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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아 Oct 22. 2024

단둘이 집에

할머니랑 손녀랑.

"다녀오세요-!"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와 이모 앞으로 현관문이 닫힌다. 할머니의 감정이 변할까 얼른 안으로 모시고 들어온다. 집 안이 고요하다. 할아버지의 점심 약속과 이모의 자유시간을 위해 두 분이 나가고 할머니와 단둘이 집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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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집에 들어가니 머리에 구르프를 만 할머니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소파에 앉아 계셨다.

눈을 최대한 치켜뜨고 입을 찢어 내가 외친다. "할머니, 저 왔어요-!" 


천천히 얼굴을 돌려 할머니가 나를 바라본다. 나의 얼굴에 도착한 할머니의 시선이 바삐 움직인다.

내 얼굴에서 익숙한 것을 찾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눈을 맞추며 웃는다. 

서서히,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할머니의 입이 벌어지고 눈썹, 입꼬리, 볼살 순으로 위로 향한다. 


아, 이래서 얼굴에 '꽃이 핀다'고 하는구나.


할머니의 손이 내게로 뻗치고 바짝 말린 흰 양말을 신은 발이 땅을 찾아 대롱거린다.

-- "아이고 이게 누구야! 어떻게 왔어."

잠깐 산책 갔던 할머니의 영혼이 이제 얼굴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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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나간 후, 생각했던 것보다 고요한 공기가 무겁다. 할머니는 이미 내게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서너 번 물어보신 상황. 이때를 위해 미리 사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서둘러 꺼낸다.


가사를 기억하진 못해도 무선 마이크를 꼭 쥐고 탭과 관광버스 사이의 춤을 춰가며 할머니는 '돌아가는 삼각지'로 시작해 노래방 한바탕을 뛰었다. 얼마나 흔드셨는지 할머니가 숨을 고르며 소파 위로 몸을 던진다. 웃음을 머금은채로.

-- "이제 잠깐 좀 쉬자. 쉬어야 또 한바탕 놀지."


할머니가 고개를 젖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난 그런 할머니를 바라본다.

힘겹게 내쉬던 숨이 잠잠해져 나도 눈을 감던 찰나 할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 "하나님이시어."

...

-- "모든 것을 아시노니..."

...

닫힌 눈은 그대로 하늘을 응시한 채. 잠결인듯 나지막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또렸하게. 

혹시 뒤따르는 문장이 있을까 숨을 참고 기다린다.


얼마 전 이모의 말이 뇌리에 스친다. 물컵을 떨구셨었나, 작은 실수를 하셨던 날에 할머니가 그 상황을 정리하는 이모를 앞에 두고 멍하니 계셨다가 원통한듯 한 마디 하셨단다. "나, 언제 이렇게 됐지?"


할머니의 머릿속을 잠깐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뒤엉킨 라디오 주파수 같을까, 희미한 꿈 속을 걷는 듯할까?

어떤 빈칸들을 채워야 당신의 혼란이 달래지고 가장 익숙한 위안을 당신께 안겨드릴 수 있을까?


할머니는 정확히 자신과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으시다. 모든 것을 도맡아 무엇이던 해내던 그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따르는 무수한 감정들을 본인이 가장 사무치게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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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이 흐르고, 두 마디를 끝으로 잠잠해진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 누워서 편하게 주무세요."

-- "그래. 너도 자." 

"네, 저도 옆에서 잘게요."

할머니는 소파 위에, 나는 바닥에, 서로 마주보며 각각 팔을 베고 눕는다.


코 위에 모공, 볼 위에 검버섯, 입 주변에 솜털. 팔순이 넘었다고 하기엔 놀라울 만큼 팽팽한 피부. 주름이라고는 웃을 때 두드러지는 광대 옆 팔자주름과 염려할 때 찌푸려지는 미간. 잘 때만큼이라도 마음이 평안해야 될텐데, 그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


할머니가 갑자기 잠에서 깨 몸을 이르킨다.

"더 주무시지, 왜 어디 불편하세요?"

할머니가 자다 깬 아이의 얼굴로 내게 웃음 지으신다.

-- "아니야, 너도 잤어? 안 추워? 이불 좀 가져다 줄까? 우리 편하게 침대 가서 잘까?"


우리는 자리를 안방으로 옮긴다.

할머니가 내게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본인이 바깥쪽에서 주무시겠다며. 

그렇게 우리는 다시 서로를 마주한 채 각각 팔을 베고 침대 위에 눕는다.


아무리 할머니의 영혼의 일부가 잠시, 또는 평소보다 길게, 그리고 멀리 산책을 나가더라도

눈을 맞출 때 저절로 올라가는 두 볼이, 곁에 누웠을 때 느끼는 익숙한 공기가

그 순간의 우리를 서로로 채워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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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이 고요하다. 원래 누가 있었고 누가 돌아와야 하는지, 오늘의 날짜가 무엇이고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게으른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방 안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자고 있다.

번갈아서 잠깐씩 깨어 상대방이 곤히 자는 모습을 확인한 뒤 각자 다시 잠에 든다.


늦은 오후에 할머니와 손녀가 낮잠을 잔다.

편히, 함께.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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