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를 읽고
여행과 사람.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를 읽고.
이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김영하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토종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이력을 가진 작가는 아직 소수에 불과한데, 김영하는 그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전문학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우선순위에서 밀어 두고 있었다. 궁색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의 작품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독서모임 9월 도서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이 책을 일부러 구입하여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독서모임이 선사하는 다양성의 향연과 그에 따른 암묵적인 압박을 즐기기로 이미 오래전에 결정한 나는 며칠 전 이 책을 구입했고 책을 통해 작가 김영하와의 첫 대면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출퇴근 길을 오갈 때도 일부러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몇 개 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 등으로 전달되는, 텍스트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 그의 모습을, 책만 읽으면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괜한 오해 없이 사실적으로 알고 싶었다. 글이란 종종 가면 역할에 그칠 때가 많고, 글쓴이를 그가 쓴 가면을 통한 인격, 즉 그가 선정한 하나의 페르소나로서만 알게 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작업은 차후에 진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산문집은 아무래도 저자와의 만남을 환상 속에서 시작하는 것보단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더 낫다. 나름대로 이런 규칙을 가진 나는 김영하라는 사람을 동영상을 통해 먼저 조금이나마 이해한 후 그가 쓴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내게 처음 다가온 그는 어쩔 수 없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글은 의심할 여지없는 작가의 글이었다. 때론 현미경과 같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때론 나이를 지긋이 먹고 이런저런 인생 경험을 다 해본 어른의 지혜로, 또 때론 나와 조금도 다를 것 없고 친근한 한 인간으로서 그는 타자와 세상, 그리고 자신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숙성시킨 후 그 결과를 이 책 ‘여행의 이유’를 통해 글로 내뱉었다.
책 제목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 책이 단순히 여행 경험담이나 노하우, 또는 올 컬러 사진으로 도배한 여행 답사 기록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달랑 단 하나의 사진이 소개되는데, 그것마저도 그의 여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구 사진이다. 심지어 그가 찍은 것도 아니다. 나사에서 제공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여행 사진 하나 없는 여행에 관한 책이다. 이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차별화 전략일 수도 있고 상상하기 힘든 어떤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의도된 결과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 ‘여행의 이유’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단순한 여행이나 여행 관련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김영하라는 사람과 그의 타자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여행 다녀오기 전의 김영하와 다녀온 후의 김영하가 있다. 여전히 여행 중일 수도 있고 일상일 수도 있는 기묘한 이중적인 의미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한 사람 김영하가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여행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여행은 가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여행은 그저 사람을 있게 한, 사람을 더 사람답게 한, 마치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고뇌하는 유일한 존재자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여행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읽었고, 그렇게 김영하를 만났다. 그의 시선에서 많은 공감도 했고, 여러 에피소드나 그의 남다른 관찰과 통찰에서 소소한 감동은 물론, 여전히 답이 없는 질문과 고민들도 떠안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 나는 답을 잘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낯섦 가운데 던져진 채로 역설적인 자유와 안도감을 느끼고, 연대와 환대를 경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 된 삶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 어쩌면 여행의 이유는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라고 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나는 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