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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본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창작은 결국, 양심의 문제다.

by 김영환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심리 현상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처음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에 똑같은 일을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어! 이거 데자뷔다”라고 외친다.


데자뷔가 생기는 원인은 아직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의 뇌가 현재 상황을 이전의 기억처럼 착각하는 인지적 오류라는 정도가 전부다. 몇 가지 가설이 등장하며 오류의 원인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하고 흥미로운 신경과학적 설명이 나의 눈길을 끈다.

정보 처리 시간차로 인한 기억의 착각. 이 이론은 같은 정보가 아주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두 번 인식되었을 때, 뇌가 그 두 번째 인식을 ‘기억’으로 오해하면서 데자뷔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친구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커피가 든 머그잔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입으로 후후 불고 있다. 시각을 통해 접수된 그 장면은 양쪽 뇌에서 각각 조금 다른 속도로 처리된다. 좌뇌는 0.1초 먼저, 우뇌는 0.1초 느리게. 먼저 도착한 정보는 ‘현재의 경험’으로 처리되고, 뒤늦게 도착한 정보는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Hippocampus)에서 반응한다. 그러면 우리의 뇌는 카페에 앉아 있는 친구의 모습을 ‘이미 경험한 장면’으로 착각한다. 평상시 뇌는 이중처리를 자동으로 통합하여 오류를 방지하지만 피로, 스트레스, 수면 부족 등 감각 과부하 상태에서는 뇌의 정보 처리 능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미세한 차이라도 시점을 오인하게 만들 수 있는데, 이때 데자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데자뷔를 경험한 후 느끼는 기분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불안하고 초조하다. 감각과 시간의 균형이 깨졌다는 느낌 때문이다. 창작 활동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나로선 이런 인지적 오류 즉, 익숙함과 신선함이 충돌할 때면 까닭 없는 죄의식에 빠진다.


글을 쓰고 영상을 제작하다 보면,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운, 꽉 막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책을 소리 내어 읽어보고 문장의 구조와 묘사 방식을 메모장에 적어 본다. 영상 제작도 마찬가지다. 조회수 높고 획기적인 영상을 찾아, 화면 구성과 장면 전환 방식을 캡처해 둔다. 나중에 나의 작업에 접목할 목적으로, 일종의 레퍼런스를 찾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돌파구가 보이고, 이후엔 별 탈 없이 작업을 마무리하곤 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의 결과물을 본 아내의 반응이다. 글이든, 영상이든 내 창작물의 첫 시사와 품평을 맡은 아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나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애써 의도를 설명하지만, 사실 이미 짜증이 나 있다.

순수한 내 창작물이야. 이런 걸 어디서 봤는데? 당신의 뇌가 잘못 판단해서 익숙한 것을 기억으로 착각하는, 인지적 착오를 일으킨 건 아니고? 그래, 데자뷔!,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 그거 데자뷔라고.

이렇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그렇게 했다가는 가정의 근간을 뒤흔드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그래?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겠네. 누굴 따라한 거 같으면 안되잖아!“라는 말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선택한다. 무엇보다 가정의 평화가 우선이니까.


다시 돌아가서, 콘텐츠 제작자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참고한다. 좋은 글이나 잘 만들어진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잘된 콘텐츠의 방향을 따라가고 싶어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참고’와 ‘도용’의 경계가 너무 아슬아슬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른 창작자의 아이디어를 마치 나의 것인 양 사용하고 싶은, 욕망이 수시로 솟구쳐 오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벌겋게 성이 나 있다. 눈 깜짝할 사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도대체 어디에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늘 아래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그런 욕망을 더 자극한다. 그래서 주목받는 용어가 있다. ‘에디톨로지(Editology)‘. 편집을 뜻하는 ‘Edit‘과 학문, 이론을 뜻하는 접미어 ‘olofy’가 합성된 말이다. “기존의 콘텐츠를 어떻게 선택하고 배열하는가?”가 곧 새로운 해석이자 창조 행위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모든 창작은 과거의 작업에 빚지고 있으며, 새로움은 기존의 아이디어 위에서 꽃피운다는 것인데, 결국 중요한 건 창작자의 양심 아니겠는가. 창작자라면 어디까지가 참고이고, 어디서부터가 도용인지 판단하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모든 작업은 그 경계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데자뷔를 떠올렸을 때, 초조하고 불안했던 이유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반응에 민감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데자뷔는 단순한 현상 같아도, 엄연한 인지 오류다. 반복적으로 자주 발생한다면 신경학적인 원인, 특히 뇌전증의 일종인 측두엽 간질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렇듯 익숙함과 신선함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 즉 창작의 윤리를 벗어난 도용이 반복된다면, 그렇게 탄생한 콘텐츠는 물론, 원작품의 진정성에도 심각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이에 따라 파생된 혼란은 결국 콘텐츠 소비자의 문화 향유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인공지능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창작자들의 욕망은 더욱 더 교묘해져 간다. 최소한의 죄의식마저 사라질 위기다. 창작자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정당한 대가와 보호를 받기 위한 합리적인 장치가 절실하다. 그래야만 콘텐츠 수혈이 곧 매일의 양식이 되어버린 이 미디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새롭고도 신선한 영양제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작권의 가치가 드높아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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