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향유하는 삶

내가 가장 바보처럼 느껴질 때

by 김영웅

내가 가장 바보처럼 느껴질 때


현재를 향유하는 삶


아직 아이가 없었을 무렵, 몇 달간 아내와 떨어져 지내던 적이 있었다. 혼자 짐을 정리하던 어느 날, 아내의 낡은 신발과 해진 옷이 눈에 밟혔다. 울컥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코를 갖다 대고는 잠시 무너졌다.


기대했던 향기는 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은 나프탈렌 냄새만이 내 코를 마비시킬 뿐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나프탈렌의 탈취 효과는 우리가 사랑했던 기억마저도 모두 제거해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몰랐다. 가게에 진열된 새 신발과 새 옷, 그리고 변변찮은 내 지갑을 번갈아 보며 오랜 시간 아내에게 선물할 상상을 하던 그 설레던 시간들만을 사랑이라고 여겼던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잠시 타지에서 생활하던 아내를 그리워하며 짐 정리를 하던 그날 나는 성숙한 사랑의 일면을 살짝 엿보게 된 건지도 모른다. 신발과 옷이 낡고 해진 기간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한 날들이었다.


함께 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그 신발과 옷은 언젠가부터 아내의 것이 되었지만 정작 나는 그 신발과 옷이 닳아가는 시간들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 몫을 다한 사람처럼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에 기계처럼 무뎌져갔던 것이다.


옷장에서 수개월 동안 냄새가 다 빠진 옷을 만지작거리며 어슴푸레 깨달았던 건 아마도 지금, 여기의 소중함이었을 것이다. 빛바래고 설렘마저 사라져 버린 투박한 일상, 때론 티격태격하고 감정이 상하기도 하는 그 지난한 현실 속에 함께 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사랑과 그것의 소중함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난 몰랐다. 그만큼 나는 미성숙하고 나만 아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늘 있던 자리에 아내가 없어지자 그 공백에서 나는 일상의 균열을 체감하고 그날 바보처럼 그렇게 무너졌던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나 지금, 여기, 바로 내 옆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단 그것을 알아채고 누릴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현재를 향유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알아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도약이며 초월이다. 현재에 갇힌 자는 현재를 향유할 수 없다. 현재를 향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현재를 알아채는 것, 곧 현재를 초월하는 것이다. 현재를 초월하는 자만이 현재를 알아챌 수 있으며 향유할 수 있다. 현재에 갇힌 자는 세속적일 수밖에 없으며 시대의 조류에 순응하거나 휩쓸려갈 뿐이다. 눈을 뜨고 있으나 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 아내에게 어울릴 만한 예쁜 코트를 하나 선물했다. 이젠 아내가 그 옷을 입는 날을 고대한다. 다행히 나의 눈은 어느새 현재에, 일상에, 함께 하는 순간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연 바보 딱지를 뗄 수 있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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