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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남미녀모친 Jul 11. 2024

에어컨이 고장 났다(3).

에어컨 고장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

2023년 8월 10일

  어젯밤, 둘째가 땀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자세를 바꿔주고 땀을 닦아 주었다. 잠결에 덥다고 말하던 아들은 웃통을 훌렁 벗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직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아침, 창문을 열어 날씨를 확인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 다행이다. 통풍이 되도록 창문을 열었다. 방문 사이에 선풍기를 둔 다음 바람의 세기를 미풍으로 바꾼다. 비가 와서 공기가 서늘하니 좋다. 바람이 몸에 바로 닿으면 되려 추워질 수 있기 때문에 선풍기 바람의 방향을 맞출 때는 당구대를 생각한다. 벽에 부딪혀 한번 꺾인 바람이 아이들에게 닿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바람이 선선하고 비가 오지만 공기가 생각보다 습하지 않았다. 딸은 추운지 잠결에 이불을 잡고 몸을 덮는다.


  수요일, 에어컨에 붙어있는 연락처로 AS 기사님께 전화를 했고, 기사님은 그날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오셨다. 상태를 설명드리니 에어컨을 확인하신다.

" 바람 세기가 약하고 온도도 맞지 않은데요? 좀 더 자세히 봐야 할 것 같아요. 태풍이 지난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1년 중 가장 바쁜 시즌임에도 급하게 와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오늘 아침, 비는 오고 공기는 차다. 지금 사는 집은 베란다가 있으니 창문을 열어두고 비가 좀 들어와도 바람이 통하면 오늘 하루 버티기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니 나가서 운동할 수는 없기에 베란다에서 걷기로 했다. 베란다를 정리하고 걸었다. 가장 긴 베란다 끝까지 8 보니까 1200번쯤 왔다 갔다 하면 만보가 된다. 하지만 지압 실내화 때문에 더 걷지 못했다. 7000보에서 그만뒀다. 발바닥이 욱신하다. 이렇게 열심히 걸어도 그다지 땀이 나지 않았다.

   에어컨을 돌리지 않아도 덥지 않은 날씨. 다행이다. 생각해 보면 여행에서 돌아온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매우 더웠는데, 그 며칠 정말 더운 기간 동안 에어컨은 잘 버텨주었다. 생각을 하니 다시 에어컨이 고마웠다.




  오후에는 에어컨이 잘 작동했을 때 할 수 없었던 일을 해치웠다. 우선 잼을 만들었다.

스파게티 소스병은 정말 유용하다. 장류를 담이두기도 좋다.

   에어컨을 돌리며 부엌에서 찜이나 전골 요리를 하는 건 재벌들이나 하는 일이다. 오늘은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되니 아이들이 전부터 요청한 잼을 만들기 딱 좋은 날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부엌의 열기를 밖으로 빼내 줄 것이다. 과일을 갈아서 한참을 졸여 블루베리잼과 딸기잼을 만들었다. 뚝배기에 된장찌개도 끓이고, 전골냄비에 갈치조림도 만들었다.

  에어컨이 처음 고장 났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시원한 카페를 갔었다. 하지만 에어컨 수리가 기약 없는 상황에서 매일 카페를 가기는 무리였다. 한 자리에 몇 시간씩 앉아 있는 것도 문제거니와 아이 둘이 잠자코 앉아 있기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는 더위를 피하려고, 오늘은 아이들의 요청으로 비바람을 뚫고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문 닫을 때까지 책을 읽고 왔다. 멈춘 에어컨 덕분에 더위를 피하느라 간 도서관에서 책 읽는 재미도 알았고, 미뤘던 잼과 숙제 같던 요리도 끝낼 수 있었다. 한창 더울 때 버텨준 사춘기 에어컨도 오늘처럼 비 오는 날씨도 고마운 날이다.


  2023년 여름, 갑자기 멈춘 에어컨 덕분에 며칠간 폭풍 같은 감정 변화를 겪었다.


< 분노의 5단계(five stages of grief)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거론한 죽음과 관련된 임종 연구(near-death studies) 분야의 이론이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나는 에어컨의 고장)서서히 맞이하는 데에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심리상태를 가리킨다.                    출처 : 위키백과 >


1단계 : 부정

에어컨이 고장 났다고? 갑자기 그럴 리 없어! 어제는 멀쩡했다고!!!

2단계 : 분노

아악! 그거 고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 이제 곧 이사 갈 예정이고 며칠 뒤에 친정을 다녀오면 여름이 다 끝날 텐데 그 돈 쓰기 싫어!

3단계 : 타협

그래, 한창 더운 날은 카페에 가거나 동네 도서관에 다녀오면 되겠지.

4단계 : 우울증

기사님이 태풍 지나고 온다는데, 하, 그럼 내일은 어떡하지?

5단계 : 수용

그래도 여태껏 버텨준 게 어디야. 에어컨아 수고했어...


단 3일 만에 에어컨의 고장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며 폭풍 같은 감정변화는 잠잠해졌다. 에어컨은 언제 고치게 될지 모르지만 괜찮다.

잘 될 거다. 알 이즈 웰(All is well).




후기) 다음 날, 태풍이 끝나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에 설치기사님이 오서서 상태를 점검해 주고 가셨다. 냉매가 샜다고 하시며 다시 채워주셨다. 작년에 설치하고 AS기간이 아직 남아있어 무료로 채워주셨다. 비 오는 날 실외기를 오가며 점검해 주신 기사님의 양말이 젖어서 마침 집에 있던 새 양말을 한 켤레 드렸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에어컨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에어컨은 집에 두고 방학 동안 도서관에 다녔다. 고장난 에어컨 덕분에 좋은 습관이 하나 생겼다. 에어컨, 고마워~

올해도 잘 부탁혀~~~ 오늘처럼 시원한 밤에는 푹~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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