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다짓다
1부. 6장. 내가 깊은 불안을 느낄 때
유경은 두 번째 만남이 있었던 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늘 그랬듯 자고 일어나 새벽에 글을 쓰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봇물 터지듯 내면에 갇혀있던 그 무언가가 터져 나올 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저 아래에 눌려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남편에게 조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말하고 남편이 조용히 코 고는 소리를 확인한 뒤 거실에 홀로 앉아 스탠드를 켜놓고 새벽이 넘도록 글을 썼다. 회한이 가득 차 있는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음은 유경이 새벽에 써 내려간 글이다.
선택 앞에서
아무런 일정도 없는 휴일. 여느 날과 같이 맞춰 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늦장을 부려도 될 법한데, 굳이 몸을 일으키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청소년 시절에도,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새벽 일찍 일어나는 일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면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마음에서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부지런하다 했다. 나 또한 그런 성실함을 내가 가진 장점이라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열심히 달려오긴 했지만,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는 모른 채 살아온 것이다.
결혼 후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8년의 시간을 ‘엄마’라는 역할에 기대어 살았다. 그러다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논문까지 쓰겠다고 욕심을 부렸다. 논문을 쓰던 당시 내 아침 기상 시간은 새벽 4시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어 강의 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일본어 강의 자리를 구해 저녁 강의를 시작했다. 부랴부랴 아이들 저녁을 차려주고 학원 시간에 맞춰 달려가기 바빴다. 수업을 마치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창에 기대어 캄캄한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면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오곤 했다. 이후 2년 동안 독서지도사로 방문 수업을 하면서도 보람이 없진 않았지만, 나 자신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왜 멈추지 못했을까?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하고 있지 않으면 ‘나’로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나 자신을 향해 보이지 않는 채찍을 들었다. 더 열심히 하라고, 실수하지 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내 몸을 혹사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내 몸과 마음의 한계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살펴주지 않았다. ‘잘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라는 이유의 이면에는 ‘무가치한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불안이 숨어 있었다. 물론 그 ‘가치’라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매겨지는 값이었다. 내가 칭찬해 주지 않는 나는, 항상 칭찬에 목이 말랐다. 부어도 부어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 같았다.
타인의 평가와 비교의식에 갇혀 사는 인생은 불안의 연속이다. 자유가 들어갈 틈이 없다. 나에게 정당하게 허용된 자유 시간마저도 불안의 요소가 되고 만다. 시간을 가치 있게 써야 한다는 명목 아래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나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나를 용납하기가 어렵다. 여유롭게 보내야 할 공백이 오히려 강박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무엇이라도’ 해내고 나면 잠시 뿌듯함을 느끼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을 때는 그런 나를 질책하고 원망한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 안에 내가 없었다. 열심히 살고는 있었지만, 나답게 살아가는 나는 없었다. 뚜렷한 방향과 목적 없이 무작정 달려오기만 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까, 남들도 하니까’라는 이유에 떠밀려 나를 몰아세우기 급급했다. 나 자신에게 인정받고 보호받지 못한 나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나의 불안은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사랑하기로 했다. 타인의 기대, 결과의 좋고 나쁨이 나를 말해 줄 수 없다. 결코 그것은 내가 될 수 없다. 나는 지금 인생이라는 여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잠시 쉼표에 머물러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어느 것도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으니까.
자다 말고 동수는 카톡 소리에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글쓰다짓다 단톡방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유경이었다. 장문의 글이라 너무 졸린 나머지 동수는 글을 읽진 못하고 아침까지 잠을 이어갔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고 급한 일을 마무리한 후 글을 확인했다. 유경이 느껴졌다. 유경의 과거가 고스란히 와닿았고, 현재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읽자마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나를 찾는 여행의 한가운데 서 있는 유경이를 응원해. 쉽고 빠른 길이 아닌 어렵고 느린 길을 뒤늦게나마 선택하고 꿋꿋이 행동에 옮긴 유경이를 응원해. 읽기와 쓰기가 그 길을 비추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 유경이를 바르게 인도하리라 믿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글쓰기 요건은 진정성인데, 이런 면에서 정말 잘 썼어. 수정할 게 거의 없을 만큼 말이야. 다만 문학적 감수성이란 양념이 조금 추가된다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나도 글쓰기 선생은 아니지만, 유경이의 의도가 상실되지 않도록, 그러나 조금은 더 맛깔나도록 글을 수정해 봤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고 나만의 문체 영향을 받겠기에 참고만 하면 돼. 새벽까지 잠이 안 왔던 모양이구나. 절박한 심정이 느껴졌어. 나도 7년 전 글쓰기를 진지하게 시작할 때 정말 절박했거든. 꼭 이 글쓰다짓다가 너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면 좋겠다.
동수는 유경의 글을 조금 수정하여 아래와 같이 포스팅했다.
선택 앞에서 - 수정본
아무런 일정도 없는 휴일, 여느 날과 같이 맞춰 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늦장을 부려도 될 법한데, 굳이 몸을 일으키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청소년 시절부터 새벽 일찍 일어나는 일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면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마음에서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부지런하다 했다. 나 또한 그런 성실함을 장점으로 여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열심히 살았을 뿐 쉬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결혼 후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8년의 시간을 ‘엄마’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러다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논문까지 쓰겠다고 욕심을 부렸다. 논문을 쓰던 당시 기상 시간은 새벽 4시였다. 코로나 19 여파로 한국어 강의 자리가 여의치 않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일본어 강의 자리를 구해 저녁을 보냈다. 부랴부랴 아이들 저녁을 차려주고 학원 시간에 맞춰 달려갔다. 수업을 마치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창에 기대어 캄캄한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면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오곤 했다. 이후 2년 동안 독서지도사로 방문 수업을 하면서도 보람이 없진 않았지만, 나 자신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왜 멈추지 못했을까?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나’로서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매번 나 자신을 향해 보이지 않는 채찍을 들었다. 더 열심히 하라고, 실수하지 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몸을 혹사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내 몸과 마음은 점점 한계에 다다랐지만 나는 애써 모른척했다. 나를 보살피는 행위는 곧 나약해지는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라는 이유의 이면에는 '무가치한 내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불안 가득한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 ‘가치’는 오로지 타인이 매긴 값이었다.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남에게 종종 칭찬을 들어도 나는 항상 칭찬에 목이 말랐다. 내가 칭찬해주지 않는 나는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 같았다.
타인의 평가와 비교의식에 갇혀 사는 인생은 불안의 연속이다. 쉼은 없고 채찍만이 다스리는 삶이다. 쉼의 공백이 일의 강박으로 여겨지는 삶 속에서 휴식은 죄악과도 같았다. 나는 계속 움직여야 했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불안했던 것이다.
'뭐가 잘못된 걸까?'
열심히 사는 삶만 존재했을 뿐 그 삶을 살아내는 주체가 없었다. 나는 고삐를 잡은 마부가 아니라 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고 싶어서'가 마부의 이유라면, '해야 하니까, 남들도 하니까'는 말의 이유였다. 부인하진 않겠다. 그건 그 당시 나의 선택이었다. 비교의식과 열등감에 점철된 나는 깊은 불안에 싸인 나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말이 아닌 마부가 되어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기로.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원하는 일에 좀 더 집중하기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사랑하기로. 내 삶을 온전히 끌어안기로. 나는 지금 인생이라는 여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잠시 쉼표에 머물러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다.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더 이상 예전처럼 타인의 시선에 의지하는 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어렵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겠다. 나를 너머 타인을 향하는 진정한 사랑의 바른 시작이리라.
유경은 새벽까지 글로 많은 것들을 쏟아내느라 피곤한 나머지 오전에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직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뒤 오후에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 점심 직전에 동수가 답글을 남긴 걸 확인하긴 했지만, 읽을 정신적, 물리적 여유가 없어 집에 가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소스라치며 눈을 뜨니 한 시간 반 정도 지나 있었다. 이상하게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동수가 남긴 글을 읽었다. 유경은 미국에서 십 년이 넘게 살다 온 동수가 자신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한 위로가 되었다. 동수가 미국에서 힘든 시절을 겪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 기간 동안 동수에게 어떤 내밀한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유경은 짐작했지만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동수가 수정한 글에서 사용한 말과 마부의 비유는 유경이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표현이었다. 너무나 적절했던 그 비유가 동수가 말한 문학적 감수성인 것 같았다. 유경은 그런 감수성에 대한 동경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생겨남을 느꼈다. 저번 글에서 효영이 보여줬던 묘사의 힘, 그리고 동수가 지적한 문학적 감수성, 이 두 가지를 유경은 마음속에 조용히 담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