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행간을 읽어내라는 지성인의 마지막 당부...
<출퇴근길 전철 안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제0호』를 읽었다>
『장미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가 2015년에 내놓은 마지막 소설 『제0호』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파고드는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92년은 이탈리아 전역이 부패 청산의 열기로 들끓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세상에 눈을 뜨던 92학번의 내 기억과 맞물려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결코 발행되지 않을 신문, 오직 누군가를 협박하고 길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제0호』를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역자의 서문처럼 이곳에는 정의를 좇는 기자는 없다. 대신 실패한 글쟁이들과 음모론에 심취한 이들이 모여 ‘나쁜 저널리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폭탄 테러가 정말로 일어나야만 제0호를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폭탄을 던질 수도 있죠. 그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말입니다.” 이 문장은 언론이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사건을 창조하고 조작할 수 있는 ‘플레이어’임을 암시한다. 실재하지 않는 공포를 실재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기술, 그것이 언론사에게 이득이 된다면 기꺼이 현실을 조작하는 태도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뉴스의 이면을 본다.
특히, “뉴스들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뉴스를 만드는 것입니다.”라는 통찰은 미디어의 본질을 꿰뚫는다. 이는 정보의 가치가 사실의 경중이 아니라, 편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배제된’ 프레임 속의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중을 기만하는 기술이 매우 정교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자의 의견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주장을 실어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진부한 의견을 소개하고, 그다음에 더 논리적이고 기자의 생각에 가까운 또 하나의 의견을 소개하는 겁니다.”라고 하면서, 기계적 중립을 가장하여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인용 부호 뒤에 숨은 기자의 의도,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교묘한 의견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내가 ‘객관적 사실’이라 믿었던 많은 기사가 실은 누군가의 정교한 연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이 반대자를 제압하는 방식은 논리가 아니었다. “반박의 내용보다는 반박하는 그 사람을 공격해서 신뢰를 흠집내라”라는 문장이나 “고발인과 기소인이 매일 하는 일을 수상하게 보이게 만들면 됩니다.”라는 문장은 현대 사회의 토론이 왜 그토록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메신저를 공격하여 메시지를 지워버리는 기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의혹’만으로도 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이 방식이 소설 속 1992년의 이탈리아뿐일까?
움베르토 에코는 이 ‘실패한 글쟁이들’의 입을 빌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제목 『제0호』는 영원히 세상에 나오지 않을 예비판이자, 동시에 실체가 없는 허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제1호’의 진실된 세상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편집된 ‘제0호’의 세계를 현실이라 믿으며 살고 있는가?
움베르토 에코가 남긴 이 마지막 소설은, ‘쏟아지는 텍스트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의심하고 미디어의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라는 지성인으로서의 마지막 당부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