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댓글 3 공유 2 브런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기획 공방
By 나란 브런치 작가 . Mar 13. 2017

아주 주관적인 웹기획 경험기

회사로부터 사진 필터 앱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파워포인트를 켰다. 을 이용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음... 앱 처음 켰을 때 시작하는 화면은 이렇게, 내 휴대폰에 있는 사진 고르는 화면은 저렇게, 고른 사진 꾸미는 화면? 필터랑 폰트랑 스티커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이제 다 꾸몄을 테니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공유할 수 있게 버튼을 뿅뿅뿅... (말로 그리니까 참 쉽다.)"

이틀이 지났다. 아이폰 개발자에게 내가 '기린 그림'을 넘기고 1차 개발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표가 나를 불렀다.


나에게 집요함이 부족하다고. 사용자 경험(전문용어로 User Experience, 앱을 다운로드하여 사용하는데 "뭐 어쩌라는 거야", "이 버튼은 뭐야" 등등의 말이 나오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앱을 쓸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을 좀 더 파야할 것 같다고 했다.


즉시 동의했다(내 전공분야가 아닐 때, 자신 없을 때에는 빠른 동의가 상책이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나의 집요하지 못했던 지난 며칠을 탓하며 벌컥벌컥 마시고는(무엇을? 마음으로는 맥주 현실은 물). "그래, 남은 시간 뭔지 모르겠을 뭔가를 일단 파보자. 뭐든 집중해보자" 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회사를 나왔다. 저녁밥 타임을 지나 운동 갈 시간도 지나 택시 타야 하는 시각에 다다라서 결국 패딩을 챙겨 입고 회사를 나왔는데,

"엄마야, 왜 이렇게 춥지?"

꽃샘추위였다. 꽃을 시기하는 칼바람(꽃샘추위는 꽃이 피는 걸 시샘하는 추위다. 중국에서는 봄추위라는 뜻의 '춘한', 일본에서는 꽃 추위라는 '하나비에'라고 부른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주 직관적으로 부른다. '꽃 질투 추위') 좀 맞았더니 회사에서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생각 안나 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필터' 내 집요의 대상은 바로 필터였다. 때로는 차갑고 도도한 쿨톤으로, 또 언젠가는 따뜻하고 정감 가는 웜톤 인간으로 보일 수 있도록 제 몫을 톡톡히 하는 녀석.

비 오는 날도 쨍쨍한 듯이, 지금 막 찍은 사진인데도 추억 속 기념사진처럼 흑백으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녀석 '필터'를 나는 왜 간과하고 있었을까. 심지어 최초 명령이 '사진 필터 앱' 만들기였는데. 왜?


커리어가 있기 때문이다. 신입이 아닌 이상 어느 분야에서 몇 년간 일을 하면 익숙해지는 단어(전문용어)가 생긴다. 그 단어 하면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나는 커리어 상 필터 하면 사진 필터보다 엑셀 필터가 먼저 떠오르도록 뇌가 설계되어 있었다. 더욱이 사진 필터와 엑셀 필터는 역할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사진 필터는 눈에 콩깍지 씌워주는 거라면 엑셀 필터는 씌워진 콩깍지를 벗겨주는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 수 백, 수 천 줄의 뒤죽박죽 숫자도 필터로 정렬해버리면 숨 쉬기도 전에 오름차순 또는 내림차순으로 정렬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프로그램!


그러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 맞지 않는 일을 맡았을 때 사람 뇌는 당황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소 하던 일이라면 당연히 고려하고 준비했을 기본적인 것들(예를 들자면 일의 우선순위 정하기, 진행상황 공유하기 등등)도 생각이 안 난다. 누군가 한 마디 해주면 그땐 풀 죽어 있다가 잠들기 전, 다음 날 출근길에 번뜩! 떠오른다(옆에서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면 풀은 안 죽지만 결과물이나 성과가 다이...).


그제야 시작인 것이다. 번뜩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생각에 집중하면 된다. 주요 해결과제가 결정된 셈이니 절로 집중할 수밖에.


맞지 않는 일을 맡았다면

1. 옆 사람에게 쓴소리 해달라고 해서 정신 차리기! 2.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일하는 방법을 배우기! 3. 무엇보다 빨리 그 일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잘 하는 것 잘하기!


끝.


기능이 전혀 다른데 왜 둘 다 '필터'라고 하지? 궁금증이 생겨 검색창에 '필터'를 입력했다. 몇 개나 있을까. 답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필터를 설명하는 사전이 10개나 있었다. 화학 사전, 토목 용어사전, 영화 사전, 와인&커피 용어해설, 쇼핑 용어사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필터를 정의하고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의미가 비슷한 경우도 있었다. '필터' 좋은 단어다. 생각해 볼 여지가 넘쳐흐르는.

keyword
magazine 기획 공방
쿼티자판 '탁탁' 글맛나는 소리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