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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모닝 Jan 28. 2024

4-5. 분노에 가득 차있는 아이.

삶 전반적인 영역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나의 분노.







부모님을 향해서 분노해도 되는건가요?




 부모를 향한 분노가 나의 기저에 깔려있는데 이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는 상담선생님에게 내가 초기에 했던 말이었다. 상담 초기에 나는 부모님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사회통념상 화를 내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줬어도 피를 나눈 부모에게 분노를 표현한다는 것은 나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주 양육자였던 엄마를 향해 쌓아 놨던 나의 속 깊은 감정을 꺼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엄마를 향해 미운 감정이 들어도 그 순간마다 내 눈앞에는 강가에 내놓은 어린양처럼 한없이 약하기만 한 엄마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집단 상담을 하면서 각자의 인생그래프를 그리고 설명하는데,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쭉 설명을 하자 덤덤하게만 말하고 있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이전 글들 참고) 그중에 옆에 있던 분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겪으셨는데 그렇게 무덤덤하게만 말하실 수 있죠? 저 같으면 화가 나서 미치거나 울 거 같은데..” 

“지금 저 벽 앞에 있는 쿠션에 부모님을 향한 분노를 표현해 볼 수 있겠어요?” (상담선생님)


 갑작스러운 상담선생님의 질문에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긴 했지만 나는 쿠션 앞에서 손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부모를 향해 원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표현해도 된다는 것을 나에게 말해줘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일일뿐더러 부모님조차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에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없었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나의 감정을 가로막고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었다.



당신은 분노할 자유가 있다.
분노할 자유란 분노를 생각하고,
분노를 억누르고 분노를 분출하고,
분노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책, 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 (충페이충) -



 하지만 점점 상담이 깊어지고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표현하는 시간들을 거치자 저 깊이 묻혀있었던 분노도 어느덧 일상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의 존재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부모님, 나의 가능성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가족을 향해 무리를 해서라도 나는 온갖 모험적인 선택을 하며 내가 이렇게 가능성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목숨에 위협을 받았던 순간에도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 부모님에 대해서는 운동으로 몸을 만들어서 다시는 나를 아무도 만만하게 보지 못하도록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형제에 대해서 감싸주기만 하며 나를 위험하게 방치한 부모에 대한 분노는 질주본능과 연결되어 항상 과속 운전을 하는 습관으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나를 이리저리 안된다며 가두기만 했던 부모님을 향해서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하고 싶은 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야 했고 소비를 주체하지 못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던 엄마를 닮은 모습이 나오면 나 스스로 그것이 감당이 안되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 몸이 피곤해도 항상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다. 지적하기만 했던 부모에 대한 분노를 나를 지적하는 다른 사람에게 하기도 했다. 가부장적인 아빠의 모습에 화가 나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수직적인 권위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으며 직장도 한 곳에 오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계속 옮겨 다니는 선택을 했다. 대화를 하다가도 자기주장만 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모습의 아빠가 생각이 나서 말문을 닫아버렸다.


 이렇게 분노는 나의 기저 깊숙이 존재하고 있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활개치고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은 내면이든 외면이든 영향을 주게 되어있다고 했던가. 정말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정신분석 과정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연관고리들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지난 일이라고 머릿속에서 잊는다 해도, 그 일자체는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지만 그날의 감정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이 맞닥뜨려지면 무섭게도 그날의 감정이 무의식 중에 오버랩된다.








차사고 속에 숨겨진 나의 이면.

매거진 <너와 나의 마음이야기>의 ‘차사고 속에 숨겨진 나의 이면’ 글 발췌.





 바로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와 부산에서 황매산 군립공원에 핀 억새들을 보러 여행을 떠나는데, 차사고가 나고 말았다. 시골길이라 신호가 없는 도로였는데, 네비에 집중하며 따라가던 도중 옆에서 끼어드는 차량을 보지 못하고 직진했던 것이다. 운전석 쪽으로 내차보다 더 큰 차가 부딪히면서 내 차 안의 에어백은 다 터지고 친구와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차는 안의 구조가 다 보일 정도로 옆면이 다 부서졌지만 다행히 나와 친구는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났고 상대측 차량도 다친 곳 없이 좋게 사고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사고가 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이 사태를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고가 크게 안 나서,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시원한 마음도 들었다.


 그 당시 운전을 하고 다닌 지 7년 정도가 되었던 나는 평소 운전사고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거의 안 났었고, 매번 사고 날뻔한 순간들을 다행히 피해 갔었기 때문에 운전을 하고 다니면서 은연중에 나름 스스로가 운전 베테랑이 아닐까 라는 프라이드도 있었다. 이런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운전대만 잡으면 어디든 웬만하면 빨리 도착하려는 질주본능에 사로잡혔고, 나의 앞길에 차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오버스피드 상태로 도로를 내달렸다. 정말 이러다가 언젠가 사고가 나겠다는 생각도 했을 만큼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위험 수준을 어느 정도 직감했었다. 뿐만 아니라 운전대만 잡으면 알 수 없는 정의감이 솟구쳐서 깜빡이도 없이 바로 옆에서 끼어드는 차량을 그렇게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뒤에서 급 브레이크를 밟게 만드는 차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욕이라도 퍼부을 기세로 창문을 내려 눈을 세모나게 뜨면서 째려보곤 했다.


“이전부터 차로로 끼어드는 사람들을 보고 화가 더 많이 났던 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속도를 더 많이 내야 했던 건 분노 때문이에요. 이전부터 질주는 분노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바로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친형제가 내 목숨을 앗아갈 뻔했을 정도로 무섭고 공포스러운 일이 있었음에도 부모님은 그를 엄벌하지 않았다. 형제는 내 목을 있는 힘껏 조르고도 오히려 무릎 꿇고 나에게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문 뒤에 숨어서 장난스럽게 말하듯이 ‘미안’이라고 말하고 넘기려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모님 형제가 사과했으니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나에게 얼른 이 일을 잊으라며 다그치기만 했다. 상처받았을 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계속 ‘잊어버려라. 가슴 속에 꽁해가지고 그러면 너만 힘들다.’, ‘넌 참 이상한 아이구나, 가족들이 함께 살아야지 왜 혼자 따로 나가서 살려고 하냐.’라며 나를 부당한 가족의 울타리 속으로 가둬두려고만 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이었던 내가 느꼈을 무서움과 공포를 헤아리거나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자체가 단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나를 덮으려고만 했던 부모에 대한 분노가 내 가슴 속에 무의식적으로 켜켜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상담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었던 내 안의 어린아이를 바라보게 되었다. 가족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안정감조차 느끼지 못했던 어린아이.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없을 만큼 나의 경계가 없었던 어린아이. 나의 경계가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생명에 대한 위협을 고스란히 느꼈어야 했을 공포에 짓눌린 어린아이를 나는 충분히 느끼고 보살피고 기다려주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 어떤 심한 말을 내뱉더라도 내가 화가 나면 화를 표현하게 놔두었고 억울해하면 같이 억울하다고 공감해 주었다. 그렇게 분노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토닥이는 그 시간들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어주었다.


‘화를 내도 괜찮아. 내가 부모였으면 자식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감히 어딜 건드려!! 라며 화내고 소리치면서 그 형제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해도 모자랄 판에 남도 아니고 자기가 낳은 아들이 여동생을 목 졸라 죽이려고 하는데 방치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


‘그날에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고 억울하다 정말..’


‘하지만 이제는 화가 나는 걸 숨기지 않아도 돼. 좋은 사람인척 화내는 것을 억누르려고 하지 않아도 돼. 화가 나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러고 나서 건강하게 밖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 나가면 돼.’


 내 안의 분노에 찬 어린아이를 달래고 토닥여주며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 때쯤, 그렇게 차가 수리되고 정비소에서 내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전과 다르게 핸들을 잡아도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20-30분 일찍 출발해서 천천히라도 안전하게 가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젠 앞서 새치기를 하는 차에 대해서도 놀라긴 해도 ‘사고가 안 나서 다행이야’, ‘저 차도 오죽하면 저러겠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로서는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하나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데도 엄청나게 에너지가 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내 내면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시간들을 가지자 정말 생각이라는 것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는 경험을 한 것이다. 나 스스로도 정말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변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논리적인 이성에 덮어두고 감추지 않을 거야.

내가 널 알아줄 거야.



 “부모님을 미워하면 니 속은 편해? 그분들도 온전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어서 너에게 그런 원하지 않았던 상처를 준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시지 않을까?”


 내 주변 친구들은 열이면 열명 다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나의 가정사를 많이 들어왔던 절친들도 나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를 아끼는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 또한 부모님이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도 안다.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노하며 상처 입은 내가 지금 당장 얼른 고쳐야 할 만큼 이상한 것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며 지극히 정상적이다. 나마저도 과거의 나를 감싸주지 않으면,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누가 그 시절의 나를 알아줄까? 나 말고는 그 시기의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도 이성적인 논리로 내 감정을 덮으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다. 나는 먼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라는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주고 싶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은 강대하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어떠한 모습도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를 배척하지 않는다.

- 책, 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 (충페이충) -



 지금껏 나는 수많은 내면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나 스스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감정들을 논리적인 이성으로 덮어두려고 했다. 오늘을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숨 쉬고 살아가기 위해서 과거의 일들을 덮고 잊어버린 척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숨죽여 울고 있던 내면아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렇게 숨 쉬며 살아가다 보니 겉으로 화려하게 살지 않아도 나가 내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세상에서도 당당하고 힘 있게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하루하루 느껴간다. 이런 것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정신분석 상담과정에서 내가 몰랐던 내면 아이들을 많이 만나가겠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오래 걸리고 아파도 나는 내게 물린 결핍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라도 내 삶을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오늘도 내 삶은 변화하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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