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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Dec 04. 2022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위한 4년

역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1. 16강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이 펼친 태극기에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리그오브레전드(롤) DRX팀의 김혁규(데프트) 선수가 2022년 롤드컵(리그 오브 레전드 2022 월드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패한 뒤 했던 인터뷰를, 기자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라고 제목을 달아 영상을 올리면서부터 주목을 받았던 말이다. 실제로 DRX팀이 언더독으로서 대활약을 펼치며 롤드컵을 우승하면서 이 말은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의 '격언'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우루과이전과 가나전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댓글에 남기면서 포르투갈전을 기대했다.



2. 축구를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토트넘 경기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경기를 보는 나로서는, 이번 월드컵은 꽤 기대를 했다. 일단 아시아최종예선 결과가 좋았던 데다가, 적어도 벤투의 축구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수 선발 방식이 보수적이며 베스트11 엔트리를 잘 바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숱하게 비난을 받아왔지만, 적어도 선수들의 전술 이해도가 높을 것은 분명했다.


실제로 한국 대표팀은 2002년을 제외하고서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줬다. 더 이상 이임생의 피 묻은 붕대로 대표되는 '투지'로 이들의 활약을 이야기할 순 없다. 준비를 충분히 하고 전술을 잘 세우면 세계 어느 나라든 '해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었고, 그것은 실제 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경험칙이기도 했다. 분명 '꺾이지 않는 마음'에는 희망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있다.


그래서 대등했고, 팽팽했고, 세 경기 모두가 재미있었다. 흔히 말하는 수비와 역습 위주의 전술이 아닌 소위 '빌드업'과 '압박(탈압박)'을 무기로 하는 유럽축구 주요 팀들의 전술 흐름을 그대로 가져갔다. 점유율을 높게 가져갔고, 볼은 빠르게 빼앗았다. 다만 앞서 두 경기는 결과로서 증명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야 비로소 벤투는 자신의 전술이 강팀에게도 먹힌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여러모로 2002년의 재림이었다. 2010년 월드컵은 2022년과 똑같이 1승 1패 1무로 올라갔지만 나이지리아전 2:2로 올라갔기 때문에 임팩트면에서 부족했다. 반면 이번 월드컵은 모든 면에서 극적이었다. 후반 추가시간, 부상이 전혀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출전해 연일 부진했던 손흥민 선수의 질주 후 어시스트, 역시 부상으로 노심초사하다가 이날 후반에야 출전한 황희찬 선수의 골은 두 선수의 감격에 저절로 이입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여기에 2010년 월드컵에서 수아레즈의 황당한 핸드볼 반칙(골대로 들어가는 공을 두 손으로 막음. 가나는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승부차기에서 졌다)으로 4강 문턱에서 좌절한 가나가 그때의 일을 '복수'하는듯 마지막까지 재를 뿌린 것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2002 월드컵 4강은 한국 국가대표팀 역사에서 홈팀의 이점+국가적인 관심과 투자가 빚어낸 예외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2022 월드컵 16강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고유의 전술에 맞게 개인의 역량을 끌어올려서, 세계 어느 팀과도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낸 사건이다. 20년이 걸리긴 했지만, 한국 축구는 이제 명확하게 '앞으로 나아갔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3. 일본과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소위 죽음의 조에 속한 일본의 가능성이 더 낮았다. 하지만 일본은 보란듯이 독일과 스페인이라는 두 우승 후보를 이겼다. 두 경기 모두 선제골을 먹혔지만 후반에 선수 교체와 강한 압박을 통해 순식간에 두 골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변칙적 운영 역시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의 4년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그는 지난 월드컵때는 코치로 있었고, 2018년도 7월부터 일본 팀을 이끌었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의 E조와 한국의 H조에선 모두 2018년 혹은 그 이전부터 팀을 이끌어왔던 팀이 16강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독일은 한지 플리크(2021년 부임)라는 명장이 있음에도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쳤다. 우루과이는 2021년 남미지역 예선 중에, 가나는 2021년 네이션스컵 중에 감독을 교체했다. 자주 모일 수 없는 국가대표팀의 특성상 한 감독 아래서 오래 호흡을 맞추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벨기에의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감독같은(지난 월드컵은 4강이지만) 예외도 있다.


모리야스 감독과 비슷하게 벤투 감독도 월드컵이 끝난 2018년 8월부터 쭉 한국 대표팀을 맡아서 결국 역대 최장기 국가대표 감독이 됐는데, 9명의 외국 국적 감독 중 그는 유일하게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자국 국적의 감독이 선수단 장악에 이점을 갖고 있고, 그것이 결과로서도 반영된 상황에서, 예외를 만든 벤투 감독은 뚝심과 일관성으로 선수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황인범·정우영 선수의 기용은 오랜 시간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황인범 선수는 어느새부터인가 대표팀에선 ‘축신' 모드이고, (큰) 정우영 선수는 카타르 리그에서 뛰는 것이 이점이 됐는지 이번 월드컵에서 궂은 역할을 도맡아하며 훨훨 날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과 일본은 4년간 준비한 '원 팀'으로서의 조직력을 보여주며, 더 이상 이들이 '축구 변방'이 아님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됐다. 2018년에도 일본은 16강에 진출했지만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볼을 돌리면서 큰 비판을 받는 등 과정 자체가 매끄럽지 못했다. 2022년, 한/일 월드컵 20년 만에 두 팀이 세계 정상급 팀에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확실히 고무적이다.


두 국가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탄탄한 것도 자국리그와 선수들의 수준을 올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우리는 스포츠라는 것이 단순히 '돈'만으로는 안 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지 않나. 결국 2002 월드컵 전후로 만든 인프라와 선수 육성에 관한 지원이 쭉 이어져왔고, 이에 더해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가 커진것이 어우러진 것이 지금의 결과를 만드는 데 큰 발판이 됐다고 본다. 한/일 모두 2002년 당시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으로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2002 키즈'들이 있었고, 그들이 이제 '세계의 벽'을 깨부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린 셈이다.


4.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수준 높은 리그로 꼽힌다. 동시에 가장 변수가 많고 순위 변동이 심한 리그이기도 하다. 강팀이 약팀에게 지는 일도 비교적 흔하게 일어난다. '절대 강자'가 없다. 그만큼 현대 축구는 더 이상 '판타지 스타'라고 불렸던 압도적인 개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스쿼드의 완성도나 경기 당일 전술의 운용에 따라서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3승팀'이 없었다는 것은, 월드컵에 나올 수준의 팀에서는 절대강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닥공', '텐백'과 같은 극단적인 축구는 자취를 감췄다. 피파랭킹 1위인 브라질의 축구는 더 이상 '삼바축구'로 대표되는 화려한 드리블과 공격축구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원과 수비가 더 탄탄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상당수의 축구 팀은 모두가 최전방에서부터 압박하면서 라인을 올리며 수비하고, 수비에서 공격으로의 빠른 전환, 공격시에는 공과 공간의 점유를 늘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운용은 팀의 퀄리티가, 단순히 개별 선수의 능력을 합친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강팀이 개인의 역량을 믿고 비교적 보수적으로 전술 운용을 할때, 약팀으로서는 맞춤 전술을 들고 나와 순식간에 일본처럼 몰아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축구는 어느 순간 골을 넣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5. 엔트리에 포함된 26명, 그리고 국가대표팀을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 나아가 코치진과 스태프까지 함께 했던 '꺾이지 않는 마음'은 결코 혼자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오고, 뜻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 미약하게나마 어떤 확신을 갖고 절망을 극복해낼 때 우리는 꺾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부숴지지 않고, 위기가 오면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그런 마음은 처절하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어제 이기지 못했더라도, 아니면 16강에 가지 못했더라도 이제 많은 사람들이 '한국 축구는 달라졌다'라고 선언했을 것이다. 16강에 못 갔더라도, 이 정도의 국가대표팀 경기력은 내가 기억하는 94년 월드컵 이후엔 처음이었다. 4년 후에는 더욱 더 단단한 마음으로, 절망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또 다시 도전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들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기어코. 겹겹이 쌓인 사람과 시간이 만든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꽤나 큰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축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도 불가능이 가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잠시나마 희망을 가져보게 된다. 눈물과 좌절이 뒤섞였음에도 오랜 시간 한 줄기 빛을 찾아 달렸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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