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에 읽고 정리했던 생각인데 오래 묵혀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끄집어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하게 만든 사람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인물이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 교수가 되었고, 자신의 스승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샌델 교수의 하버드 수업은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힐 정도로 질문을 통해 학생들끼리 논쟁을 이어가도록 하되, 정답이 아닌 해답을 스스로 고민하게끔 해준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성공에 이르는 데 있어 불공정한 장애물 제거했을 경우, 나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얻은 사회적 지위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샌델 교수는 이에 대해 우리가 옳다고 믿어왔던 능력주의의 공정함은 허상에 가깝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공선(common good)을 실현하기 위한 겸손한 미덕과 실천적 지혜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이 책의 원제(The Tyranny of Merit :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를 직역하면 “능력의 폭정 : 공동선은 어떻게 됐나?”이다. 원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샌델은 능력주의가 만들어낸 폭정(暴政, 포악한 정치)을 밝히고 이것이 공동선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 공평한 기회가 보장된 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노력하기만 하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서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착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2019년 미국의 입시 비리 사건으로 샌델 교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입시 컨설팅 업체 대표 윌리엄 릭 싱어(William Rick Singer)가 거액의 돈을 받고 유명인사들의 자녀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입시 시험(SAT) 감독관을 매수해 점수를 조작하거나, 운동부 감독에게 뇌물을 지급해 해당 운동을 해본 적도 없는 학생들이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도록 해준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간간이 발생하는 각종 학위논란, 성적 조작, 논문 표적, 시험문제 유출 등의 비리에 전 국민이 광분하듯,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공분의 기저에는 바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샌델은 과연 우리가 공정하다고 믿는 능력주의가 과연 옳은 것인가? 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샌델이 제시하고 있는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경제적 불평등과 심리적 굴욕감을 준다는 것이다. 즉, 내가 가진 권력과 사회적 지위는 오로지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굳게 믿게 되면 오만해진다. 그러면서 패자나 사회적 약자들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이 겪는 경제적 불평등은 당연하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미국의 대형 입시 비리 사건에서도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입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숨겼다. 아이들은 당연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명문대에 입학했다고 굳게 믿게 되었고 능력주의의 신봉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입시 부정을 저지를 만큼의 큰돈을 가진 부모의 개입은 그렇지 못한 학생들과 비교해 보면 과연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었고 공정한 경쟁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된 기회의 평등을 달성한 사회라 해도 반드시 정의로운 사회는 아니다. 재능의 차이는 계층의 차이만큼이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적 요소이다.’
샌델 교수는 언제나 그랬듯 명확한 결론과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공공선을 위한 공동체의 노력과 연대를 강조하며 겸손함의 미덕과 실천적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회의 평등보다 경쟁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는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공정하다는 착각>은 이전에 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비해 다소 난해했고,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공감이 가면서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내용도 많았다. 수능이라는 괴물 같은 입시제도와 학벌주의로 학생들을 평가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학교 성적이 좋지 않으면, 우리는 그 학생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또는 그 학생의 성실성을 문제 삼는다.
2015년 EBS에서 방영한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5부작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나로서는 샌델이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허상이 그다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상위 1% 정도가 한국의 명문대에 입학하는 현실과 학벌=성공이라는 공식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머지 99%는 공부 못하는 아이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학부모라면 꼭 시청해 보시기를 추천해 드린다. 2019년에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제 내가 몸담고 있는 軍으로 시선을 잠시 돌려보자. 나는 곧 전역을 앞두고 있지만, 미숙했던 나를 단단하게 성장시켜 준 조직이라 아직까지는 그 인연을 모질게 단절하기가 쉽지 않다. 언제나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인 진급을 샌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출신, 학연, 지연, 혈연, 근무연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능력에 따라 진급심사를 한다고 해서 과연 진급의 결과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가진 능력은 다를 텐데 과연 나의 능력을 누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지? 과연 우리 주위에는 능력주의를 무의식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이러한 자기 성찰적 질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진급결과를 맹신하다 보면 엄청난 착각에 빠질 위험이 크다. 마치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내가 적임자라서 진급이 되었다는 엄청난 착각 말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착각을 인지조차 못하는 지휘관들이다. 여기에 경로 의존성과 확증편향의 오류가 첨가되면 분명 군은 큰 재앙이 닥쳐올 것이다. 샌델의 관점에서 한 번 진지한 철학적 고민을 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