

통계는 냉정하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고립과 단절이 심화될수록 자살률은 오른다. 이혼은 가치관 변화가 아니라 경제·정서적 압박의 산물이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회”라는 청년 세대의 집단적 선언이다. 캥거루족은 독립하지 않은 세대가 아니라 독립할 조건을 빼앗긴 세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필요한가.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지식을 암기하는 공부가 아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묻는 과정이다.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문학은 타인의 감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하며, 역사는 과거의 시간을 거울로 삼아 오늘을 비춘다. 인문학은 확정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반복하며 사고의 깊이를 넓힌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행복은 무엇인가, 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들은 과거 철학자가 던졌던 것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삶이 단순한 생존으로 축소되는 순간, 인간은 도구로 전락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사치가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기술만으로 움직이는 세상은 방향을 잃기 쉽고, 경제와 정치가 인문학을 잃을 때 인간은 수단으로 취급된다. 플라톤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성찰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소모시키며 무너진다.

지금 한국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복지 예산만 늘려서는 안 된다. 인문학 교육과 토론 문화를 확대하고, 학교 현장에 질문할 시간을 돌려주어야 한다. 문학·역사·철학을 단순 암기 과목이 아닌 생각하는 훈련으로 되살리고, 시민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을 확충해야 한다. 기업과 정치 역시 효율과 성장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다시 인간이 되고, 성찰을 통해 공동체를 회복한다. 인문학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 체력이다. 그것이 회복될 때 자살률은 낮아지고, 가족은 다시 연결되며, 청년은 미래를 선택할 용기를 얻는다. 이제는 성장의 속도보다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먼저 묻고 답해야 한다. 인문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지금 당장 회복해야 할 사회의 마지막 경고음이다.

참고문헌

통계청, 「2024년 사망원인통계」, 2024.

통계청, 「2023년 혼인·이혼통계」, 2024.

통계청, 「2023년 출생통계」, 2024.

KB부동산 리브온, 「2024년 서울 전세·월세 동향」, 2024.

국토연구원, 「청년 1인 가구 주거비 부담 실태」, 2023.

OECD, Society at a Glance 2023, OECD Publishing, 2023.

한국노동연구원, 「청년층 고용의 질 변화와 정책 과제」, 2023.

작가의 이전글작가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