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각성했으니 나도 벌써 7년 차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 사이 여러 차례의 선거가 있었다. 모든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와 재보궐 선거에서 나는 오직 여성주의라는 원칙을 고려해 투표해왔다.
선택은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보다도 쉬웠다. 여성 후보가 있으면 여성 후보를 뽑았다.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뒷번호 군소정당 후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여성 후보가 한 명도 없으면 “여성 정치인”이라고 쓴 무효표를 던지기도 했다. 당을 뽑아야 하면 여자인 나를 위한 정책을 내놓는지를 봤다. 당의 지도자가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여자인지를 봤다. 둘은 보통 일치했고, 내 고민은 아주 짧았다.
내가 보내는 <별편지>를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이번에도 아주 쉬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여성 후보를 뽑을 수 있으면 여성 후보를 뽑는다. 내 단순한 원칙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8일에 2월호를 보냈으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후보를 뽑으려 한다. 이 글을 읽는 여자들에게도 이재명 후보에 투표해달라고 호소하려고 한다.
오늘 오전 11시 나는 보신각에 나갔다. 추적단 불꽃의 박지현 활동가가 <이재명으로 마음 돌린 2030 여성들의 지지 선언>을 발표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협박을 뚫고 얼굴까지 공개한 박지현 활동가에게 최소한 응원의 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보신각터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파란 풍선이나 파란 장미를 들고 모여 있었다.
이재명 후보가 다른 남자 정치인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여성 정치인보다도 내 입장을 더 잘 대변해줄 정치인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오늘 보신각터에서 그 마음을 바꿀 만한 무언가를 봤다고 하고 싶지만, 역시나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신각터에 왔던 건 비웨이브 시위였으니 비교가 되는 건 당연했다. 낙태죄를 폐지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전부 여자였고, 거의 20대와 30대였고, 간절하게 목청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바위에 무참히 부딪히는 계란 같았다. 아무도 우리를 기록하지도, 기억하지도 않을 걸 예상하면서도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절박함에 익숙한 내게 오늘의 분위기는 낯설었다. 이재명 후보는 거대 양당 중 한쪽에서 나온, 질 가능성만큼이나 이길 가능성도 큰 후보다. 이를 반영하듯 신나는 분위기의 노래를 틀고 유세원들은 춤을 췄고, 모인 사람 중에는 누가 봐도 2030대도, 여성도 아닌 쪽이 훨씬 많았다. 전형적인 유세 분위기에 진한 ‘현타’가 몰라와서 그냥 집에 돌아갈까 싶을 정도였다.
마이크를 든 사람 중에는 박지현 활동가와 선언을 하러 온 몇몇 일반인 여성분들만이 나와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지현 활동가는 여성가족부에게 도움을 받은 성폭력 피해자의 편지를 대독하면서 울먹였다. 나도 같이 눈물이 났다.
이재명 후보의 실물도 처음 봤다. 이 후보는 내가 대선 후보에게서 꼭 확인받고 싶은 상식적인 말을 했고(“저는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이상한 소리 하지 않는다”), 실현된다면 여자들의 삶이 훨씬 나아질 약속도 몇 개 해주었다.(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확대/산부인과 명칭 여성의학과로 변경/정혈대 보편 지급 등)
하지만 연설의 나머지 부분은 여성 의제와는 상관없는 정치 이슈로 흘러갔고, 나는 중반쯤에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뒤로하고 보신각에서 빠져나왔다. 여성 지지자만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데도 그렇다면, 우리에겐 삶이 걸린 문제가 이재명 후보에게는 그 정도 비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사전투표에서 이재명 후보에 투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문제지만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하기를 바란다.
그 무엇보다도 앞서는 이유는 우리가 윤석열 후보의 당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던 취약 계층 여자들이 오도 가도 못 하게 되고, 성폭력 무고죄가 두려워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티셔츠건 손가락이건 신조어건 페미 낙인이 찍혀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검열하는 미래가 코앞에 닥친 지금, 더는 배짱을 튕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윤 후보가 당선만으로 여성에게 끼칠 수 있는 해악은 이 후보가 당선 후 잠재적으로 끼칠 어떤 해악보다도 명확히, 압도적으로 해롭다. 저울추는 한때 비등했을지 모르나 이젠 완전히 기울었다. 여성혐오로 표를 모은 윤 후보의 지지층은 승리를 맛본 후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이고, 여성혐오는 승리 공식이 될 것이다. 이 공식을 뒤집으려면 막막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 등 뒤는 낭떠러지고, 우리는 후퇴할 여유가 없다.
나는 사표를 던지기 싫어서 이 후보를 뽑는 것이 아니다. 지금 헤아려보니 내가 7년 동안 뽑은 후보들은 단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나는 그 표가 사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못된 전략을 써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재명 후보를 뽑는 건 우리의 전략이 마침내 여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가 우리를 표를 끌어올 하나의 구체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우리를 향해 말하게 되었다. 그건 우리의 수많은 투표와 시위와 청원이 느리지만 효과를 발휘한 결과다. 이번 투표에서 이 후보가 당선되면 우리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유권자 집단으로 인식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당선된 대통령에게 정치적 빚을 달아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심상정 후보가 뭔가 부족해서 이 후보를 뽑는 것이 아니다. 난 심 후보가 여러모로 더 자격 있는 후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박지현 활동가가 심상정 후보보다 더 나은 정치인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밀어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를 존경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이재명 후보를 뽑는 건 어떤 여성 정치인 한 명의 당선보다도 이름 없는 여자들의 삶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3% 미만의 지지율을 가진 심상정 후보로 표가 분산되어 윤석열 후보가 당선될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을 무시하기엔 우리가 너무 절박하다.
나는 보신각에서 열린 비웨이브 시위의 정신을 잊고서 이 후보를 뽑는 것이 아니다.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에, 그때보다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이 후보를 뽑는다.
나는 이재명 후보가 ‘진보’라서 이 후보를 뽑는 것이 아니다. 한때 나는 내가 진보라고 여겼지만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으로 사고하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다. 경제, 외교, 안보 같은 굵직한 분야의 어느 결정보다도 사소한 여성 정책이 훨씬 더 내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 의제를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한다.
윤 후보의 발언과 정책과 지지층에 생리적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분야의 신념 때문에 이재명 후보는 못 찍겠다 싶은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단일화한 안철수 후보를 대안으로 생각해 온 여자들이라면 더더욱 윤 후보가 된 미래를 머릿속으로 구체적으로 그려보기를 바란다. 이 후보가 되었을 때와 비교해보기를 바란다. 여자로서 내 개인의 삶에 무엇이 우선인지 우선순위를 점검해보기를 바란다. (‘가오’가 있다는 걸 안다. 나도 보신각에 나가고 이런 글을 쓰기까지 상당히 자존심을 꺾어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부탁하고 싶다.)
나는 한때 윤석열 캠프에 몸담았던 신지예 전 서울시장 후보와 이수정 교수님이 싫어서 이재명 후보를 뽑는 것이 아니다. 보수당 내부에서 여성혐오를 바로 잡으려는 여자들의 노력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그들을 다 쓴 휴지처럼 내다 버리는 국민의힘에 분노하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앞으로 그들의 말에 더 힘이 실리게 하려고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한다.
이재명 후보는 보신각에서 선거권을 위해 싸웠던 우리의 “선배들”을 언급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목숨 걸고 내게 마련해 준 이 한 표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장판 밑에서 꺼내 준 천 원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기분이었다. 객관적으로 아주 적은 가치, 그러나 우리에겐 얼마나 각별한지.
나는 내 한 표가 가장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곳에 투표한다. “20대 여성은 아젠다 형성에 뒤처진다”라고 말한 이준석의 표 계산이 어림도 없음을 보여주려고 투표한다. 한 표 한 표가 아까운 우리가 훨씬 계산을 잘함을 증명하기 위해 투표한다. 그래서 나는 이재명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이재명 후보는 완벽에서 거리가 멀다. 이 후보가 당선된다면 아마 그 직후부터 실망할 일이 잔뜩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이 선거권을 쟁취한 이후 완벽한 후보들 사이에서 고를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 발짝씩이라도 나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빛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재명 후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더 호되게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이재명 후보보다 더 나은 후보를 가질 자유를 위해서라도, 나는 이재명 후보를 뽑을 것이고, 더 많은 여자가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내 표의 가치를 아는 만큼, 이재명 후보도 이 표가 무슨 의미인지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