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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05. 2023

[상하이의 사랑법] 한없이 흔들릴 때면

Old Jazz Band

뜨거운 몸이 제멋대로 마음을 휘젓는 밤, 무작정 밤거리를 헤맨다. 휘황한 불빛 사이로 피라미드처럼 뾰족한 에메랄드 빛 지붕이 내 시선을 끌었다. 개츠비가 믿었던 ‘저 부두 끝에서 밤새도록 반짝이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처럼 미래의 환희를 약속하는 듯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브라스 악기의 경쾌한 리듬이 들려온다. 이미 홀 중앙 무대에서 밴드 연주가 한창이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 호텔 Old Jazz Band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니코스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재즈는 자유의 음악이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매번 똑같이 연주하지 않고 즉흥 연주로 연주자의 개성을 살린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연주는 영화 타이타닉 주제곡이나 ‘위에량다이뱌오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 같은 익숙한 곡인데다, 즉흥이라곤 하나 없는 틀에 박힌 연주뿐이었다. 심지어 음정과 박자를 틀리기도 했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 호텔 Old Jazz Band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애쉬 블론드의 백인 남자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유가 느껴지지 않나요?”

“자유라고요? 낡은 구닥다리 형식밖에 안 들리는데요.”

서툰 연주가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를 힐난하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평화가 없으면 자유도 없죠.”


그의 설명은 이랬다. 내 눈 앞에서 연주하던 밴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 밴드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다. 할아버지들이 함께 매일 밤 재즈를 연주한 게 1980년부터라고 하니 이미 40년도 더 넘은 셈이다. 각각의 연주가가 음악을 시작한 건 1940년대부터라고 하니, 그들이 음악을 붙들고 겪었을 세월과 음악을 나 같은 조무래기가 잠깐 듣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일본의 침략과 독립운동,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국공내전, 끔찍했던 문화 대혁명, 그리고 마침내 승자독식의 고도자본주의까지…. 거친 역사의 물결 속에서 밴드는 멈추지 않고 재즈를 연주했다. 저 머리 희끗한 음악가들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그 오랜 시간 한결같이 재즈를 연주했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 호텔 Old Jazz Band


“평화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 한결같이 지켜내는 것 아닐까요?”


재즈 바가 있는 호텔의 이름은 Fairmont Peace Hotel(和平饭店)로 과연 ‘평화’를 상징하는 상하이의 아이콘이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 호텔 Old Jazz Band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그날 밤 내가 들은 건 서툰 연주라는 음악의 형식뿐이었다. 안에 담긴 연주가들의 열정과 사랑, 인내, 그리고 평화라는 내용을 읽어내지 못했다. 재즈의 즉흥 연주도 엄밀한 내적 방법론에 의해 진행된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연주하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자유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익숙함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진행한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 호텔 Old Jazz Band


한없이 나 자신이 흔들릴 때면, 평화 호텔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을 백발의 연주가들을 떠올린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 호텔 Old Jazz 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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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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