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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평 Sep 17. 2022

영화 <조이>와 내가 원하는 창조신화

여성 기업가의 창조신화에 관한 영화, <조이>를 통해 보는 직업정신(?)

기업의 규모나 직원수, 역사와 상관 없이 어느 회사든 그 회사의 창조신화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다니는 직장에도 회장님의 전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아주 적은 돈을 가지고 해외로 건너가 야학을 하며 거듭한 실패 끝에 국내 서열 상위권의 대기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그의 사업 초창기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해외에서 만난 어떤 귀인의 전적인 도움과 거액의 투자로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폭격으로 망했습니다. 또다시 똑같은 귀인에게 돈을 빌려 공장을 운영했으나 또다시 계속되는 전쟁과 폭격에 공장이 쑥대밭이 되었어요. 결국 귀인은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것은 어쩔 수 없고 받아들일테니 당신도 살 길을 찾으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다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후 다른 제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설립했죠. 전쟁은 끝났고, 그의 성실함과 사업수완이 제대로 빛을 발해 사업은 잘 풀렸습니다. 결국 귀인에게 돈을 갚을 수 있었고 집까지 한 채 선물했습니다. 이후 그는 식품을 개발했는데, 온 식품점이 이것을 납품하겠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투자자를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기업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그의 전설의 시작이자 ㅇㅇ그룹 창조신화입니다. 


그로부터 약 40년후,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어떤 여성이 또다른 창조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제니퍼 로렌스가 주연을 맡고 2015년 세상에 공개된 전기 영화 <조이>의 실제 주인공 조이 망가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조이>의 실제 주인공, 조이 망가노와 그녀를CEO로 만들어준 발명품


영화속 조이는 세 아이의 싱글맘이자 전남편, 할머니, 그리고 이혼한 부모님까지 부양하며 가장으로써의 책임과 의무에 힘겹게 허덕이는 본격 A-장녀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에 K-장녀가 있다면 다소 서구화된 버전으로 이혼한 부모님과 이혼한 전남편까지 한 집에 살며 보살피는 A-장녀가 있었어요…)


A-장녀의 모습 ㅠ


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할 정도로 똑똑했으며 어릴 때부터 각종 발명품을 만들어내던 그녀는 밀린 각종 고지서, 육아, 무기력한 엄마 등 온갖 상황과 생활에 치여 그야말로 하루가 48시간이고 몸이 두개라도 모자란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어느날, 본인이 직접 경험한 대걸레 청소의 불편함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어 기적의 대걸레를 발명해내죠.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안쓰러운 마음의 구름이 머리 위를 떠나지 않을 만큼 조이는 실패를 거듭합니다.

아이디어를 실현해서 혁신적인 청소도구는 만들어 놓았으나 상점으로의 입점은 거부당하고, 조이의 대걸레에 투자를 한 알부자 과부이자 아빠의 여자친구가 압박을 해오는데 아빠는 놀라울 정도로 그 아줌마 편만 들어줍니다. 어쩌다가 운좋게 연이 닿아 멋모르고 찾아간 홈쇼핑 채널 사무실에서 열심히 제품 피칭을 해보지만 싸구려 제품이라 조롱과 비웃음만 당합니다. 이에 위축되지 않고 용기를 낸 조이. 결국 계약을 따내지만, 아빠와 여자친구는 더이상 투자를 할 수 없으니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라는 말 뿐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홈쇼핑 채널 사무실. 열심히 제품을 소개하는 조이의 모습. 홈쇼핑 채널 담당자는 배우 브래들리 쿠퍼로, 제니퍼 로렌스와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은 호흡!


결국 집까지 내건 조이가 이제 홈쇼핑에서 대박을 치면 여기서 영화가 끝날텐데, 애석하게도 남성 쇼 호스트가 대걸레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탓에 홈쇼핑 데뷔는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내가 조이였으면 쇼 호스트 멱살 잡았다...)


여기까지만 봐도 K-장녀 저리가라 수준의 A-장녀의 상황이 말도 안되게 처참해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내가 조이였다면 모든걸 놓아버리고 싶을 지경이죠. 하지만 그녀는 홈쇼핑 사무실로 쳐들어가, 본인이 직접 쇼호스트로 방송에 출연하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카메라가 돌자 난생 처음 맞아보는 눈부신 조명에 잠시 얼어붙은 조이. 그러나 멋지게 해냅니다. 판매수가 미친듯이 올라갑니다. 성공입니다.


난생 처음 서보는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은 조이의 모습 ㅠ 아마도 관객은 이때가 가장 조이를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 아니었을지. 쫄지마 조이, 넌 할 수 있어!


자, 이제 여기까지가 그녀의 전설이자 창조신화. 이면 좋으련만... 아직도! 그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품 제조 회사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이복 언니가 멋대로 OK해버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부품 회사를 찾아간 조이는 그곳에서 그녀의 아이디어까지 훔치려 특허를 신청했다는 것을 알게되지만 무력하게 쫒겨나고 말죠. 집으로 돌아온 조이를 기다리는것은 파산 신청서를 들고 기다리는 아빠와 아빠의 여자친구, 그리고 그들의 가시돋힌 비난뿐입니다.


모든것을 내려놓고 파산 신청서에 서명한 조이는 러닝타임 100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분노와 좌절의 감정을 쏟아냅니다. 참아왔던 그녀의 감정과 눈물이 유일하게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에요.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수많은 좌절과 실패가 반복되는 동안 조이가 폭발하는 장면은 여기 딱 한군데 뿐입니다.


조이가 그렇게 자신의 발명품을 포기하나 싶은 그 순간, 그녀는 서류 더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부품 회사의 본사가 있는 텍사스로 향합니다. 밤새 서류를 읽어내다가 사기죄의 증거를 잡은 그녀. 결국 보상금도 얻어내고, 특허도 되찾아옵니다. 홀가분하게 발걸음을 뗀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 가게 입구에 잠시 멈춰서는데, 이 상점 입구 위에서 갑자기 가짜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참 조악한 인공눈이죠.


진짜 눈송이가 아닌 인공눈을 맞는 조이의 모습. 저는 왜이렇게 이 모습이 먹먹하던지..이 장면은 공식 포스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그녀의 회사는 빠르게 성장,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 발명가에의 공감을 잊지 않는 CEO의 면모를 보여주며 창조 신화를 마무리합니다. (전체적으로 고구마 분량에 비해 다소 사이다의 양이 적긴 하지만 용서가 되긴합니다...ㅎ)


조이의 창조신화에서 제게 가장 와닿았던 것은 그녀의 ‘침착함’과 ‘끈기’ 두가지입니다.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넌 할 수 없을거야”라고 그녀를 무시해도, 공공장소에서 잡상인 취급을 당하고 홈쇼핑에서 제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도 조이는 절대 주변 인물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폭풍의 눈, 그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눈빛과 건조한 표정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죠.


자꾸 암을 유발했던 조이의 아빠와 그의 여친...


돈을 빌릴 때도, 제품을 판매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이는 감정이나 어려운 상황에 호소하지 않아요. 냉정하게 제품의 장점만을 설명합니다. 왜 자신이 있는지에 대하여 차분하게 근거를 대며 설득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아빠와 여자친구가 집을 담보로 잡으라는 말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담담합니다. 밖으로 나와서 허공에 대고 총을 몇발 쏘는것으로 대신해버려요.


열븓그흐즈므르


산 너머 산 격으로 상황이 악화되고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비난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숨 한번 쉬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을 생각할 뿐입니다. 


이렇게나 숱한 실패의 산을 넘고 좌절의 바다를 헤엄쳐 온 그녀에게 내리는 인공눈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 고난과 역경을 다 넘어서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주는 그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하얀 물체는 펑펑 내리는 예쁜 함박눈이 아닌, 상점 입구에서 바람과 함께 폴폴 날리는 가짜눈이죠. 이것이 제대로 된 축하이자 해피엔딩인지, 모두가 의심하며 긴장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제는 진짜 눈이 내려오기를


앞서 말한 기업인과 조이의 창조신화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자수성가형. 성실형. 끈기. 그리고 왠만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멘탈. 폭풍의 눈 속에서 유지할 수 있는 침착함. 


그러나 현대 사회는 자수성가가 불가능한 시대 같습니다. 부의 대물림과 부동산 대란, 세습 자본주의와 한탕주의로 성실함의 미덕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성실함은 낡은 것. 끈기는 미련한 것. 요즘 대세이자 직장인 최대의 처세술은 전략적 무능력. 어차피 될놈될, 안될안.


그렇습니다. 아마도 기업인이나 조이의 창조신화류는 아마도 점점 보고 듣기 어려워 지겠죠. 


제가 원하는 창조신화는 거창한것이 아닙니다. 기업인과 조이처럼 황무지에서, 혹은 더 열악한 불구덩이 지옥에서 이를 악물고 독기를 품으며 온갖 역경과 고난을 거쳐온 그런 이야기일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기업인과 조이처럼 성실함과 끈기, 도움을 준 사람에게 다시 도움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 무언가를 너무나 좋아하는 애정, 혹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바램 등이 바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눈 한번 깜빡하면 뭐가 변해 있고, 이게 뭔가 싶어서 또 한번 깜빡하면 또 무언가가 순식간에 빠르게 바뀌어가는 사회입니다. 가치관, 라이프스타일, 어떤 문화나 사회 현상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여 정말 많은것들이 계속 변화하고 있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삶을 대하는 태도에 진정성이 있고, 내가 하는 일을 하찮게 대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다음 창조신화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가치관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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