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의 고민을 차곡차곡 담아 보내주며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로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인가. 누군가에게는 자아실현의 통로일 것이요,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 사랑하는 이들과 윤택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일 것이요, 누군가에게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요, 누군가에게는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고 싶은 무언가일 것이다.
진로 고민은 평생 하는 것이라 했던가. 문득 궁금해 '진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앞으로 나아갈 길' 이란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것은 살아지는 대로 살지 않기 위한 노력이고, 내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쓰기 위함이다.
어떤 이는 고민 없이 사는 삶이 더 좋은 삶이라 생각할까? 내가 아는 한 인생은 나를 탐구하고, 내가 가치로이 여기는 것들을 찾고, 그것을 향해 가까워지도록 걸어가는 여정이다. 빠를 필요는 없지만 방향은 중요하고, 우리가 청춘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그렇기에 좀 마음 가벼이 먹어볼래도 무거운 고민이고, 무거워야 마땅하다.
마케터로 일한 지 4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스타트업에서 사람들과 부대껴가며 서비스를 키워가는 게 마냥 즐거웠던 시간이 2년, 마케팅이란 뭘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간이 1년, 그리고 이 분야를 내가 선택한 무언가로 받아들이고, 그 선택을 후회 없는 선택으로 만들어보고자 몰두했던 시간이 1년 정도인 것 같다.
마케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마케팅은 만들어진 물건을/서비스를 어떻게든 팔아내는 역할인가? 한때 이 포지션이 '본질'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깊이 고민했었다. 여러 날밤을 고민하다 다다른 결론은, 마케팅의 본질은 결국 다른 모든 업무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시장의 니즈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만이 문제 해결이 아니다. 좋은 제품, 서비스가 있을 때 이것을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 마케팅은 연속적인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이 과정을 잘 해내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모든 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1) 문제를 정의하는 직관 - 왜 이 제품이 고객에게 가닿지 못하고 있는가? 어디를 뚫어주어야 하는가?
2)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적 사고와 실행력 - 어떤 채널(광고, 오프라인 매장부터 입소문까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어떤 빈도와 강도로 전달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주저 없이 실행에 옮기는 것.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지는 좋은 일터의 조건이고, 그 태도를 주체적으로 견지하고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필요한 마케터의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터가 다른 일과 구분되게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건 다수의 사람과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포지션이라는 점.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대표님이 했던 말씀이 있다.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은 마케팅과 안 맞지는 않는 것 같아." 그 말에 지금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케터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야 한다. 일면 타고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민감도와 감수성, 그리고 애정은 마케터에게 꽤나 중요한 덕목이다.
필자는 사람을 꽤나 좋아한다. 사람의 영역에는, 소위 '내 사람'이 아닌 사람도 포함된다. 길 가는 사람,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저 표정은 뭘 의미할까. 큰 노력 없이 사고가 사람을 향해 흐른다. (그래서 꽤나 자주 피곤하다.) TCI 기질검사-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이 아닌 타고난 기질을 테스트하는 검사-를 했을 때, 사회적 민감성이 90 가까운 수치를 보이는 것에서 이런 필자의 성향이 타고난 것임을 알았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좋은 마케터란 무엇일까
좋은 마케터란 뭘까. 당연히 사람한테 관심이 많다고 해서 좋은 마케터가 되는 건 아닐 테고. 누군가는 손대는 물건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미다스의 손을 '천재 마케터'라고 부를 것 같다. 굉장히 부러운 바이지만(진심이다), '좋은 마케터'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마케터는 '인간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데려가는 마케터'이다. 인간에게 최전선에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직무라는 점에서 마케팅이라는 일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카피 한 줄이, 누군가를 웃게 할 수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내가 써보라고 설득하는 물건이 누군가의 삶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들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삶을 혼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케팅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어느 날, 필자는 마케터로서 '나만의 기준'을 만들었다. 1. 자신 있게 팔 수 있는 물건과 회사를 팔겠다, 2. 건강한 방식으로 팔겠다. 모호하다고? 맞다. 모호하다. 이 모호함을 견지하고 계속해서 잊지 않고 고민하겠다는 다짐이 함께 담겨있다.
좋은 마케터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 있게 팔 수 있는 좋은 물건과 회사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와 인간의 변화를 알아보는 나만의 눈이 필요하다. 현대인의 삶은 오늘날 어떤 모습인가, 이 모습은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언가가, 장기적으로는 그들의 삶을 해치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이 순간은 '감동'인가 '자극'인가. 끊임없이 관심 갖고,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에 절대 해답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있어서도 안 되겠지, 세상은 단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가치들을 정의하고, 그 기준을 설명할 수 있는 것,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꽤나 견고하게 받쳐주는 기반이 된다.
바쁘지만 주말엔 시간을 내어 책을 읽자.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을 갖자. 관심이 가는 사회적인 주제가 있으면 찾아보고, 더 나아가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가볍게 행동으로 옮겨보자. 다수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평소에도 좋은 언어와 마인드를 내재화하자. 꾸준히 명상하고, 착한 말을 건네자. 그를 위해 일상에 항상 10%의 여유를 남겨두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는 필자의 노력들이다.
5년 차 마케터,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차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차가 되었다. 여전히 마케팅은 어렵고, 답이 없고, 좋은 사람과 사회를 보는 기준은 매일 흔들리고, 사람과 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좋은 연인을 만났는지 알고 싶다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보라고 했던가. 마케팅을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고민의 산을 넘어오면서 지금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내 모습이, 유려하지 않을지언정 싫지 않다. 혼자 일하기보다는 같이 일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의견을 딱딱하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고, 유연하게 의사 결정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고, 전보다는 스트레스 관리가 쉬워졌다. 마케팅을 기깔나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이 있고, 그래서 정말 다행이고, 조금은 눈물이 난다. 어차피 답은 계속 없을 거고, 고민은 계속 치열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치열한 가운데에서도 마음의 평온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게 생각나서.
앞으로의 갈팡질팡도 응원한다. 앞으로의 5년도 화이팅. 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