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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Mar 20. 2022

청산가리 요구르트라니...

<<그 사건 뒤에 무엇이 있나- 27>>

1991년 9월 4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슈퍼마켓에서 36살 여주인은 냉장고에 진열한 요구르트 중 하나를 무심코 꺼내 마셨다.


입안에 요구르트가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역겨운 냄새와 함께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고 급히 뱉어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놀랍게도 입안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날벼락같은 일을 당한 그녀는 경찰에 신고했고 확인 결과, 그녀가 마신 요구르트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물질, 청산가리(청산염)가 들어 있었다.


팔기 위해 진열해 놓은 요구르트에 치명적 독극물인 청산가리가 들어있다니... 설마 제조 과정에서 들어갔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누군가가 넣었다는 얘기인데,,


가게 여주인을 노린 범죄인가? 아니면 불특정 다수를 노린 묻지마 범죄인가? 아니면 요구르트 회사를 협박하기 위한 것인가?


그런데 그로부터 엿새 뒤인 9월 10일,


이번엔 서울 강남에서 한 아이가 가게에서 요구르트를 사 마신 뒤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 요구르트 역시 같은 회사 제품이었고, 역시 청산가리가 검출됐다.


다시 나흘 뒤인 9월 14일, 이번에는 서울 강동구였다.


한 아이가 동네 가게에서 사 온 요구르트를 마시고는 복통을 일으키며 병원으로 긴급히 이송됐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같은 회사 제품이며 청산가리가 검출됐다.


의심할 바 없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였고, 특정한 피해자를 노린 게 아닌, 불특정 다수를 노린 협박 범죄일 가능성이 높았다.


잇따른 청산가리 요구르트 사건 보도  <KBS 뉴스>



자연히 수사는 요구르트 회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피해 회사로부터는 단서가 될 만한 어떠한 설명도 없었고, 회사 역시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아무 이유 없이 먹을 것에 독을 넣는 끔찍한 짓을 어떤 미치광이가 저지르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인가? 당시에는 CCTV가 거의 설치돼 있지 않아 이 미치광이를 추적할 시작점을 찾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9월 16일 반전이 일어난다.


침묵하던 회사가 그동안 있었던 비밀을 뒤늦게 경찰에 털어놓은 것이다.


회사의 설명은 이렇다.


한 달 전인 8월 10일 한통의 협박 편지가 회사로 도착했다.


거기에는 미스터리 소설에서나 읽었을 법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당신 회사의 요구르트에 독극물을 넣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 금액은 2 5천만 원이다. 우리와 협상할 생각이 있으면 ‘서초동 익명의 독자이름으로 한국일보에 이웃돕기 성금 165만원을 기탁하라. 기탁자 명단을 확인하게 되면 당신들이 우리와 협상할 의지가 있다고 보고 연락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 회사 제품에 독극물을 투입하겠다


회사는 밑도 끝도 없는 협박에 당황했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자칫 이런 협박 사실이 소문이 나면 회사에 엄청난 타격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자체적으로 시판하고 있는 제품을 비밀리에 점검하는 대응을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 독극물 요구르트 피해자가 속출했고, 소비자들이 마시기 전에 회사가 수거한 것도 여러 개 있었다. 회사의 자체적 대응으로는 애당초 대처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피해자가 잇따르고 난 다음에야 협박 사실을 알렸고, 경찰은 일단 범인의 요구대로 해당 신문에 서초동 익명의 독자 이름으로 165만원을 기탁하도록 했다.


범인이 믿고 다가오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과연, 며칠 뒤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이사가 응대하면서 범인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태도를 취한 건 물론이다.


범인은 비교적 젊은 남자였고, 목소리는 충청도 말투였다.


반응이 없어 계속 독극물을 넣으려 했는데, 이렇게 나오니 독극물 투입은 멈추겠다고 하면서 돈의 전달 방법을 설명했다.


대전 톨게이트 부근 길다방이라는 곳으로 돈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회사 대표는 상무와 운전기사가 승용차를 타고 돈을 가지고 가겠다고 답했다.


경찰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현장 수사 책임자가 직접 운전기사로 가장해 차량을 몰았고 회사 상무는 돈을 넣은 가방을 들고 옆자리에 탔다. 그리고 승용차 트렁크에는 베테랑 경찰 한 명이 몸을 숨겼다.  


현장인 길다방에는 남녀 경찰관이 연인으로 위장해 미리 자리를 잡았고, 다방 주변에도 사복 경찰들이 곳곳에 포진했다.


범인의 등장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차량이 현장에 도착할 즈음 범인은 다시 회사에 연락한다.


협박범이 의례 그렇듯 장소를 바꾸기 시작한 것,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다방으로 오라, 다시 어느 여관으로 오라... 계속해서 장소를 바꾸더니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의심과 긴장으로 상대의 반응을 지켜본 범인은 다음날 다시 회사에 연락을 했다.


이번에는 전달 방법을 바꿨다. 계좌번호를 알려줄 테니 이튿날인 10월 2일 정오까지 입금하라고 요구한 것.


그러나 이 방법 역시 범인이 진짜 원한 건 아니었다. 다음날 오전 다시 연락해와 방법을 또 바꾼다.


오늘 오후 5시까지 맨 처음 약속 장소였던 길다방으로 돈을 가져오라고 다시 요구한 것이다.


경찰은 끈질기게 요구의 변화를 따르도록 하면서, 10여 차례에 달하는 통화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몇 가지 점을 추출해냈다.


먼저 범인은 대전 일대에서 계속 약속 장소를 정하고 있다는 점, 전화를 걸었을 때 주변 소음으로 추정컨대 공중전화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약속 장소로 정했던 여관을 탐문한 결과 두 명의 남자로 의심된다는 것 등이다.


'대전 일대에서 두 명의 남자가 공중전화를 이용해 협박을 하고 있다...'


경찰은 승부수를 던졌다.


대전시내 주요 전화박스 주변에 구역별로 형사대를 일제히 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대전 동부 버스터미널에서 전화를 걸던 30대 남자 두 명을 발견하고 검문했을 때 결정적 증거를 확보한다.


입금하라고 요구했던 계좌의 통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32살 한 모 씨와 33살 황모씨 두 사람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요구르트 협박범 검거 <MBC뉴스 화면>


이들은 청산가리를 입수해 농약에 희석시킨 다음 1회용 주사기로 요구르트에 넣었다고 진술했다. 농약의 역한 냄새로 먹지는 않도록 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각종 빚에 시달리던 주범 한씨가 지인 황씨를 끌어들였고, 특히 한씨는 추리소설을 탐독하고 일기를 꾸준히 써와 협박 편지 작성을 익숙하게 느낀 것 같다고 경찰은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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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나 지난 꽤 먼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한때 우리나라는 독극물 협박 범죄가 자주 벌어졌다.


가게를 돌아다니며 독극물을 주입하는 범죄는 지금으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유형의 범죄다. 조그만 가게에도 CCTV가 설치돼 있는 환경도 크게 달라진 조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런 협박이 은밀히 통하는 걸 용서하지 않는 소비자들과 사회의 인식 변화에 있다.


당시에도 회사의 늑장 신고를 문제시했지만 아쉽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독극물을 넣겠다는 협박을 받았을 때 즉각 알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면서 신고를 하지 않는 회사의 대응을, 지금은 과연 용인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이 잇따라 나오고 난 다음에 경찰에 협박 사실을 신고하는 그 강심장은, 또 그런 회사의 입장을 양해하는 이해심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지금이라면 그런 행위 자체로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속출하는데도 한동안 협박 사실 자체를 밝히지 않고 모른 척하고 있었던 과거의 우리 기업들을 생각해보면, 소비자의 권리란 특별한 뭔가를 더 얻는 게 아니라 나의 안전을 위해 알아야 할 정보를 당연히 아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소비자의 권리 역시 다른 사회적 권리와 마찬가지로 오랜 비상식의 터널을 힘겹게 헤치고 나온 가치임을 새삼 느끼게 만드는, 30년 전 난폭한 협박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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