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자기객관화
내가 함께 하기 가장 힘든 사람은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 같지만 자기객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옳고 그른 게 무엇인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늘 예외인 것처럼 여기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무엇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인지 알지만, 그 태도는 남이 자기에게 보여야 하는 태도이지 자기가 남에게 보여야 하는 태도는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경우다.
한 때는 언뜻 이해가 안 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비슷한 양상을 띠는 여러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본 적이 있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었다. 첫째, 자기는 이미 충분히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류. 둘째, 배려와 존중은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것일 뿐 상대방에게 해주는 게 아닌 것처럼 믿고 있는 부류. 첫 번째 부류는 두 번째보다 양호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적어도 자신도 상대방에게 배려와 존중을 해줘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는 정말 답이 없다. 이런 사람들을 잠시만 만나도 나는 진이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이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지면 정말이지 난 그곳을 곧장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다. 탈출하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아직까지도 이들과의 만남을 나는 꺼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 가능하다면 평생 안 만나고 싶다. 이 두 번째 부류에 대해서는 아래에 조금 더 써볼까 한다.
이들은 자신이 아는 정의를 오로지 판단과 정죄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정의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리고 오로지 그때만 활성화된다. 유리한 상황에 있을 땐 꺼져 버리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트릭은 이들이 마치 약자를 대변하는 것처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열심을 다해 싸우는 것처럼 남들에게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에게 속는다. 사실 이들과 함께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은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이들만의 정의가 활성화될 때 이들의 모습은 그 누구 못지않게 강한 전투력을 보이는 용병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이들을 리더로 두고 믿고 따르면 머지않아 전세가 역전되어 자신들이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고 세상의 정의가 바로 설 것 같은 착각 속에 쉽게 빠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 속임수는 매번 먹히는데 이것은 어쩌면 이들이 지속적으로 생존 가능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정의가 바로 세워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의를 부르짖는 건 약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의가 상황이 유리한지 불리한지에 따라 달라지고, 정의가 사회적 지위나 개별적인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 정의를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정의는 그것을 부르짖는 약자들의 입에서 더 많이 되뇔 수는 있지만, 정의가 정의다워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부르짖던 약자들의 상황이 개선된 이후에도 계속 그들의 입에서 되뇌어져야만 하지 않을까. 정의가 개별적인 상황의 개선 따위에만 필요한 개념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약자들의 입에서 정의가 더 적게 부르짖어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바로 정의의 자리가 아닐까. 자기객관화는 정의와 끝까지 함께 가며, 그래야만 정의가 정의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