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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소 Apr 12. 2020

디지털 성범죄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반복되는 범죄의 고리를 끊기 위한 디지털의 역할

n번방 사건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머리가 멍해졌다. "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 숨이 턱 막혔다. 다행히 국민청원으로 사건이 이슈화되었고, 마침 선거철을 맞아 "n번방" 공약도 줄을 이었다. 그러나 26만 명에 달한다는 공범, 안 걸릴 거라며 낄낄거리는 자, 피해 영상을 검색하는 자, 가해자의 서사에 집중하는 언론을 보고 있으면 상황은 여전히 참담했다. 그는 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 텔레그램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어디로 갈까, 피해자는 어디에 있을까, 동일한 범죄가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이런 고민 중에 헤이 조이스에서 <디지털 성범죄, 어디까지 처벌 가능할까?>를 주제로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자, 텔레그램 성착취 공대위로 활동하시는 김혜정 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혜정 님은 디지털 성범죄는 결코 신종범죄가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고 진화하는 범죄행위이며, 그 범죄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필요한 지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셨다. 혜정 님의 이야기를 토대로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해 디지털 기술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정리해보았다.




플랫폼만 바꿔가며 반복되는 디지털 성범죄,

범죄의 구조를 밝혀야 한다.


불법 음란물의 '성지'라고 불리던 소라넷은 1999년부터 2016년 폐쇄 전까지 100만 명의 회원이 이용했다. 해외에 서버를 두고 국내 수사를 피해 갔다. 오랜 수사 끝에 소라넷 운영진 4명을 찾았지만, 그중 단 1명만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추징금 14억은 범죄와 연관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파기되었다. 수사를 비웃듯 소라넷 폐쇄 이후에도 불법 음란물은 위디스크, 파일노리 등 웹하드, 텀블러, 웰컴 투 비디오, 텔레그렘으로 둥지만 바꿔가며 떠돌았다. 성범죄 영상은 사진과 영상을 올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소비되었다. 


특히 '웹하드 카르텔'로 드러난 웹하드 서비스는 저작권을 지키는 건전한 사이트를 표방하며 불법 음란 영상물로 사람을 유입하고 수익을 창출했다. '우리는 플랫폼을 제공했을 뿐, 누가  영상을 올리는지 모른다'던 웹하드 운영자가 사실은 헤비업로를 따로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직원으로 두었다. 뿐만 아니라 웹하드 업체는 불법 영상 필터링 업체, 불법 영상을 삭제하는 디지털 장의 업체까지 모두 유착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웹하드 회사의 대표인 양진호는 웹하드 카르텔이 아닌 폭행·마약 등 개인 범죄 혐의로 검거되었으나, 아직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양진호의 ‘웹하드 카르텔’ 구조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제공


디지털 성범죄를 끝내기 위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얽혀있는 '성범죄 카르텔'의 조직적인 착취 구조를 완전히 밝혀내고, 통째로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범죄 영상이 유통되는 과정에는 다양한 역할이 존재한다. 사이트 운영자, 영상물 제공자, 시청자, 필터링/삭제 업체 등이 수익과 소비를 공유한다. 해외에 서버를 둔 사이트 운영자는 어렵게 구속되더라도 처벌 수위가 낮을뿐더러, 개인의 처벌만으로는 음란 영상물의 유통 구조를 뿌리 뽑을 수 없다. 운영자만 가볍게 ‘털린' 후, 그 이후의 수법은 더 교묘해질 뿐이다. 텔레그램 n번방의 VIP가 되기 위해서 몇 번의 인증단계를 거치고, 가상화폐를 이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집단 성착취 거래 영상 사건이 '예견된 범죄'라고 말하는 이유다. 범죄자들은 이미 또 다른 플랫폼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이것을 '망명'이라 부른다. '구조'를 통째로 뿌리 뽑지 못한 범죄는 이렇게 반복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성,

파일 속의 피해자를 구해야 한다.


온라인에 유통되는 영상 속의 피해자는 독립적 인격이 아닌 하나의 이미지, 파일로 존재한다. 오프라인으로 일어난 '직접적인' 성범죄의 경우에도 처벌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적어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특정된다.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분리하고, 보호하는 제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살아있지 않은 사건이 된다. 피해자의 모습이 하나의 파일이 되어, 플랫폼 위에 무한히 재생산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이 피해자를 무력하게 만든다.


또한 현재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은 불법 촬영 행태보다 유출 영상의 '음란성'이 기준이 된다고 한다. 판사 1인이 영상물의 특정 신체 부위의 노출 범위에 따라 불법의 경계를 판단한다. 불법 촬영의 유포 과정에서 피해자가 입은 물리적·심적 피해를 헤아리는 대신, 촬영물의 '음란성'의 정도로 범죄의 형량을 판단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대법원이 'n번방' 등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 신설 과정에 있다고 한다. "디지털 성범죄의 본질은 음란물 유포가 아닌 성학대와 성착취, 즉 지배와 폭력이고, 그 피해는 사회적 유포로 인해 새롭게 추가되며 발생한다.", "아동·청소년을 상대로 한 디지털 성범죄는 직접적인 성폭력 범죄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범죄이고, 오히려 그 피해 정도가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중대한 범죄"라며 일부 판사들이 의견을 밝혔다.


성착취 영상물의 제작·배포 ·소지에 대한 엄격한 양형기준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막고,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 범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해 디지털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텔레그램은 수많은 채팅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을까?

텔레그램은 아동 성학대 신고채널을 운영한다. 신고로 확인된 범죄물은 지우나, 경찰의 수사에는 협조하지 않는다. 텔레그램의 설립 목적인 ‘검열받지 않을 자유’의 뒤편에서 전 세계적으로 성범죄 영상물이 유통된다.


1. 악용될 소지가 있는 디지털 플랫폼의 점검이 필요하다.


채팅, 전화가 가능한 서비스인가?

사진, 영상 공유가 가능한 서비스인가?


우리 서비스가 성착취의 수단이자 성범죄 영상 유통의 창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식하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범죄의 방조다. 서비스 제공자가 먼저 고민해야 다. 서비스 내에 범죄의 순간에 피해자나 목격자가 대응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지, 범죄 발생 시 빠른 제재 조치가 되고 있는지, 콘텐츠가 높은 기준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처절한 논의가 필요하다.


안전한 온라인을 위한 가이드 @깨톡


- 문제 사진이나 영상을 신고, 캡처, 저장하는 기능을 쉽고 잘 보이게 제공한다.
- 신고 접수 시 해당 게시물에 대해 빠르게 조치한다.
-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는 사용자에 대한 제재 조치를 마련한다.
- 사용자의 개인정보의 공유 허용 범위를 쉽게 설할 수 있도록 한다.
...


이외에도 안전한 온라인을 위한 가이드 깨톡에서는 온라인 서비스에서의 성착취 범죄를 막기 위해 서비스 개발자, 청소년을 위해 만든 가이드라인을 참고하면 좋다.


2.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불법 영상물의 필터링과 영상물 삭제 대책이 필요하다.


이전에는 피해자가 직접 디지털 장의업체에 큰돈을 주고 피해 영상물을 삭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범죄 유착행위가 생기기도 한만큼, 현재는 정부에서 피해 영상물 필터링과 삭제를 지원하고 있다.


- (여성가족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1366)는 전담으로 피해 영상물을 신속하게 삭제하도록 지원, 수사지원, 법률 및 의료지원 연계 제공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불법 음란물 모니터링하여 발견 즉시 경찰 수사 의뢰, 불법 촬영물의 신고에서 삭제까지 24시간 이내 심의


불법 영상물의 피해 사실이 외부에서 모니터링되기 이전에 서비스 내 자체 필터링 기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3. n번방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여 성범죄 대책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킨다.


n번방 사건에 화가 난 대학생들이 사건 정보와 검거 현황, 관련 법안을 업데이트해주는 'N번방 시민방범대'를 만들었다. 사건이 어디까지 진행되었고, 어떤 국회의원이 관여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코로나 19의 확진자 현황과 동선을 투명하게 공개한 것이 불안감 해소에 도움을 준 것처럼, 성범죄 사건 관련 현황 파악도 답답함 해소에 조금은 도움이 된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관심이 높다지만, 생활이 바빠지면 관심도 떨어진다. 매번 관련 기사를 읽다 보면 심신이 지친다. 그렇지만 이대로 사건이 묻히도록 둘 수는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좋은 수단이 될 것 같다. 사이트가해자들이 마땅한 처벌을 받을 때까지 계속된다.



N번방 시민방범대 사이트 캡처


청와대 청원, 그 이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청와대 청원은 국민들의 뜻을 수렴하는 소통 창구로 이슈의 집합소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행 법안, 예산 범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이런 대응이 가능하다/아니다 수준의 답변 외에는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청원이 빠르게 이루어지면 언론이 재조명하는 정도가 가장 큰 역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성범죄 문제에 관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잘 해결되고 있는지 많은 사람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은 행동들이 필요하다.

 

성범죄 관련 검색 결과를 방치하고 있는 포털사이트에 삭제를 요구하자. 실제로 n번방 사건 공론화 직후 '텔레그램' 연관검색어에 피해자 이름이 떴다. 삭제 요구를 통해 연관 검색어를 보여주지 않도록 조치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증거를 남기기 위해 신고하자. 신고는 기록으로 남고, 기록은 범죄를 증명하는 데 쓰이거나, 장기적으로는 범죄 통계에도 반영될 수 있다.

관심 있는 판결은 직접 참관해보자. 판사가 전권을 가지는 판결이 현장을 관심 있는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판사에게 심리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성범죄 피해자가 있다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피해자를 위해 뭘 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보다는 전문 상담센터, 처벌규정 등 전문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다. 만약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상급자 혹은 책임자에게 질문하라. 회사에 성범죄 처벌 규정이 있는 거 맞죠? 제대로 처리되고 있나요? 회사가 성범죄 문제를 인식하고 처리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오랫동안 수많은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를 위해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혜정 님이야기의 말미에 질문했다. 


우리 사회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세상은 더 나빠질 거예요.


혜정 님은 '성폭력 상담소에서 일하면 힘들지 않아?'라는 질문을 종종 듣지만, 성폭력적 세상에서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것보다, 연대하고 행동하고 사유하는 게 백번 낫다는 생각 하신다고 한다. 사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기는 힘들다고. 섣부른 기대는 오히려 힘을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세상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간혹 감당할 수 없 문제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문제를 회피하게 된다. 한 동안 n번방 사건 기사를 클릭하지 못했던 이유다. 아주 조금씩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야겠다. 적어도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성범죄자가 세상에서 활개 치며 살아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자 해야 하는 일을 해야겠다. 그 첫 번째는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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